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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왕의 터
재능, 후천적으로 얻은 스킬, 능력치와 각종 장비, 장비에 특수한 옵션을 새길 수 있는 탈리스만 등등.
판게니아의 ‘숨겨진 것들’을 찾게 해주는 능력의 종류는 많다.
말 그대로 숨겨진 길을 찾거나, 아이템의 숨겨진 옵션을 찾거나, 봉인의 숨겨진 비밀을 알아내거나······.
하지만 그러한 도움을 주는 종류의 능력은 감히 말하건대 이 히든 특성 하나에 비견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돌연변이.
내가 가진 13가지 히든 특성 중 하나이자, 숨겨져 있는 모든 ‘비밀’을 파헤치는 권능과도 같은 능력!
‘보인다.’
숨겨진 길.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설계한 외통수.
후아아아아아!
절벽 위 성역을 잇는 긴 다리가 있었다.
절벽 아래로 빨아들이는 강력한 바람도 함께 부는 중이다.
정신을 집중해 좁은 다리 위를 걸어가지 않으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있는 구조였으나.
“지, 지금 뭐하는······?!”
내가 다리 옆의 특정 지대에서 높이 뛰자 이자벨라가 기함을 터트렸다. 아마도 자살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보인 것이겠지.
하지만 기함은 순식간은 잦아들었다.
“잘 따라와라.”
“······ 그런 길이 있다는 것도 별이 말해주던가?”
“당연한 소리를 묻는군.”
이자벨라가 기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성역엔 곳곳에 보이지 않는 작은 땅의 블록이 허공에 떠 있었다.
기껏해야 성인 한 명이 겨우 올라갈 만큼 비좁다. 제대로 밟지 않으면 그대로 추락해 죽겠지만 내 눈엔 너무나도 또렷하게 보였다.
‘탐색 스킬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군.’
이전 캐릭터로 이곳에 들어왔을 땐 온갖 도구와 스킬을 갖춘 채였다.
예컨대 스킬 레벨이 10에 이르러 초월한 ‘탐색’ 스킬 ‘혜안’조차도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처럼 또렷하게 숨겨진 길을 알려주진 못했다.
얼추 그곳에 땅이 있다는 설명 정도이지, 글로 읽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차이의 간극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강기류가 워낙 강해 날개로 날아가는 것도 소용없다.
저 바닥에는 ‘심해어’가 있으므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레벨이 몇이든 죽는다고 보면 된다.
오직 땅. 땅을 밟고 지나가야 살 수 있다.
‘탐색율 100%, 가능한가?’
서브 퀘스트라도 무려 성역 탐색이다.
이전에 들어왔을 땐 끝을 보긴 했지만 탐색율은 97%대에서 멈췄다.
97%에서 받은 게 특수 아이템 ‘호른의 영광’이었으니까······ 100%를 채우면 서사급의 보물을 줄지도 모른다.
나는 한 칸 더 뛰어오른 뒤 고개를 돌렸다.
“······? 뭐 하는 거냐?”
이자벨라가 뛰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다리에······ 쥐가 났다.”
··· 잠깐 어이가 없었다.
병사들을 습격하면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아다닐 땐 언제고.
개 풀 뜯어 먹는 소리가 따로 없었다.
“뛸 때 힘 조절은 필수다. 잘못하면 하강기류로 쓸려갈 테니 조심하도록.”
넓은 간격은 아니지만 문제는 하강기류다.
바람이 너무 강해서 자칫 잘못했다간 그대로 쓸려갈 수 있었다
아무리 이자벨라가 레벨이 높고 날렵해도 그 순간 죽음은 확정인 셈.
“성역에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니······.”
“빨리 뛰어라. 시간 없다.”
“정말 여기로 가면 ‘별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건가?”
이 녀석 봐라.
“무섭나?”
“하, 그럴 리가.”
애써 코웃음을 치고 있지만 내게는 보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자벨라의 촉촉한 두 눈이 힘차게 떨리고 있는 것이 말이다.
저런 캐릭터였나?
파이살메르의 2인자까지 올라갔으면 두려움과는 담을 쌓아야만 한다. 여왕의 눈에 들고, 장로들에게 인정받아야만 공주라 불릴 자격이 생긴다.
그야말로 철혈의 여인. 뱀공주 이자벨라는 그런 인상이었다.
피식 웃으며 놀렸다.
“생각보다 겁이 많군.”
“··· 나는 겁이란 단어를 모르니라. 정말 다리에 쥐가 났을 뿐이다.”
다리를 푸는 시늉을 하곤 이자벨라가 뛰었다.
첫 번째 블록에 착지한 이자벨라가 보란 듯이 나를 치켜봤다.
보아라, 겁은 무슨. 그렇게 말을 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래를 절대 쳐다보지 않는다.
설마 고소공포증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잘했다.”
“몇 개나 남았지?”
“흠.”
얼추 보이는 블록을 계산 후 말해주었다.
“70블록 정도만 가면 도착한다.”
“70······.”
“아니, 80인가?”
“······.”
“90일 수도 있겠군.”
이자벨라의 두 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성각자 란돌프. 그는 이상하고 신기한 사람이었다.
성역의 독기와 마기는 생명을 좀먹는다. 하여 선택되어 축복을 받거나 그를 이겨낼 만큼의 신체 능력을 지녀야만 겨우 입장하는 게 가능하다.
그런데 란돌프는 별다른 장비나 축복 없이도 성역을 자유로이 활보하고 있었다. 이자벨라조차도 숨을 쉬는 게 버거운 이 장소에서 말이다.
심지어 수천 년간 밝혀지지 않은 숨겨진 길을 보거나 사방에서 날아오는 함정을 꿰고 있다는 듯 여유롭게 피해 다녔다.
‘어떻게 나도 몰랐던 길을······.’
파이살메르의 2인자인 자신도 모르는 길을, 어쩌면 성역의 제사장도 모르고 있을 길들을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모두 한 발자국만 잘못 디뎌도 죽는 외길이었다.
란돌프가 디딘 길을 기억과 감각에만 의존해서 가야 했기에 극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
헌데, 묘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누군가의 뒤를 쫓아가는 이 형세가.
이토록 필사적으로 다른 이의 뒤를 쫓아본 적이 있었나?
‘없었어.’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앞장서는 존재였다. 앞만 보고 달려나가는, 앞에 누군가가 있어서도 안 되는 그런 자리에 위치한 절대강자.
모두 저주를 풀기 위해서다.
공주의 자리를 꿰차면 저주를 풀어주겠다는 여왕의 말만 믿고 미친 듯이 달려왔다.
하지만 여왕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긴장 풀어라. 셋 세면 뛰는 거다. 내가 받아주마.”
보이지 않는 길을 통해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면 이번에는 올라가는 길이었다.
마찬가지로 투명한 계단을 따라 천장에 닿아야만 했다.
이에 속도가 늦춰지자 란돌프가 말한 것이다.
이자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먼저 가거라. 천천히 따라가겠으니.”
“그럴 순 없다.”
“······.”
이자벨라는 입을 꾹 닫았다.
저 태도, 저 눈빛.
익숙하지가 않았다.
마치 자신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애정이 어린 몸짓이.
“왜······.”
왜 나를 그런 식으로 쳐다보느냐 물으려다가 다시 입을 꾹 닫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예전에 우리가 만난 적이 있나?”
“같은 공간에서 만난 적은 없다.”
“······ 그게 무슨 뜻이지?”
“나는 너를 보았지만, 너는 나를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해서 머리를 쪼개봤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성각자였다.
“그럼 별이 보여주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비슷하다고 해두지. 자, 가자. 동이 트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동이 트면 전사들의 죽음도 알려질 것이다. 자리에 없는 이자벨라는 의심을 받을 것이고, 머지않아 여왕의 추적대가 꾸려지리라.
성역이 봉쇄라도 된다면 빠져나갈 길은 더더욱 없어진다.
“하나, 둘······.”
란돌프가 셋을 외치는 순간 이자벨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비좁은 타일에 겨우 오르자 숨소리가 지척까지 느껴졌다.
“그냥 업혀라. 그게 더 빠르겠군.”
그 또한 맞는 말이다. 진즉에 업혔으면 이미 천장에 닿았을 터. 이 상황에 이르러서 더 고집을 피울 수도 없었다.
문제는 살아생전 이자벨라가 단 한 번도 남자의 등에 올라 타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막에서 여자가 남자의 등에 오르는 건 각별한 사이를 뜻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외간남자의 등에 업히는 일은 아예 없었건만.
“······.”
입술을 깨문 이자벨라가 란돌프의 등에 업혔다.
그리곤 고개를 푹 숙였다.
이윽고 천장에 닿자 세상이 반전됐다.
‘영역 결계!’
영역 전체에 결계를 쳐두고, 정해진 길을 따라온 자에게만 나타나는 또 다른 지역.
그런 게 성역 안에 있었을 줄이야.
꽃밭. 그리고 언덕이 있었다.
쿠릉! 쿠르르릉!
순간, 언덕인 줄 알았던 것들이 들썩이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골렘.’
골렘 세 기. 가슴에 새겨진 룬의 크기로 보아 최소 상급이다.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스릉.
등에서 내려온 이자벨라가 양손에 단검을 꺼내 들었다.
*
골렘이 처리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동사냥하는 기분이 이런 건가.’
적이 나타나면 이자벨라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처리했다. 당장 내 레벨에선 적대하기 힘든 수준의 골렘들조차도 이자벨라 앞에선 순두부나 다름이 없었다.
순식간에 핵을 파괴한 이자벨라가 단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 찰나였다.
《‘골렘 제작자’ 클래스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역시나.
성역의 숨겨진 던전. 본래 이곳은 스킬을 획득할 수 있는 장소였다.
클래스가 있었다면 아마도 ‘골렘 파괴술’같은 스킬을 획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클래스가 없기에 스킬 대신 ‘골렘 제작자’의 클래스를 획득하게 해주었다.
이게 제작자가 의도한 건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애당초 성역의 독성을 이겨내려면 레벨이 최소 7은 넘어야 했다.
레벨 7에 클래스가 없는 경우는 없고, 만에 하나 나처럼 히든 특성으로 해결한다고 해도 숨겨진 길을 찾아내 골렘을 사냥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거부한다.’
《‘골렘 제작자’ 클래스의 획득을 거부했습니다.》
골렘 제작자. 급으로 치자면 상급의 클래스다. 판게니아는 무언가를 소환하거나 같이 싸우는 형식의 클래스가 희귀했으므로.
하지만 내가 바라는 클래스는 아니다.
이 정도의 급으로 전당의 1순위를 기록할 순 없다.
‘이자벨라가 사냥한 걸 내가 사냥했다고 취급은 해주는군.’
다만, 의아한 점은 있었다.
판게니아는 파티 시스템이 존재하긴 하지만 ‘기여도’에 따라 모든 걸 나눈다.
스킬, 혹은 클래스라면 높은 기여도로 사냥해야만 얻을 수 있다.
하여 마지막 공격을 가하는 식으로 약간이라도 기여를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백 번쯤 반복하면 한 번은 얻을 테니까.
그런데 한 번에 성공했다. 기여를 아예 안 했는데도.
‘갑자기 파티 상태에 들어서기라도 한 건가?’
바깥의 전사들을 죽일 때나, 성역 안에서 자잘한 괴물들을 이자벨라가 처리할 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랬다.
《‘악마 사냥꾼’ 클래스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룬 워리어’ 클래스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기아의 창술사’ 클래스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
사냥을 이어갈 때마다 들려오는 시스템의 음성과 글귀들.
‘모조리 거부한다.’
충분히 뛰어나지만 이 역시 내가 바라는 클래스는 아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마침내 도착한 거대한 산.
《‘이름 없는 별이 묻힌 산’에 도착했습니다.》
《주의. 권장레벨(10)에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산의 주인, ‘옛 왕’이 침입자들에게 노합니다.》
*
거대한 산의 주인. 저 거신을 죽이려면 최소 10레벨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옛 왕을 죽이지 않았다.
죽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옛 왕이 격의 차이를 알아보곤 공격해오지 않은 탓이다. 당시 나는 별 세 개를 먹어 초월해 옛 왕 따위는 아득하게 뛰어넘는 초월자였다.
‘지금은 약해져서 만만하다 이거지.’
······ 도우미 NPC가 아니었던 건가.
솔직히 당시엔 별로 향하는 길을 알려주는 친절한 도우미 NPC라고 생각했다.
그냥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것뿐이었다.
「감히 옛 왕의 터에 들어오고서도 살아나갈 수 있다고 여겼느냐?」
산 전체에 울리는 목소리.
보석과 같이 반짝이는 몸.
거대하기 짝이 없는 흑요석의 뱀!
“아.”
거신을 앞에 두고 이자벨라의 몸이 바짝 굳어버렸다.
레벨 10은 초월자의 바로 전 레벨. 이자벨라의 레벨이 8이라지만 10이라는 숫자는 넘을 수 없는 벽이요 격이다.
게다가 뱀에게서 흘러나오는 하울링은 마치 놈을 용처럼 보이게끔 했다.
부들부들!
이자벨라가 몸을 떨었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는 걸 알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피라미드 최상위 포식자를 마주한 먹이가 으레 그렇듯이.
쯧.
혀를 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이자벨라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인간이라면 절대로 옛 왕의 절대영역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비켜라. 너는 그곳을 지키고 있을 자격이 없다.”
「인간이 헛소리를 하는구나. 내가 이곳을 지키지 않으면 누구에게 자격이 있다는 것이냐?」
옛 왕이 혀를 내밀었다.
한입에 삼켜버리겠다는 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빌헬름.”
하지만 채 다가오기도 전에 옛 왕은 경직했다.
「······ 그 이름을 어떻게?」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고?
“진정한 산의 주인은 네가 아니라 빌헬름이지 않느냐?”
그야 내가 빌헬름이니까.
죽고 삭제당했지만, 이 산의 주인은 옛 왕이 아니라 나였다.
옛 왕이 내게 양도했고 그리하여 별의 주인이 됐다.
고로, 불법 침입자는 내가 아니라 저놈이었다.
「네놈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다만, 놈은 죽고 별은 떨어졌다. 이 산 역시 마찬가지!」
자유의 몸이 된 옛 왕이 입을 크게 벌렸다.
이어 나를 덮칠 찰나.
“너의 주인이 돌아왔다, 옛 왕― 드라무트여.”
콰르르릉!
순간 급하게 방향을 전환한 놈의 머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