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히든 특성 13개!
“쓸모없는 노예 새끼들! 빨리빨리 걷지 못해?”
촤악!
알싸한 고통과 함께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고, 모래사장에 머리를 처박은 뒤에야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게임 인트로를 보다가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자 지금 상황이다.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상황이지만 생각보다 머리가 차갑게 돌았다.
‘내 몸이 아니야.’
두꺼운 손. 헬스트레이너도 울고 갈 울긋불긋한 한 근육.
내 몸이 아니다. 하지만 내 몸인 것처럼 생생하다.
또한, 단단하게 묶여있는 손과 현재 상황으로 판단하건대 나는 끌려가는 중이다.
고개를 들자 수백의 남자들 역시 일렬로 줄에 묶여 끌려가고 있었다.
나를 채찍질한 놈과 현재 상황을 종합해보니 답이 나왔다.
‘전쟁 노예.’
패잔병들이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노예로 잡혀 온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선두를 걷는 대형괴수였다.
‘히드라곤!’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히드라와 드래곤의 하체를 합쳐놓은 저 괴수가 무척이나 낯이 익다.
분명히 처음 보는 괴물인데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겠다.
히드라곤.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든 플레이어가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첫 번째 역경과도 같은 존재!
그래픽 덩어리가 현실화하여 눈앞에 나타났다.
거의 천에 달하는 캐릭터를 키우며 그 숫자만큼 잡아봤으니 익숙할 수밖에 없다지만, 게임 속 괴물을 단번에 확신하는 것도 정상은 아니었다.
‘일어나야 한다.’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대로 계속 주저앉아있으면 죽는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즉시 채찍이 날아들었다.
격한 고통에 털이 쭈뼛 섰지만 억지로 신음을 참았다.
“또 한 번 쓰러지면 그때엔 히드라곤의 먹이로 던져주마.”
··· 히드라곤이 맞나보다.
이제는 모든 게 확실해졌다.
‘판게니아다. 내가 게임 속으로 들어온 건가?’
이해할 수 없는 일.
혼란스러워야 정상이지만 놀랍게도 침착하다.
도리어 순식간에 파악하고 적응해버렸다.
‘촉감을 비롯한 모든 감각이 전부 현실이랑 다를 게 없다. ······그렇다면.’
게임인데 게임이 아니다. 지극히 현실과 같지만 나는 마지막에 주사위를 돌린 걸 기억해냈다.
올 랜덤.
모든 것을 무작위로 돌리지 않았나.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라면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상태창.”
그 순간이었다.
촤르륵. 눈앞으로 돌돌 말린 양피지가 나타나며 천천히 펼쳐졌다.
<능력치>
레벨 : 1
힘 : 12 체력 : 12 민첩 : 12
지능 : 12 마력 : 12
<재능>
【건강】【체질】【지능】【감각】
【검술】【방패술】【창술】【도끼술】【단검술】【궁술】
【빛】【어둠】【불】【물】【땅】【바람】【공기】
【허】
【예술】【학문】【지도력】【관찰력】
······.
<활성화된 히든 특성>
【허무】
【손재주】
【올 마스터】
【웨폰 마스터】
【거인의 항마력】
【드루이드의 자연친화력】
【철혈군주의 심장】
【비스트 로드】
【황금의 은총】
【천상(天上)】
【돌연변이】
【대식가】
【대현자】
······.
<판게니아 붕괴까지 : 6.12%>
<<붕괴가 진행될수록 현실과 판게니아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붕괴의 정도가 10%를 넘기면 최초의 균열이 진행됩니다.>>
‘미친.’
보자마자 욕지기가 튀어나오려는 걸 애써 억눌렀다.
정말 상태창이 나오긴 했는데 나타난 것들이 말이 안 됐다.
우선 능력치.
본래 능력치는 재능에 따라 1에서 10의 범위 내로 정해진다. 그런데 그걸 넘어 12다. 그것도 전부 균일하게 12로 시작하고 있다.
5년 동안 판게니아를 하면서 처음 보는 황금빛 스타트였다.
뿐만인가.
‘재능이 몇 개가 찍힌 거야 대체?’
양피지가 끝도 없이 내려간다. 200가지가 넘는 재능이 찍힌 것으로도 모자라 10개가 넘는 히든 특성이 활성화됐다.
하나만 가져도 역발산 기개세(力拔山 氣蓋世)의 최강자가 될 수 있는 게 바로 히든 특성이었다. 그걸 정확히 13개 갖고 있다.
‘히든 특성 13개라니.’
별을 먹고 초월을 이룬 네임드 NPC나 심연속 세계관 최강자 급의 괴물들도 히든 특성 13개를 갖고 있진 않다. 많아야 다섯 개 정도지.
전무후무.
그중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철혈군주의 심장!’
모든 육체적 재능을 전부 찍으면 나타나는 연동특성이자 히든 특성, 철혈군주의 심장.
대충 ‘쉽게 지치지 않고, 웬만한 일에 놀라지 않으며,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이도록’하는 기능이 있다.
또한, 능력치 창에 보이지 않는 ‘스테미너’와 ‘명예’를 높여주고, 더 질 좋은 퀘스트를 받게 해주며 ‘군주의 자격’을 부여하는 특성이다.
그런 것들이 무려 13개.
히든 특성을 전부 눈에 담고 다음 내용을 살펴보았다.
‘판게니아 붕괴. 현실과의 경계? 저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정상적인 범주의 이해를 아득히 뛰어넘는 일들이 내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허나 언제까지고 사색에 잠겨있을 순 없는 노릇.
“이봐.”
나는 앞서가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오른쪽 중지와 검지가 잘린 남자가 힘없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왜?”
“여기가 어디지?”
“······ ? 칼츠만 사막이잖아.”
더위 먹고 쓰러지더니 정신도 같이 놔버렸냐는 듯한 눈빛을 외면하며 재차 물었다.
“칼츠만 사막? 설마 파이살메르로 가고 있는 건 아니겠지?”
대륙 동남부에 위치한 칼츠만 사막은 크게 세 부족이 자리잡은 악명높은 땅이다.
세 부족 모두 노예사냥을 업으로 삼으며 전쟁을 일삼는 미치광이들인 탓이다.
그리고 파이살메르는 잡아들인 노예를 파는 중간도시 같은 곳이었다.
“맞아. 그러니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리라고.”
노예들의 눈에 빛이 없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파이살메르에 잡혀들어간 노예는 절대로 살아나가지 못한다.
‘스타팅포인트로 절대로 지정하면 안 되는 곳. 칼츠만 사막에 떨궈지면 그냥 캐릭터 삭제하고 다시 키우는 게 낫다.’
원래부터 악명높은 사막이다.
딱 한 번 호기심에 이곳에서 시작해봤다가 포기한 기억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단연코 나는 칼츠만 사막을 시작장소로 선택한 적이 없다.
‘망할.’
스타팅 포인트까지 무작위로 정해버린 내 실책이다. 누굴 탓하겠나.
나는 마지막 의문 보따리를 풀어놨다.
“그런데 칼츠만의 부족들이 원래 이렇게 대량으로 노예를 취급했나?”
아무리 큰 노예상인이라도 많아야 수십의 노예를 취급하기 마련인데 지금 이 행렬은 족히 300은 넘어 보였다.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우리가 왜 끌려가고 있는 거지?”
“우리가 잡혀가는 이유? 글쎄, 원정대 낙오자들이라?”
“원정대? 무슨 원정대?”
“하아··· 8용사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마계 원정대. 패배하고 너나 나나 도망치다가 잡힌 거잖아. 더위라도 먹은 거냐?”
8용사? 마계 원정대?
‘아!’
······ 내 얘기였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이 캐릭터를 만들기 직전에 플레이했던 캐릭터의 이야기다.
가장 강한 여덟 개의 캐릭터에서 여덟 개의 유일급 아이템을 모아 원정대를 꾸렸다.
그리고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마계에 들어가 마신전 근처까지는 갔지만 결국 마지막 문을 열지 못한 채 게임오버 당한 것이다.
그게 8용사와 원정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모양.
“씨발. 내분만 아니었어도 원정은 성공했을 텐데······!”
내분?
무슨 내분?
물어보려 했으나 그 순간 땅이 흔들렸다.
동시에.
《메인 퀘스트 1 : 생존하십시오!》
《보상 : 내용에 따라 차등 지급》
《실패시 : 사망 - 게임과 현실 양쪽의 육체가 모두 사망합니다.》
눈앞에 퀘스트가 나타났다.
생존하라니. 이 상황에서?
더욱 기겁할 건 실패할 때의 페널티였다. 설마 현실의 육체라는 게 진짜 내 몸을 말하는 건가?
문득 인트로가 떠올랐다. 판게니아와 지구가 충돌하는 모습이.
쿠르릉! 쿠르릉!
허나 더 길게 고민할 틈은 없었다.
거친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거대한 동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히드라곤 세 마리!”
“전열을 다듬어라! 습격에 대비해!”
노예상인이자 숙련된 병사인 그들은 품에서 무기를 꺼내며 숨죽였다.
히드라곤을 무려 세 마리나 이끌고 쳐들어온 적들이 문답무용으로 그런 노예상인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뱀공주! 뱀공주다!”
“뱀공주! 불가침 협약을 잊은 건가!”
“아악!”
비명이 난무한다.
협약이나 규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살육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저들은 노예를 죽이는 데에도 거침이 없었다.
이 자리를 전부 쓸어버리는 게 목적인 듯 보였다.
나는 바로 앞에 죽어있는, 내게 채찍질을 했던 노예상인의 품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냈다.
이후 수갑을 풀자마자 시미터를 들고 습격에 대비했다.
“나, 나도!”
“나도 풀어줘!”
전 원정대의 병사들이 열쇠꾸러미를 보곤 소리쳤다.
그래도 명색이 마계원정에 나선 병사들이다.
함께 맞서 싸워줄 거란 기대를 할 수도 있겠지만 모두 어디 한구석이 고장 난 불구였다.
【Lv. 1】
【Lv. 2】
그 증거로 모든 병사의 레벨도 1에서 2 사이다.
육체적 손실과 정신적 결함으로 인해 레벨다운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레벨이 너무 낮다. 원정대가 민병대보다도 못한 수준이라니?
툭!
“나, 나부터야!”
“악! 비켜!”
열쇠꾸러미를 던져주자 몸싸움이 일어났다.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한 명, 한 명 풀어줄 여유 따윈 없었다.
그 사이에도 살육은 진행 중이었다.
아비규환. 지옥이 있다면 이럴까.
‘살아남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