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 내 사람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123/123)


#123. 내 사람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2023.09.01.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고맙긴요.”

“재인 씨가 있어 준 덕에 지난 며칠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힘들지 않았다고 말하는 남자의 얼굴이 꺼칠했다.

재인은 강신재의 죽음이 안타깝고 슬펐지만, 동시에 끝까지 무책임한 그의 선택에 화가 났다. 후회하며 용서를 빌어야 할 가해자가 죽음을 선택했다는 게 허무했다.

오죽 힘들면 자살을 택했을까 싶지만, 결국은 자기가 편해지기 위해서였다. 그의 선택에 태서를 향한 배려는 역시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용서를 구하는 손 한번 내밀지 않고 죽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 탓에 오랜 학대의 피해자인 태서는 가해자인 강신재가 벌여 놓은 일들을 모두 떠안게 되었다. 제대로 표출해 본 적도 없는 원망과 분노는 갈 곳을 잃었고 가슴에 커다란 멍이 남았다.


“이럴 때 태서 씨 곁에 있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걸요.”

“재인.”

가만히 속삭인 태서가 잠시 말을 고르다 눈을 감았다. 슬쩍 지은 미소가 오히려 더 아파 보여 재인이 아랫입술을 깨물었을 때였다.


“내일, 장례가 끝나면.”

“응.”

“먼저 미국에 가 있어 줘요. 재인 씨가 지낼 곳은 내가 테드를 통해 다 부탁해 놨으니까.”

“……태서 씨.”

“정리하는 대로 갈게요. 재인 씨 곁으로.”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할 강선 그룹의 총수, 강신재 회장이 갑자기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는 기사가 나자 세상은 강태서를 주목했다.

그에게 배다른 형제가 몇 있다지만, 법적으로 강신재의 혈육이라 인정받은 것은 강태서뿐이었으니 더 그랬다.

이제 갓 서른이 넘은 그가 강선 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을 어떻게 이끌어 갈지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피어나기도 이전에, 승계 절차를 밟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생전에 강신재는 회사 일이나 재산의 분배에 있어서 강태서를 철저하게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기업의 안정화를 우선으로 내세운 임원들이 전문 경영인을 내세울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고, 그사이 강태서와 그의 배다른 형제들 간에 피바람이 불 것을 예상하기도 했다.

당장 장례식이 끝나는 내일 오후부터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불안정한 틈을 타 온갖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개인 생활은 전혀 드러내지 않고 기업 경영에만 매달렸던 강신재가 사실은 알코올 중독이었다는 소문에 이어 그가 지병으로 인해 죽은 것이 아닌, 자살했다는 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고인에 대한 모독이었기에, 그리고 다 가진 그가 자살할 리가 없다는 대중의 판단으로 인해 그 소문은 금방 잦아들었다.

하지만 한때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던 태서의 연인에 관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기사 때문이라면……. 나는 괜찮아요.”

재인 역시 일간지나 가십지에서 저에 대해 다룬 기사를 보아 알고 있었다.

친모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 배우 A씨라더라. 아버지가 최근에 망한 건설사 대표라더라.

학생 시절부터 그렇게나 이 남자 저 남자를 홀리고 다녔다더라. 발리의 한 리조트에서 요가 강사로 일했는데, 거기서도 남자 문제로 잘렸다더라. 이복 여동생의 약혼자를 빼앗았다더라.

어디서 소스를 구했는지, 재인의 출생부터 현재까지 퍽 그럴듯하게 써 내려간 소설 속에는 드문드문 거짓말 같은 진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기사 밑에는 온갖 지저분한 댓글이 달렸다.

사진 봤는데 그럴 만하네. 얼굴에 색기가 흐르더라. 몸매가 국산이 아니던데. 남자 후리게 생겼다. 일반인은 무슨, 저런 게 꽃뱀 아니면 뭐가 꽃뱀이냐.

애도 기간인데다 말도 안 되는 기사에 일일이 대응하는 게 우스워 그냥 두었지만, 강선 그룹의 젊은 황태자 곁을 지키고 있는 아름다운 외모의 여인에 대한 말들이 짧은 시간 안에 급격하게 몸집을 키워 갔다.

그러다 장례식장을 몰래 찍은 흐릿한 사진 속에서 상복을 입은 태서와 마찬가지로 상복을 입은 재인이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끼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다.

어렵사리 해당 반지의 디자인을 알아낸 사람들은 반지 브랜드를 밝히고, 주문 제작된 것이 틀림없는 반지의 가격을 유추해 냈다.

태서가 재인을 위해 그녀 몰래 고르고 고른 반지가 재인의 허영심을 판단하는 잣대가 된 것이다.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 대중의 관심 앞에 애꿎은 재인이 흥밋거리로 전락해 버렸다.


“내 곁에 있다는 이유로 당신이 비난받을 이유 없습니다.”

“하지만…….”

장례가 끝나는 대로 태서는 관련 기사를 써 내려간 언론사와 말을 퍼뜨린 이들을 대상으로 자비 없는 소송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쉽게 사그라들 관심이 아니니, 먼저 재인을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먼저라 여긴 듯했다.


“최대한 빨리 정리를 끝낼 겁니다. 내 사람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

“윤재인이 내 목표가 되는 것을 허락해 줘요.”

재인은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해 지쳐 있는 태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감내해야 할 수많은 상황과 업무,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될 날 선 사람들까지. 내일부터 그가 얼마나 바빠질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누가 대신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재인은 함부로 그의 제안을 말도 안 된다고 무시할 수 없었다. 제가 그의 곁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는 다른 말 없이 그녀의 결정을 존중해 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게 맞을까. 제 선택이 혹여 그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떨어져 있는 것이 불안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혼자 남을 그였다. 아무리 장 실장이 함께 있고, 당분간은 앰버가 한국에 있을 거라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재인이 물기 어린 눈에 태서를 담았다.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져 준 그녀의 턱이 잘게 흔들렸다.


“그렇게 해요. 그렇게 할게요.”

“……응.”

“그런데……. 고양이도 앰버가 데려갔는데, 이제 그러면 그 집엔 태서 씨뿐이잖아.”

“윤재인이 놓고 간 베개 안고 버틸 겁니다.”

“……밤마다 나 보고 싶다고 울려고?”

“아마도. 높은 확률로.”

“그래 놓고 먼저 가래. 발 안 떨어지게.”

“매일 전화할 테니 받아 줘요.”

“태서 씨가 안 하면 내가 할 거야.”

미소를 머금고 속삭이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모두 젖어 있었다.


 

* * *

한국을 떠나 맞이한 봄은 빠르게 지났다. 그에 반해 여름은 끔찍하게도 길었다. 여름에 접어들면서 재인은 불면증으로 힘든 날들을 보냈고, 잠들 수 없는 모든 밤은 강태서를 향한 그리움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가을마저 지나 버리고, 또다시 칼바람이 부는 시카고의 시린 겨울이 왔다. 어느새 거리엔 이른 크리스마스 장식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기 오길 잘했어. 너 말이야.”

“응?”

“한국 뉴스 안 보지?”

“응.”

“잘했어. 앞으로도 보지 마.”

근처 식당에서 포장해 온 저녁 메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재인이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커다란 머그 가득 따뜻한 물을 따라 테이블에 내려놓는 그녀의 어깨가 조금은 더 말라 있었다.

어제 시카고에 도착한 상화는 바로 재인의 집으로 왔다.

테드와 싸웠다고, 테드 욕을 잔뜩 하던 그녀는 시차에 적응해야 한다며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깨어나서 저녁을 준비하는 재인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왜냐고 안 물어?”

“물어보면 답해 줄 거야?”

“……아니.”

재인은 아직도 한국에서 저에 관한 말이 오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룹 차원이 아닌, 강태서 개인적으로 소송을 불사하겠다고 나서자 대다수의 기사는 내려갔고 한동안 대중 역시 잠잠했다.

하지만 어디든 불씨는 살아 있는 법이었다. 이니셜로, 강선 그룹의 신데렐라로 비밀리에 떠도는 윤재인에 관한 이야기는 여전히 자극적이고 흥미로웠다.

그래서 재인은 상화가 또 저에 대한 말이 도는 것을 접하고 화가 난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그, 조대훈 말이야.”

분주하게 포장을 뜯던 재인이 멈칫했다. 저에 대한 소문이 아니라, 조대훈에 관한 이야기였나 보다.

상화는 재인에게 조금이라도 나쁜 거라면 못 보게 막아섰지만, 그러면서도 어떤 부분은 재인에게 넌지시 알려 주기도 했다.


“조대훈이…….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온 힘을 다해 대응하겠다고 했대.”

“…….”

“조유리 외에는 다른 자식이 없다고, 부부간 계속된 폭로전으로 인해 남들이 보기에는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가정으로 보이겠지만, 더는 명예를 더럽히는 것을 두고 보지만은 않겠다고 그랬대.”

눈을 깜빡이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재인이 피식 웃었다.

조대훈이 마지막 양심을 짜내어 저를 위한 배려랍시고 그랬을지, 아니면 정말 저를 자식이라고 여기지 않아 그랬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랬구나.”

“응. 그리고 웃긴 게, 그렇게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해 놓고 이혼은 안 한다더라. 재산 때문이겠지. 서로 물린 게 많아서.”

“음…….”

“각각 7년, 3년이라던데. 실제로는 그거보단 적게 살다 나오겠지, 뭐. 온갖 비리 저지르는 사이 관련자가 몇이나 죽었던데, 7년이랑 3년이 다 뭐야. 하여간, 법이 너무 물러.”

오래 끌어온 재판은 며칠 전에 결론이 났다. 법원은 조대훈에게 징역 7년을, 지승희에게는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지승희 측에서는 즉각 항소하겠다고 밝혔고, 조대훈 측 변호인은 항소하지 않겠다고 했다.

의외였다. 징역 7년이라는 결과를 덤덤하게 받아들인 조대훈이. 하지만 그의 마음을 헤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재인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도 네가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너, 조금이라도 마음 쓰지 마.”

“안 그래.”

“그래, 그럴 가치도 없는 인간들이야. 내가 그 인간들이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들었어. 쫓아가서 멱살 잡고 싶더라. 지승희 날계란 맞을 때 박수 친 게 나야.”

밉지 않은 오지랖에 재인이 웃으며 고개 저었을 때였다. 내내 잠잠하던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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