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이로운 결과
냉정하게.
냉철하게 주변을 살피고 상황을 정리한다.
먼저 공격해온 노예 상인들의 레벨을 바라봤다.
【Lv3.】
대부분이 3에 수렴했다. 일반병사 수준. 사막의 대전사들이 아니라면 살아날 구멍은 있다.
“컥!”
“히, 히드라곤이 너무 많아!”
문제는 저놈들. 레이드 보스 몬스터 판정을 받는 레벨 5의 괴물이 무려 셋이다.
‘내 레벨은 1이다.’
반면에 나는 1이다. 전부 나보다 높다.
아무리 생각해도 양심이 없는 퀘스트였다. 이런 전장의 한복판에서 레벨 1로 생존하라니?
게다가 보스몬스터는 레벨 외에 추가효과 판정이 붙는다.
‘히드라곤은 시력이 나쁘다. 몸과 머리를 동시에 움직이지도 못해.’
하지만 이 세계는 공략법만 숙지하면 1레벨도 5레벨 보스몬스터를 죽일 수 있다.
애당초 1레벨 12명이 모여 잡도록 설계된 게 히드라곤이었다.
진짜 레벨의 차이, 격의 차이를 느끼는 건 7레벨부터다.
그러니까 그 전의 레벨은 어떻게든 극복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할 수 있다.’
1레벨이라도 좌절하긴 이르다.
가장 중요한 건 나는 이 게임의 고인물 Of 고인물이라는 것이었다.
혼자서 12인분, 까짓거 해내면 그만.
까앙!
검과 시미터가 부딪혔다.
어느덧 다가와 눈앞에서 살기를 뿌리는 병사 한 놈.
‘실제상황이다.’
게임이 아니다.
검을 휘두르고 몸을 쓰는 모든 게 클릭 한 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곳은 살과 살이 부딪히고 베이며 찢기는 전장이다. 직접 몸을 움직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도저히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희망은 있었다.
‘검로가 보인다.’
【웨폰 마스터】의 영향일까?
검로가 보인다. 내가 휘둘러야 할 장소가 정확하게 읽힌다.
또한 무기를 쥐자 절로 숙지 되었다. 수만, 수십만 번 휘둘러본 것처럼 손에 익었다.
내가 해야 할 행동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지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콰직!
비스듬히 검을 쳐내고, 주먹을 뻗어 병사의 턱을 박살 냈다.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병사의 목을 베어냈다.
망설임은 없었다. 두려움도 없었다.
검로, 그리고 모든 투로(鬪路)가 이미 내 눈에 투영되고 있었으니!
*
뱀공주는 전장의 중심지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곳을 지우는 게 그녀의 사명. 사막여왕의 절대적인 명령이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왕 다음가는 강자. 하물며 숫자도 이쪽이 훨씬 많았으니.
그런데 노예 중 한 명이 갑자기 나대더니 자신의 병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건 히드라곤 한 마리도 저놈이 죽였다는 것이다.
혼자서 전장을 휘젓고 있다.
“······ 저놈은 뭐지?”
*
“헉! 헉! 하아악!”
심장이 파열될 것만 같다.
뜨거운 숨결을 내뱉을 때마다 목 천장을 칼로 긁어내는 느낌이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게 핏방울인지 땀방울인지 이젠 구별조차 되지 않을 지경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채엥!
수백 번을 부딪친 검날이 부러졌다.
그러자 나를 감싸오던 망이 더욱 촘촘하게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창을 든 창병들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검이 부러졌다! 죽여!”
“지금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들은 정규군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대의 방식대로 틀을 짜고 하나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때마침 승리욕에 취해 대열을 흩트리고 다가오는 창병 하나.
“어억!”
나는 그 창병의 근처까지 몸을 굴려 다가가 바닥을 쓸었다. 발이 걸린 창병이 그대로 쓰러지며 창을 떨어트렸다.
바닥에 창이 닿기 전에 잡아들자 그 순간의 빈틈을 노리고 병사들이 검을 휘둘렀다.
창날을 돌려 날아드는 검의 끝에 걸고 반동력을 이용해 쳐냈다. 그러자 병사의 상체가 균형을 잃었다.
“꺽!”
창날로 병사의 목에 구멍을 뚫었다. 즉사. 쫘악, 소리와 함께 창살을 빼내고 창을 돌려 다가오는 움직임들을 저지했다. 평생을 창만 단련해온 창술의 달인 같은 곡예에 주변 병사들의 혼이 빠졌다.
【철혈군주의 심장】으로 인해 냉철하게 주변을 살피고, 쉽게 지치지 않을 수 있다면 또 다른 히든 특성 중 하나인 【웨폰 마스터】는 모든 무기를 숙련도 없이 숙련자처럼 다룰 수 있게 해준다.
심지어 【손재주】와 함께 시너지 효과를 냈다.
<검의 숙련도가 6Lv로 격상했습니다!>
<창의 숙련도가 6Lv로 격상했습니다!>
히든 특성 【손재주】는 스킬의 숙련도와 관계가 있다. 웨폰 마스터가 모든 무기를 다룰 수 있게 해주고, 숙련도를 5Lv로 시작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면 손재주는 더 높은 숙련도로 ‘쉽게’ 나아갈 수 있게끔 도와준다.
스킬의 숙련도 역시 10레벨이 끝이다. 숙련도 6레벨은 이름있는 기사가 평생을 갈고닦은 수준의 능숙함을 뜻했다.
그것을, 무기를 쥐자마자 이루어냈다.
히든 특성 간에도 이처럼 연동되고 시너지를 내는 것들이 있다. 물론 이건 극소수만 알고 있는 내용이다. 히든 특성은 플레이어들 사이에도 그다지 알려진 게 없었으니까.
검을, 창을, 도를, 활을, 시미터를, 철퇴를. 무기라면 가리지 않고 사용했다.
“괴물 같은 새끼!”
“저 괴물 같은 놈도 지쳤다!”
“죽여라!”
온갖 극찬과 함께 망은 더욱 좁혀들고 있었다.
습격자는 500명. 히드라곤도 하나 죽였다지만 혼자서는 벅차다.
이제 고작 레벨 1인 내가 병사 서른에 히드라곤까지 죽였으면 할 건 다 했다. 최대한 움직임을 적게 해 체력을 분배하고 모든 무기를 활용한 덕이었다.
다른 플레이어가 봤다면 기겁했으리라. 고인물들도 저게 가능하냐며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그래도 슬슬 한계였다.
한계지만.
<레벨이 올랐습니다!>
<체력과 마력이 회복됩니다.>
<피로도가 회복됩니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걸 기다리고 있었다.
‘2라운드 시작이다.’
어깨를 풀었다. 가파르던 숨이 안정감을 되찾아간다. 다가오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느껴진다. 각성을 한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멈춰라.”
우우웅-
그때였다.
전장을 타고 고막을 강타한 여인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병사들이 바짝 굳은 채 멈춰버렸다.
‘드디어 왔군.’
병사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렸다.
히드라곤의 위에 올라 느긋하게 전방을 주시하던 여자.
이곳 사막의 전사들과 달리 타긴 했지만 유난히 흰 피부. 고양이 같은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그녀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그녀의 출현을 예상하곤 있었다.
“고, 공주님께서 나서실 것까진······.”
뱀공주. 그녀를 향해 백인장이 용기를 내어 말하자, 뱀공주가 비웃었다.
“저자는 지치지 않았다. 지친 척을 하고 있었을 뿐이지.”
“······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숨과 땀이······.”
“잘 보아라. 저자의 숨이 차 보이는가?”
“······.”
순간 백인장의 눈이 내게 향했다.
어느새 숨을 가다듬은 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 저런 괴물 새끼가 다 있냐’하는 표정과 눈빛.
“지친 척하고······ 방심을 유도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본의는 아니지만 레벨업으로 체력을 회복한 게 뱀공주에겐 그렇게 읽힌 모양이다.
나는 변화 없는 표정으로 뱀공주를 맞이했다.
“역시나. 날 마주하고도 변함없는 이는 흔치 않지.”
순간적인 살기가 읽혔으나 ‘철혈군주의 심장’에 의해 나는 놀라지도 수축 되지도 않았다.
기운만으로도 상대를 재단할 수 있는 존재. 나는 그녀의 머리 위를 바라봤다.
【Lv 8】
레벨 8. 어디에 내놔도 ‘최강자’소리 들을 법한 레벨의 소유자!
판게니아의 강자를 가르는 기준은 7레벨이다. 7레벨부터 본격적인 차이가 나타나며 레벨의 격차를 어지간해선 뒤집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8레벨은 어느 유명한 단체의 수장들이나 가능한 레벨이었다. 인구 백만의 대도시에 한, 두 명이 있을 법한 수준이었다.
‘파이살메르에 이만한 강자가 있던가?’
있기는 있다. 파이살메르의 여왕. 하지만 그녀 외에 NPC로서 8레벨에 도달한 네임드는 내가 알기로는 없었다.
이곳은 시작의 도시. 스타팅 포인트에 불과했으니.
헌데, 왠지 모르겠지만 눈앞의 여인이 묘하게 눈에 익다.
눈에 익다고 해야 할지 익숙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과거에 꽤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윽고 그녀가 지근거리로 다가와 말했다.
“이름이 뭐냐?”
이름이 뭐냐고?
‘닉네임도 안 짓고 떨어졌지.’
생각해보니 닉네임도 짓기 전이였다. 설마 여기가 닉네임을 짓는 분기점인가?
‘게다가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다.’
메인 퀘스트가 종료되었다는 표시도 없다. 생존. 생존을 위한 과제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뱀공주 때문이리라. 지금 여기에 모인 전부를 합쳐도 뱀공주 하나만 못하다. 나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위협이 내 눈앞에 있으니 생존 퀘스트가 종료될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이 ‘이름’ 역시 중요하다.
“란돌프.”
“··· 위대한 늑대? 사막 출신인가?”
란돌프는 ‘위대한 늑대’의 이름이다. 사막지대 출신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단어를 내가 입에 담자 뱀공주가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뿐이다.
“사막 출신이 왜 중앙대륙의 원정대 떨거지들과 함께 있는 거지?”
노골적인 혐오.
사막의 사람들은 중앙대륙의 인간들을 악마로 묘사한다.
잡혀들어온다면 모조리 노예로 쓰다가 죽일 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흥미가 다하면 죽일 터.
하지만 의문이었다.
‘원정대인 걸 안다. 알면서도 전멸시켰다.’
노예로 쓰기도 전에 이처럼 전멸시키는 경우는 없었다.
심지어 잡아 온 같은 사막 부족 출신도 모조리 죽였다.
‘증거인멸. 원정대가 사막에 도달한 걸 감추려고 하는 거다.’
8용사와 원정대······ 아마도 내가 ‘유일급의 장비’ 여덟 개를 착용하고 일으킨 마계로의 대원정을 뜻하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나는 원정에 실패했다. 모든 준비를 끝냈음에도 마왕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유는 마왕이 너무 강했다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중앙대륙이 두려워서다.’
결론을 냈다.
사막의 여왕은 원정대와 사막이 결부되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
원정의 실패를 논할 때 엮이면 피바람이 불 걸 알고 있어서다. 대륙의 거의 모든 대도시에서 병사를 차출했지만 사막도시 파이살메르는 논외였으니까.
마녀사냥 당하기 제일 좋은 게 바로 이곳이었다.
그러니 아예 0.1g이라도 결부될 수 있는 모든 걸 제거하고 있다.
얼추 상황을 읽은 뒤 입을 열었다.
“중앙대륙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 중앙대륙의 첩자라고? 누가 보낸 거지?”
“나 스스로 갔다.”
“스스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무엇보다 이곳 사막에서 너와 같은 전사를 나는 처음 본다. 피부색도 다르고, 어느 부족의 표식조차 없지 않느냐. 어디서 주워들은 거로 사기를 칠 생각이라면······.”
“별이 내게 말했다.”
뚝!
뱀공주의 전신이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그리곤 기이한 눈망울로 내게 물었다.
“······ 별?”
당황. 놀람. 그리고 간절함.
‘아무래도 맞나보군.’
그녀의 반응으로 말미암아 뱀공주가 왜 익숙한지 확신했다.
뱀공주는 내가 알고 있는 존재가 맞다.
그리고 그녀가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별이 바로 그녀의 ‘빈틈’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확신한 채 나는 ‘연기’를 시작했다.
“성각자(星覺者). 나는 어느 부족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애초에 내 입으로 사막 출신이라 말한 적도 없다만, 왜 착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
성각자. 별을 읽고 별에게 인도하는 자.
그들은 선각자이며 세상에 몇 없는 진정한 떠돌이였다. 별을 따라, 별을 좇아, 별을 위해 움직이고 기도하는 자들.
그리고 뱀공주에게 반드시 필요한 이름이었다.
“뱀공주 이자벨라.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
“내······ 내 풀 네임을 어떻게?”
“성각자는 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별이 말해줬다는 거다.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성각자는 플레이어가 얻을 수 없는 클래스. 오직 선택받은 NPC만 가질 수 있고, 플레이어는 10레벨을 넘어 별을 얻어야 할 때 그들을 필수적으로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도 비슷한 경우였다.
그녀는 이곳 사막을 누구보다도 벗어나고 싶어 했으니까.
여왕의 저주로 묶여있는 건 그녀였다. 사막부족 출신이 아닌 것도 그녀였다. 하지만 벗어나려면 별이, 별의 축복이 필요했다.
이걸 어떻게 다 알고 있느냐고?
‘대체 내가 만든 캐릭터가 왜 뱀공주가 되어있는 거야?’
설마 싶었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최악의 스타팅 포인트.
경험 삼아 해보자며 적당히 만든 캐릭터가 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한계가 명확한 데다 이 사막에선 도저히 더 성장할 길이 없어서 포기했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왕의 저주로 인해 ‘별의 축복’ 없이는 도저히 나아갈 길이 없었다. 하지만 사막에서 성각자를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포기한 것이다.
그 포기한 캐릭터가 지금 뱀공주가 되어 눈앞에 있으니, 어찌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그 순간이었다.
<‘메인퀘스트 1 : 생존’이 완료되었습니다.>
······ 생존했다는 알림.
수십의 병사를 죽이고 히드라곤의 멱도 땄지만 완료되지 않았던 퀘스트가, 마침내 종료를 알려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용을 정산합니다.>
<역대급! 완벽함을 넘어 경이로운 결과입니다.>
<총점 220점. 메인 퀘스트 - ‘명예의 전당’에 업데이트됩니다.>
<초보자의 행운! ‘행운의 성좌’가 미소를 짓습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됩니다.>
<‘전투의 성좌’가 제법이라며 콧잔등을 긁습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됩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획득했습니다.>
<‘히드라곤의 혼’을 획득했습니다.>
<‘미켈라의 칼’을 획득했습니다.>
······.
내용을 확인한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미친.”
그야말로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보상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