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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착각할 리 없다. 꿈과 현실을 혼동할 만큼 맛이 간 것도 아니다.
진짜다. 진짜로 판게니아의 괴물이 현실에 나타났다.
탕! 타앙!
바로 앞 경찰서의 경찰들이 튀어나와 권총 사격으로 대응했지만, 씨알도 먹히질 않았다. 단단한 피부표면에 흠조차 내지 못한 채 자이언트 맨티스의 먹잇감이 되었다.
“살려······ 악!”
“긴급상황! 긴급상황!”
무전을 치며 대치 중인 경찰들. 일반 시민들 대부분은 도망치고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건물 안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상황만 주시하는 중이다. 몇몇은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비이이이이이이잉-!
공습경보가 데시벨을 올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난 상황과 마찬가지로 큰 소리를 냄과 동시에 액정 위로 떠 오른 내용들.
〔14:32분 미상의 공격 발생. 서울특별시, 부산, 대구, 경기 전역.
*가까운 지하대피시설로 대피하고, 방송 청취〕
······ 여기서만 발생한 게 아니라는 소리다. 한국 전역에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이 시작됐다. 정체 미상의 생명체로부터.
하지만 나는 저게 뭔지 안다.
판게니아를 플레이하게 되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필드 보스 몬스터.
4Lv의 자이언트 맨티스!
저 특유의 더듬이를 활용한 공격과 등 쪽에 나 있는 선명한 붉은색의 꽃을 보면 모를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게임 속의 나는 유연하며 유능한 만능의 플레이어지만 현실에서의 나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다.
머리가 아프다. 심장박동은 끝도 없이 빨라져만 갔다.
“아아아앙! 엄마! 엄마아아!”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즉시 고개를 돌렸다.
판게니아에서 얻은 보상들 전부를 현실로 가져왔다.
게임 속의 괴물들이 버젓이 현실을 돌아다닌다면, 게임에서 얻은 저것들도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히드라곤의 혼!’
룬이 새겨진 돌을 쥐었다.
히드라곤. 필드 보스인 자이언트 맨티스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괴물이다.
공략법을 알아서 쉽게 잡았을 뿐이지 본래라면 12명이 공략해야 하는 시련이었으므로.
슥슥슥!
“이거 왜 안돼?”
인상을 찌푸렸다.
게임상에선 더블클릭만 하면 된다. 그럼 캐릭터가 돌을 꺼내 손으로 닦는 시늉을 하며 소환이 완료된다.
열심히 닦아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현실과 게임을 동기화해준다고 했다.
황금률의 동전을 가로채듯 쥔 채.
“온.”
순간 눈앞에 여신이 나타났다.
판게니아의 쌍둥이 여신. 로그인할 때 항상 보아왔던 여신이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란돌프’와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완료되었습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잔여 시간은 24시간입니다.>>>>
······ 터질 것 같은 심장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몸의 떨림도, 복잡하던 머릿속도 깔끔하게 정리됐다.
손을 펼쳤다. 두꺼운 손. 나는 란돌프가 되어있었다.
미켈라의 칼을 들었다. 두꺼운 양손 대검이 착 감겨왔다.
히드라곤의 혼을 쥐었다. 그대로 창가로 다가가.
턱!
창틀을 밟고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구식의 5층 빌라. 평범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즉사할 높이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중에 떠오른 채 공기의 저항감을 느끼며 히드라곤의 혼을 문질렀다.
구오오오!
대로에 히드라곤의 성체가 소환됐다.
나는 히드라곤의 등을 타고 맨티스에게 진격했다.
*
‘특종!’
인턴 기자 김하나는 괴물의 습격 순간 특종을 떠올렸다.
거대한 사마귀가 도심을 습격해왔다.
이 순간만 제대로 포착해내면 올해의 퓰리처는 따놓은 당상이다.
찰칵! 찰칵!
최대한 근접한 뒤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대박.”
영화 소품이나 CG 따위가 아니라 현실감 넘치는 진짜 괴물이었다.
특종. 지긋지긋한 인턴 생활도 이제 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아아아앙! 엄마! 엄마아아!”
멀지 않은 곳에서 이제 5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장바구니. 건물 잔해에 깔린 여자.
거대 사마귀가 눈을 돌렸다.
오만 감정이 다 들었다.
저 잔인무도한 괴물이 한 가정을 박살 내는 모습까지 찍어야 하나? 그게 선배들이 말하는 진짜 기자정신인가?
망할. 김하나는 구두를 내던지곤 이를 악물고 달렸다.
친구 부탁으로 소개팅 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지만 일일이 그런 걸 따질 시간이 없었다.
김하나는 거의 번지 하듯 뛰어들어 아이의 몸을 감쌌다.
“괜찮아? 괜찮니?”
“엄마가······.”
“아, 아가씨. 우리 아이 좀······.”
잔해에 깔린 여인이 정신을 되찾곤 겨우 입을 열었다.
아이를 구해달라는 엄마의 말.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하지만 김하나도 간과한 게 있었다.
그건 괴물의 더듬이가 생각 이상으로 빠르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촉수를 확인한 김하나가, 아이를 옆으로 밀었다.
‘아.’
순간 몸이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곧이어 그녀의 눈앞에 거대한 사마귀의 얼굴이 놓였다.
머릿속으로 주마등이 지나갔다.
이렇게 죽는구나. 꽃다운 나이에 제대로 연애 한 번 못해보고 가는구나.
―우리 병원 젊은 원장님. 너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어찌나 조르던지. 제발 한 번만 만나주면 안 되겠니, 하나야?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 대학생 때 학교 대표 킹카였다는데 엄청 잘생겼거든? 키도 크고 얼굴도 대박. 너 이 기회 놓치면 후회한다?
소개팅을 나가면 안 됐던 걸까.
친구 말마따나 괜찮은 사람이긴 했지만, 애당초 연애 생각이 별로 없어서 시간만 보내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그게 왜 이렇게 된 거지?’
김하나는 눈을 꾹 감았다. 거대 사마귀의 입과 돌기처럼 돋아있는 수많은 이빨들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촤악!
그 찰나였다.
몸이 다시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누군가의 체온이 느껴졌다.
살짝 눈을 뜨자.
“누구―”
“······.”
야생미가 느껴지는 남자.
그가 내던지듯 김하나를 떨어트렸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김하나는 웬 정체 모를 괴물의 등에 올라타게 되었다.
‘뭐, 뭐야?’
괴물이 하나가 아니었어?
이건 용인가? 그런데 용치곤 머리가 많다. 아홉 개의 머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마귀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괴물 중의 괴물.
“딸꾹!”
“꽉 잡고 있어라.”
한국말이다. 김하나가 괴물의 등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거대한 대검을 든 남자가 뛰어올랐다.
카아아악!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용이 사마귀를 미친 듯이 물어뜯기 시작했다.
거대한 사마귀가 비명을 내지르며 울부짖는다.
그 광경은 마치 전설이나 신화 속의 장면 같았다.
김하나는 넋을 잃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남자가 대검을 장난감처럼 휘두를 때마다 초록색의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아홉 개의 머리에 물린 사마귀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폭력. 이토록 잔인하고 처절한 폭력의 현장을 김하나는 생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영화나 드라마로 느껴지는 수위는 애들 장난과도 같았다.
신화 속의 영웅이 이런 모습일까.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날것 그대로의 야성미였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김하나는.
“아······.”
전율했다. 몸이 떨렸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형용할 수 없는 존재와의 만남에.
쿵!
결국, 거대 사마귀는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쓰러졌다. 갈퀴와 목을 잘린 채 두 눈에 초점을 잃었다.
그러자 사마귀의 사체가 먼지처럼 사라져간다. 회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모습을 감췄다.
머리 아홉 개 달린 용도 마찬가지였다.
김하나는 부웅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 살려······!”
손과 발을 좌우로 흔들다가 어느새 다시 누군가에 안겼다.
괴물을 죽인 남자.
그가 지상에 떨어지는 김하나를 안아 들곤 안전하게 착지시켰다.
“가, 감사합니다.”
“······.”
두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등을 돌렸다.
멀어져가는 남자를 바라보며 김하나가 핸드폰을 들었다.
찰칵.
“아.”
직후 무언가를 깨달은 듯 김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사람들이 힘을 합쳐 건물 잔해에 깔린 아이의 엄마를 꺼내고 있었다.
김하나도 달려나가 잔해를 드는 일에 힘을 합쳤다.
*
세상은 난리가 났다.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온 괴물들.
괴물들은 등장 즉시 사람들을 죽이고 인류문명을 파괴했다.
하지만 나타난 건 괴물뿐만이 아니었다.
총도 통하지 않는 괴물을 무 썰 듯 베어버리는 전사들. 중세시대와 같은 갑옷이나 검, 창, 활 따위를 두르고서 괴물을 무참하게 살육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안전을 제가 지키겠습니다!”
“괴물들의 세상이 도래할 겁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합니다!”
그중 몇몇은 자국어를 내뱉으며 사람들의 안전을 얘기했다.
더욱 놀라운 건 그들이 한 ‘변신’이었다.
전사의 모습으로 존재하던 그들이, 평범한 사람으로 되돌아와 이와 같은 말을 쏟아낸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유지시간 한 시간 남짓. 다들 시간은 아끼고 싶은 거겠지.”
한 남자가 쏟아지는 기사와 영상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나타난 전사들은 모두 ‘로그아웃’이 가능한 랭커들이다.
메인 퀘스트 별로 순위권에 오르면 로그아웃 할 수 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의 잔여 시간은 최대한 아껴야 하니까.’
하지만 현실과 캐릭터를 동기화시켜주는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은 소모품이다. 짧으면 1분, 길면 한 시간 정도나 겨우 유지해준다.
하여 현실에서 동기화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현재 로그아웃이 가능한 알려진 인물은 총 여덟.
그중 남자는 ‘학살’이라는 랭커 캐릭터를 보유한 강자였다.
상황을 살피고자 학살은 이번 사태에서 한 발 빠졌다.
괜히 나섰다가 판게니아의 캐릭터 외형이 알려지면 게임과 현실 양쪽 모두가 위협받을 가능성이 컸다.
그도 그럴 게 학살은 모두가 인정하는 비매너 플레이어였으니.
‘그나저나.’
학살은 턱을 쓸었다.
‘팬텀이 나타날 줄 알았는데. 팬텀처럼 보이는 놈은 없군.’
팬텀. 혹은 고스트.
판게니아의 명실상부 1위 플레이어.
아무도 이름을 몰라서 모두 그렇게 부른다.
예측으론 수백 개의 캐릭터를 보유했으며 최근 ‘마계 대원정’을 실행한 녀석이 팬텀이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온갖 방해 공작으로 대원정은 실패했고, 팬텀 역시 죽어서 캐릭터를 삭제당했다.
‘팬텀은 진짜 운영자인가? 아직도 게임으로 플레이하고 있었다는 거잖아.’
학살 역시 순수한 게임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2년 전에 학살 캐릭터가 죽으며 판게니아로 소환됐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팬텀만, 팬텀으로 추측되는 자만 계속해서 게임을 영유했다.
그 원인을 알아내고자 온갖 사람들이 팬텀을 찾아 나섰다.
팬텀으로 보이면 일단 방해를 하거나 배신을 해서 죽인 뒤 캐릭터를 삭제시켰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캐릭터가 삭제되면 판게이나로 소환됐기 때문이다.
‘아니야. 분명 그 캐릭터로 소환됐을 거다. 보유하고 있던 가장 강한 캐릭터가 죽으면 소환되니.’
유일급 장비를 여덟 개나 갖추고, 온갖 보물과 재능으로 무장한 5성급 캐릭터.
10레벨을 넘어 별을 다섯 개나 먹였으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분명히 팬텀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캐릭터였을 것이다.
운영자가 아니라면 필시 소환되었을 거다.
그리고 판게니아로 소환되면 초기화가 되긴 하지만, 가장 강했던 캐릭터의 재능만은 고스란히 이어받을 수 있다.
외형도 달라지고 NPC처럼 변해 다른 사람과의 접점도 모두 사라지지만 메인퀘스트를 진행하며 더 강해질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 란돌프. 이놈이 팬텀인가?’
2년 전 소환된 이후 학살은 수많은 메인 퀘스트들의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학살은 레벨 10. 다른 랭커들이 그러하듯 히든 특성마저 지닌 랭커다.
그런데 거의 변화가 없는 순위에 최근 변화가 생겼다.
그것도 최초의 메인 퀘스트, ‘생존’ 부분에서.
‘220점이라니.’
그게 가능한 수치인가?
2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다고 해도 220점을 획득할 자신이 없었다.
이런 게 가능하다면 그건 분명 팬텀이다.
자신처럼 랭커들 모두가 확인했을 터이니, 표적이 되는 건 시간문제.
경쟁자는 제거한다. 또한 팬텀이라면 죽이는 순간 엄청난 양의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현실과 판게니아가 본격적으로 ‘침투’되고 있다는 게 확인됐다. 황금률의 조각을 얻으려는 경쟁 역시 본격화 되리라.
나중에는 판게니아와 현실이 아예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
판게니아의 NPC가 현실로 나타나거나······ 정말 마왕이 강림하거나.
그 전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앞으로는 더 강한 자가, 더 많은 황금률의 조각을 지닌 자가 이 시대의 주역이 될 건 자명했으니.
“······ 히드라곤? 누구야, 이건.”
그러던 와중 한 영상을 보고 학살이 인상을 찌푸렸다.
히드라곤.
공식적으로 풀린 적 없는, 아니 딱 하나 풀린 그 괴물과 함께 나타난 전사.
분명히 처음 보는 외형이다.
학살은 전사의 외형을 눈에 담았다.
그 외에도 한국에 나타난 다른 전사 캐릭터들 역시 눈에 담았다.
모두가 경쟁자다.
앞으로 펼쳐질 혼돈의 시대에 주역은, 자신이어야만 했으므로.
*
“성역으로 들여보내 달라? 미친 건가?”
······ 뱀 공주 이자벨라가 경악했다.
다름 아닌 나의 요청 탓이다.
사막의 성역. 그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는.
‘메인 퀘스트 첫 번째가 생존이라면.’
그러나 나는 반드시 성역으로 가야만 했다.
‘메인 퀘스트 두 번째는 클래스를 얻는 것이다.’
클래스. 메인 퀘스트를 진행함과 동시에 더 강해질 방법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곳에 별이 있다.”
“뭐······?”
이자벨라의 눈가가 떨렸다.
별. 별의 축복을 받을 방법이 그곳에 있다니 놀란 것이겠지.
예전에 포기했지만 최근 플레이하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사막의 성역에 별이 있다. 여왕의 저주를 풀 방법이.
다만, 숨겨져 있었다.
‘가장 낮은 곳에 있지만 어떠한 별보다도 빛날 수 있는 별.’
그리고 내가 바라는 클래스 역시도 그 별에게서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