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 가려져 있던 진실 (122/123)


#122. 가려져 있던 진실
2023.08.29.



“응, 걱정하지 마. 이따가 전화할게.”

상화와의 통화를 마치고 들어서던 재인의 시선이 한 곳에 박혔다. 태서가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면도하지 않아 까칠하게 자란 수염, 푸석해 보이는 눈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제멋대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의 피곤함을 말해 주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조문객의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선 재인은 가만히 태서의 곁에 섰다. 그러자 조문객 중 몇몇이 그녀를 흘끔거렸다.

하지만 대놓고 재인이 누구인지, 무슨 자격으로 태서의 곁에 서 있는지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강선 그룹 강신재 총수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전국이 충격에 휩싸였다.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바로 현재 강선 그룹의 국내 위상이었다.

그랬기에 강건하던 총수의 부재는 주가를 곤두박질치게 했고, 나라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 관장님. 아무래도 발표를 조금 늦추는 것이…….”


“조금 늦춘다고 달라질 게 없는데, 뭣 하러.”


“하지만 회사가…….”


“회사 일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던 강 회장이네. 자기 죽고 나면 이렇게 될 거 생각 안 했겠나. 그냥 각자 할 일을 하시게.”

 
조금이라도 사망 발표를 늦추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아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임홍진 관장은 그럴 필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경영권 승계든 뭐든, 조금이라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얘기는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황에서 늦추는 것은 하등 도움 될 것 없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언론에서는 연일 강신재의 유일한 자식으로 알려진 강태서에 관한 기사를 써 내려갔다. 그동안 그룹 차원에서 막아 온 탓에 태서에 관해 알려진 것은 생각보다 적었다.

그나마 최근에 <디에이지> 경제지와 인터뷰한 탓에 주목받기 시작한 그였다. 그런데 강신재 회장의 죽음으로 인해 태서가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일부 기사에서는 태서가 얼마나 유능한 인재인지를 찬양했고,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인 그를 재조명했다.

또 한편에서는 부자가 함께 목격된 적 없다는 것과 그가 오래도록 해외에서 생활해 온 것을 근거로 부자간에 소원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출생부터 지금까지, 태서의 인생을 연표로 만들어 온갖 살을 붙여 마음대로 떠들어 대는 언론, 강선 그룹의 앞날을 우려하는 목소리, 지분 승계 관련 눈치 싸움을 시작한 몇몇과 그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사람들…….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 강태서가 있었다.


“나는 괜찮습니다.”

태서는 제게 말도 못 붙이고 조심스레 소매를 잡아 올려다보는 재인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시선은 저 멀리, 장례식장 입구에 둔 채였다. 뻑뻑한지 잠시 눈을 감았다 뜬 태서의 눈이 빨갰다.

재인은 가만히 태서의 너른 어깨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가 어깨에 지고 있을 무게를 가늠해 보는 그녀의 눈과 코가 빨갰다.


 
자살이었다. 유서 한 장 나오지 않았지만, 연류동 사람들 그 누구도 강신재의 자살 여부를 놓고 의문을 품지 않았다.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기 전, 극도로 불안정했던 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게야.”


“…….”


“내 탓이다. 어떻게든 모르게 했어야 했는데.”

 
병실에 누운 채 눈물짓던 임 관장은 태서에게 힘겹게 끔찍한 진실을 밝혔다.

태서가 연류동에서 나간 뒤, 강신재는 제가 저지른 일을, 제 선택으로 말미암아 벌어진 비극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며 힘들어했다.

타인에게만 겨누었던 화살을 스스로에게 겨누는 행위는 가뜩이나 위태롭던 그의 상태를 악화시켰다.

방에 틀어박혀 술에만 의지하는 그를, 임홍진 관장은 어떻게든 끌어내려 했다. 구슬리고 달래다 결국엔 화를 냈지만, 그 역시 아들 아끼는 어미로서의 쓴소리였을 뿐이다.


“자네가 이러고 있으면 자네 믿고 일하는 사람들은 다 어쩌자는 게야!”


“관장님께서 예뻐하시는 본부장 불러다 제 자리에 앉히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못난 사람 같으니. 도대체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려고 이러나!”

 
아무런 소득 없이 별채로 돌아오는 길, 답답했던 임홍진 관장은 잠시 안뜰의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거기서 오래도록 그녀의 곁을 지킨 주치의와 얘기를 나누었다.


“저렇게 힘들어하시는데 지금이라도 사실을 밝히시는 게…….”


“무슨 사실 말인가?”


“……관장님. 회장님도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연희 씨가…….”


“입 다무시게.”


“…….”


“그날 이후로 남을 원망하는 힘으로 살아온 아범이야. 내 자식 망가진 꼴로도 모자라 기어코 무너지는 꼴을 보란 말인가. 안 될 말일세.”


“하지만, 관장님…….”


“그 이름 꺼내는 일은 다신 없어야 할 걸세. 박 이사장, 자네도 이제 쉬고 싶은가?”

 
강선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박사흠 이사장은 산부인과 전문의로 국내 최고 권위의 난임 치료 전문가였다.

강신재 회장을 낳기 전부터 자궁에 문제가 있었던 임홍진 관장과는 오래도록 인연을 쌓은 친구나 다름없었다.

강신재는 물론이고 강태서가 태어날 때 받아 낸 것도 박사흠 이사장이었다.

아이를 갖고 싶다며 치료받게 해 달라고 조르던 서연희에게 강신재가 소개해 준 것도 박사흠 이사장이었다. 그렇다 보니 임홍진 관장이 평생 숨겨 온 일을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저도 쉴 때가 되었지요.”


“쉬더라도 내 아들 건드리지는 말아.”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 일을 비밀로 한 것이 잘한 것인지를요.”


“……벌 받더라도 내가 받을 일이지.”

 
박사흠 이사장을 두고 홀로 별채로 들어선 임홍진 관장은 몰랐다.

술기운이 가신 강신재가 제게 따져 물을 생각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 안뜰에 있었던 것을. 그리고 의심스러운 대화를 듣고 박사흠 이사장을 서재로 불렀음을.

다음 날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강신재 회장의 죽음이 알려졌다. 잠든 줄 알았던 그를 깨우러 들어갔던 비서가 침대 위에서 싸늘하게 식은 강신재 회장을 마주하고 사색이 되어 뛰쳐나온 것이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강 회장! 신재야, 신재야!”


“제가……. 제가 모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30여 년 전, 서연희 씨가 저를 찾아왔던 것, 그리고 관장님께 무슨 말을 했었는지를.”


“박 이사장 자네……, 자네!”

 
거기까지 들은 임홍진 관장 역시 쓰러졌다.

흐느끼며 병원으로 실려 가던 임홍진 관장은 끝내 세상을 저버린 아들의 이름을 닳도록 불렀다. 세상에 미련이라고는 없을 테니 헤매지 않고 안식을 찾기를 바라는 어미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공항에서 강신재 회장의 사망 소식을 들은 태서가 한걸음에 병원으로 왔을 때, 태서의 손을 잡고 힘겹게 옛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태서야. 나는 너도 딱하지만, 아범도 딱했다.”


“…….”


“이해해 달라고 하지 않으마. 그저……. 네 아비 저리된 것, 태서 너라도 마음에 담아 두지 말거라. 네 잘못은 없다.”

 
조모가 꺼낸 이야기는 기가 막혔다. 강신재 회장이 평생에 하나뿐이라 여겼던 그 사랑이 사실은 거짓이었다는, 우습지도 않은 코미디였다.

서연희는 강신재를 사랑했다. 잘난 외모, 몸에 밴 매너까지 그녀가 겪어 본 적 없던 남자였다.

하지만 서연희는 그 모든 것들보다도 강신재가 가진 부와 배경을 더 사랑했다. 강신재의 여자에 머무르지 않고 강선 그룹의 안주인이 되어 그의 곁에서 당당하게 빛나고 싶었다.


“신재 씨를 떠나겠습니다. 다만 제가 숨어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도움을 주셨으면 해요.”

 
큰돈을 요구하는 서연희에게 들어줄 수 없음을 밝히자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더니 훌쩍 사라져서 아들을 흔들어 놓고 그가 폐인이 되기 직전에 다시 나타났다.

서연희는 제게 푹 빠진 강신재를 쥐고 임홍진 관장에게 거래를 제안해 올 만큼 야망이 큰 여자였다.


“보셨죠? 신재 씨는 어떻게든 저를 찾아낸다니까요? 그러니까.”


“……서연희 씨.”


“지난번의 두 배를 약속해 주세요. 그러면 해외로 나가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아들의 순정을 볼모로 협상을 걸어오는 여자를 믿을 수 없었던 임홍진 관장은 그 제안도 거절했다. 그러자 서연희는 강신재를 제 곁에 두고 나날이 패악을 부려 댔다.


“……그 사람 아이 맞아요?”


“그게 무슨…….”


“아니, 나만 불임이라는 법도 없잖아. 신재 씨가 불임일 수도 있는 거니까.”


“이것 보세요, 서연희 씨!”


“관장님께서도 친자 확인해 보시는 게 좋으실 거예요. 신재 씨가 나를 두고 다른 여자를 몇 번이나 안았을 리는 없고. 나 없었을 때 실수한 모양인데, 좋아요.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걸 그 사람이 안다면 오히려 내게 더 미안해할 테니까. 나쁠 것 없어요.”


“……서연희 씨. 말을 가려서 하시죠.”


“그 아이 낳는다고 해서 강신재가 당신을 쳐다볼 것 같아? 그 사람한테는 나밖에 없어! 내가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할 사람이라고! 그 아이 낳기만 해 봐. 관장님, 당신 아들 죽는 꼴 보고 싶으세요?”

 
서연희는 아이에게 집착했다. 어떻든 강신재의 아이를 낳아 제 입지를 강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강신재를 졸라 불임 치료하러 병원에 왔던 서연희는 막달의 유정하와 그 곁의 임홍진 관장을 발견하고 악담을 퍼부어 대기도 했다.

그녀는 강신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연약하고 착하기만 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를 이용하여 부와 권력을 탐내던 여자는 흥신소를 찾기도 했다.

만삭의 유정하를 차로 치어 달라고, 배 속의 아이는 반드시 죽어야 하고 산모는 같이 죽어도 상관없다며 적지 않은 돈을 건넨 것이다.

임홍진 관장은 늦지 않게 그 사실을 알고 정리하고는 출장 가 있는 아들에게 조심스럽게 서연희와 거리를 둘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착한 여자를 가난하다는 이유로 품어 주지 못하는 어미를 향하는 아들의 비난뿐이었다.

얼마 후 태서가 태어나던 날, 질투심에 사로잡힌 서연희는 차에 치어 죽고 말았다. 그렇게 서연희는 강신재에게 평생 못 잊을, 가련한 사람으로 남았다.

네가 사랑하는 그 여자가 너를 이용하고 있다. 네가 귀히 여기는 그 여자가 사실은 너의 고통을 즐겁게 여기고 있다.

임홍진 관장이 늦게라도 강신재에게 이 말을 하지 못했던 건 사랑을 잃고 바닥을 기어 다니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들에게 비수를 꽂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서였다.

그렇게 감추고 숨겨 왔는데, 뒤늦게 제 생에 따뜻했던 날들이, 행복했던 기억이 모두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진실을 마주한 강신재의 선택은 모든 것을 놓아 버리는 것이었다. 그가 죽기 전에 태서에 대해 생각했을지,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을 가졌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태서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강신재의 아들로서, 상주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담담한 듯 보였지만 조금도 슬프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정이랄 게 쌓일 수 없던 관계였던 만큼 친밀한 관계가 끊어진 것에서 오는 슬픔은 아니었다.

씁쓸하면서도 슬프고, 아프면서도 착잡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 감정을 태서는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섣부르게 정의 내리려 하지도 않았고, 깊이를 재어 살피려 하지도 않았다. 그냥 태서는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제 소맷부리를 잡은 재인의 손에 커다란 손을 겹친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아요.”

“…….”

“다만,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요?”

“꼭 들어줘요.”

슬픔에 젖은 눈동자에 들어찬 것은 오직 윤재인,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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