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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
후룩!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반대편에 앉은 여인을 바라봤다.
김서연.
내 기억속의 긴 생머리는 어느새 단발이 되어있었다.
분홍색 오프숄더 원피스룩을 입고 한껏 치장하자 미모가 물이 올랐다.
남자라면 한 번쯤 돌아볼 만큼 아름다운 여인.
29살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동안이다.
남자친구라면 절로 어깨가 올라가고 자부심이 생기겠으나.
-오빤 좋은 사람이지만······ 미안해. 비전 없는 사람이랑 언제까지 만날 순 없어. 이제 결혼도 생각할 나이니까.
-내 친구들은 다 사짜나 이름난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이랑 만나고 결혼하는데 오빠는······ 하아. 됐어. 그만하자.
헤어질 당시 그녀가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5년의 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연애의 끝.
이별을 통보한 김서연은 그 즉시 내 번호까지 차단했다.
매몰차게 헤어지자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왜 보자고 한 거야?”
“그냥. 지나가는 길에 오빠 집이 보이길래. 잘 지냈어?”
잠실 사는 애가 은평구를 지나갈 일이 뭐가 있을까.
직장도 아무런 연도고 없을 텐데.
‘잘 지냈냐고?’
그야 잘 못 지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다시 보면 미친 듯이 떨리고 그리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내 마음은 잔잔한 호숫가의 종이배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란돌프의 영향인가······.’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하지 않아도 란돌프가 되어 행했던 모든 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좀처럼 당황스럽지가 않다.
“그럭저럭. 그러는 넌?”
“나야 뭐, 항상 똑같지. 일, 집, 일, 집. 죽겠어.”
다람쥐 쳇바퀴 굴리는 일상이 지겹다는 말.
하지만 일상이 지겨워서 나를 보러 온 게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얼추 이유도 짐작이 갔다.
그녀가 헤어진 직후 바꾼 프로필 사진. 웬 멋들어진 사업가와 함께 찍은 그 커플 사진이 지금은 내려가 있더라.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환승이별 해놓고선 문제가 생기니까 다시 나를 만나러 온 거다.
이걸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그 정도로 내가 호구처럼 보이는 건지.
‘호구가 맞긴 했지.’
간이건 쓸개건 전부 떼어다 줄 것처럼 해온 연애였다.
그 정도로 좋았으니까 그렇게 했다는 생각은 들지만, 아무 사이도 아닌 지금 같은 과거를 반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슨 말을 하나 보자는 심정으로 침묵하자 김서연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그 일 있고 난리가 났잖아. 가장 먼저 오빠가 걱정되던 거 있지?”
“그 일?”
“‘디맨션 워’ 말이야. 타차원의 괴물들이 지구를 습격한 날! 난 마블이라도 촬영하는 줄 알았다니깐?”
자이언트 맨티스가 나타난 날을 말하는 것이다.
판게니아의 괴물들이 현실에 나타나고, 판게니아에 소환된 사람들이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해 현실에서 괴물들을 퇴치했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그들을 ‘디맨션 워리어’라고 부르며 칭송하기 시작했다.
타차원에서 온 전사들.
그들이 현인류에 빙의해 괴물을 퇴치하는 것이라나.
디맨션 워리어들은 앞으로 들이닥칠 위험을 미리 경고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라섰다.
의외로 판게니아를 직접 언급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하긴. 게임이 현실이 되는 것보단 다른 차원의 공격이 더 그럴싸하긴 해.’
이미 존재한 게임이 현실이 되는 것보단 미지로부터 흘러들어온 괴물이 더 두렵기 마련이었다.
“흥미가 없어 보이네?”
“이제 일어나도 되냐?”
“··· 어?”
여유롭던 김서연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린다.
“얼굴 봤으면 됐잖아. 우리가 가만히 잡담이나 나눌 사이도 아니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의 나였다면 다시 한번 붙잡으며 만나보자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5년도 갑과 을이 명확하게 갈리던 연애였으니까. 미련이 남은 채로 끝낼 수는 없다며 애걸복걸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해야 할 일이 구만리였다.
남에게 끌려다닐 시간 따윈 없었다.
“······ 내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래?”
“그런 건 아닌데. 지금 남자친구는 네가 나 만나고 있는 줄 아냐?”
프로필 사진만 내리면 내가 모를 줄 알았을까?
김서연 계정의 sns 사진은 아직 안 내려간 채였다.
즉, 어장이다.
나와 그 남자 사이에서 간을 보고 있다.
아니면 남자친구와 싸운 뒤 알량한 자존감의 회복을 위해 날 만나는 것이든지.
어느 경우든 최악이었다.
직설적인 화법에 김서연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내가 대놓고 말할지는 몰랐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게······.”
“아! 진짜! 그만 따라오라고요!”
“하나씨.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라니까요?”
그 순간.
카페의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소리를 내지르며 도망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중년의 남성이 바짝 뒤쫓고 있었다.
“이거 엄연한 스토킹이에요.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요.”
“제발! 제발 나 한 번 만나봐요.”
“진짜 싫거든요!”
카페의 모든 사람이 두 남녀에게 주목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남들과는 다른 원인에서였다.
어디서 한 번 본 것같이 익숙한 얼굴.
어디서 봤더라?
순간 남자의, 스토커의 표정이 백팔십도 달라졌다. 애처롭게 부탁하던 스토커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얼굴을 붉히기 시작한 것이다.
“씨발년아, 이게 오냐오냐하니까······!”
“아!”
스토커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여자가 비명을 내지르자 스토커가 이죽거렸다.
“그러게 적당히 받아주면 좋잖아?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분노로 이성을 상실한 모습.
스토커가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를 내질렀다.
“뭘 봐, 이 새끼들아! 구경거리 났어?”
눈을 마주친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돌렸다.
“오빠. 괜히 나서지 마. 요즘 안 그래도 뒤숭숭한데······ 경찰 오겠지.”
김서연의 말대로였다.
누군가는 신고했을 것이다. 몇 분만 지나면 경찰이 와서 저 스토커를 제압할 테니 괜히 나서서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순간 머리채가 잡힌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살려달라고 말하는 듯한 간절한 눈빛.
“오빠?”
······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저 여자가 누군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자이언트 맨티스가 출몰할 당시 아이를 구하던 여자.
“뭐야, 넌?”
“그만하지.”
“새파랗게 어린놈이, 뭐? 그만하지? 이거 안 놔?”
어깨를 부여잡고 말하자 스토커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미친놈처럼 두 눈을 번뜩이며 살기를 흩뿌려댄다.
“웃어?”
하지만 그 살기조차도 지금의 내겐 귀여울 따름이었다.
최근 들어 몇 번이나 사선을 넘으며 전투를 벌였다.
검과 창이 난무하며 시체가 즐비하는 곳에서 한 치의 두려움 없이 임하던 게 나다.
불가해한 난이도에서 생존했고, 더 나아가 병사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다.
무기도 없이 눈빛만 번뜩이는 스토커를 상대로 무서울 리가 없지 않은가.
꽈아아악!
“아악!”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자, 스토커가 비명을 내질렀다.
지금이라면 이 어깨를 박살 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조각난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만! 그만! 악!”
스토커가 온몸을 비틀었다.
‘이 새끼 무슨 아구 힘이······!’
스토커 남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생긴 건 왜소하기 그지없는데 한 번 잡히자 꿈쩍을 할 수가 없었다.
근육이 파열되고 뼈가 가루가 날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이건 정말 인간의 힘이 아니다.
“그만한다고?”
“그, 그래! 그만!”
작게 혀를 찼다. 그러게 한 번 말할때 들으면 좀 좋아?
“커억!”
툭, 놓아주자 스토커가 중심을 잃고 볼품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스토커를 바라보던 여인이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괜찮으세요?”
“예······ 아! 뒤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맥가이버 칼을 펼친 남자가 날을 세워 달려들고 있었다.
“죽어!”
허나, 이미 알고 있었다.
살짝 몸을 틀어 달려오는 스토커의 발을 걸었다.
쿵!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찧은 스토커가 이내 미동도 없이 기절해버렸다.
*
상황이 종료되고 5분가량이 더 지나서야 경찰이 도착했다.
“서까지 같이 동행해주셔야겠습니다.”
대강 상황을 살핀 경찰이 연행하려고 하자, 김하나가 나섰다.
“이분은 순수하게 도움만 주신 분이거든요. 저 남자가 스토킹한다고 신고한 사람이 저예요.”
“그래도 폭행 사건이 벌어졌으니 일단 서까지 같이 가셔야 합니다.”
“폭행 사건이라뇨? 상대는 칼까지 들었는데 그럼 구경만 했어야 된다는 소린가요?”
“원칙상 어쩔 수 없습니다.”
“······ 저 CK방송국 기자 김하나입니다. 실례지만 관등성명이 어떻게 되시죠?”
명함을 건네자 그제야 경찰들의 눈빛이 귀찮아졌다는 듯이 변했다.
CK라면 나름 규모있는 메이저 방송국이다. 국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곳의 기자가 괜히 기사 한 줄 잘못 내면 밥그릇의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참고인 자격으로······.”
“참고인 자격으로 갔다가 잘못 엮이면요? 됐어요, 당사자인 제가 직접 가서 해결할 테니 괜한 사람 붙들지 마시죠.”
스토커는 이름있는 성형외과 원장이다.
비싼 변호사를 쓰면 별거 아닌 일도 별거로 만들 수 있는 세상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도움을 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
경찰들은 당찬 김하나의 행동에 눈을 깜빡거렸다.
‘생긴 건 기자가 아니라 아나운서라고 해도 믿겠는데······.’
‘성격이 대쪽이네.’
보통 이런 일을 당하면 두려워서 울거나 몸을 떨어야 정상인데 김하나는 도리어 처음보는 남자를 두둔해주고 있었다.
경찰들로서도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이윽고 김하나를 둘러싼 주변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 그 사람 아니야?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맞아. 괴물한테서 아이 구해준 사람? TV에도 나온 거 같은데.”
“표창장도 받지 않았어?”
“김하나. 이름도 똑같잖아. 맞네!”
얼마 전 유튜브와 TV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디맨션 워.
타차원의 괴물들이 세계 곳곳을 공격해왔을 때 뜬 건 디맨션 워리어들만이 아니다.
전사가 아님에도 전사처럼 행동한 의인들.
김하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어린아이를 구하고자 대신 괴물에게 잡혀갔으며, 그 이후에도 아이와 아이의 엄마를 구하고자 현장에 달려간 인물.
그 영상은 순식간에 오백만뷰를 달성하며 김하나는 CK에 정식채용 됐고, 의로운 시민 표창장도 수여받았다.
“··· 알겠습니다. 신고자께서 직접 가시죠.”
이런 인물을 상대로 문제가 생기면 더 크게 비약된다.
경찰들도 김하나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김하나는 서로 가기 전에 명함 한 장을 더 꺼냈다.
“오늘 정말로 감사드려요. 여기 제 명함이에요.”
“괜찮습니다.”
“······ 아, 혹시 같이 계신 분이 여자친구분?”
함께 있던 김서연이 여자친구냐는 말.
미소를 지으며 즉시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제가 명함이 따로 없어서요.”
“그럼 번호 적어주실래요?”
가방에서 팬과 종이 한 장을 꺼내든 김하나가 그걸 내게 넘겼다.
나는 거침없이 종이에 번호를 적어나갔다.
란돌프······ 가 아니라, 박현명이라는 이름도 함께.
“박현명? 이름 좋네요. 저는 김하나예요.”
“예. 명함 봐서 압니다.”
“연락드릴게요. 내일 시간 되면 커피 한잔해요. 물론, 식사도 괜찮고요. 제가 살게요.”
“마다 안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꾸벅, 다시 인사한 김하나가 스토커를 연행하던 경찰들과 함께 카페를 나섰다.
······ 폭풍 같은 여자였다.
“와, 대박. 실물이 백 배는 낫다.”
“기자 말고 연예인 해도 되겠는데?”
“설윤 느낌도 좀 나고. 스토커가 붙을 만하네.”
사람들의 감탄 어린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
그러자 북풍한설보다 차가운 얼굴을 한 김서연이,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