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그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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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그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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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그날 밤
2023.08.25.
“언제든 놀러 와. 짐 푸는 대로 주소 보낼게.”
“미국이 뭐 옆집이야? 언제든 놀러 가게?”
“그래도…….”
“알아. 나도 틈만 나면 갈 생각이야.”
공항에서 재인을 품에 안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던 상화가 눈물을 닦아 내며 입을 삐죽였다. 그러다 재인의 뒤에 선 태서를 향해 눈 흘겼다.
“우리 재인이, 친정 없는 거 아니에요. 내가 재인이 극성맞은 친정 엄마고 성질 더러운 친정 오빠고 뭐고 다 할 거야.”
“음…….”
“그러니까 우리 재인이 편들어 줄 사람 없다고 여기고 서럽게 하기만 해 봐요.”
“그러기엔 나 역시 같이 편먹고 싶은 부모가 없어서.”
“……그러네.”
상화가 문득 제 말실수를 깨닫고 미안함에 눈을 내리깔았지만, 태서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더는 떨어져 있는 것을 못 견디겠다는 듯이 태서가 재인의 허리를 감아 제 가까이 당겼다. 울어 발긋해진 눈가를 살살 매만져 다독이는 손길에 퍽 조심스러웠다.
“내가 윤재인 괴롭힐 거란 생각은 그만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괴롭히지 않는 건 아니지만.”
거기까지 말한 태서의 눈이 사르륵, 휘었다. 뭘 어떻게 괴롭혔다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그 눈웃음은 보는 이의 얼굴이 절로 달아오를 만큼 요사스러웠다.
하지만 훌쩍거리느라 태서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재인은 뺨에 손등을 가져다 대고는 몸을 숙였다. 재인을 제외한 앰버, 테드, 상화와 장 실장만이 벌게진 얼굴로 헛기침을 내뱉을 뿐이었다.
“태서 씨, 나, 세수 좀 하고 올게요.”
“응, 그래요.”
남들이 보든 말든 제 연인의 정수리에 입술을 내린 태서가 아쉽다는 듯 재인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근처의 화장실에 들어가는 재인의 뒷모습을 끝까지 확인하고서야 뒤돌았다. 재인과 동행하는 여자 가드가 셋이나 있음을 알면서도 주변을 경계하는 눈빛은 매서웠다.
서로 물어뜯기 바쁜 조대훈이나 지승희도, 지방 병원의 격리 병동에 입원한 조유리도, 만신창이가 된 채 요양원에서 숨만 이어 가고 있는 정재훈에 대해서도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태서는 마지막까지 빈틈을 내보이지 않았다.
강신재 회장이 조용한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날, 태서가 그렇게 연류동 본가를 나선 이후로 연류동 쪽에서는 이렇다 할 연락이 없었다.
태서는 굳이 강신재 회장에 대해 조모에게 묻지 않았고, 조모 역시 별다르게 연락해 온 일은 없었다.
그쪽 상황을 묻기보다는 보호를 강화하고 대비하는 것이 태서다웠다.
위험 요소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저와 재인 주변에 이중으로 두었던 가드를 거두기는커녕 인원을 늘려 보강했고, 회장의 주변에 심어 두었던 사람들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국에 있는 E&K의 각 지역 사무실마다 업무 진행 및 계약과 관련되어 빠짐없이 보고를 올리라고 지시한 것 또한 그였다.
매일 아침과 저녁, 각 지사장과 온라인 미팅을 시작한 것 역시 혹시 모를 강신재 회장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강신재 회장은 뒤에서 움직이기보다는 모든 것을 알아본 후 약한 곳을 정면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태서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바빴다. 제 사람, 제 회사, 제 영역, 제 손으로 일군 그 무엇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쁜 쪽 괴롭힘은 아니고.”
어느새 상화를 향해 산뜻한 표정을 지은 태서가 싱긋 웃었다.
“말했잖아요. 나도 윤재인 편이 되려는 거라고. 끼워 달라고.”
“……그랬죠.”
“이제는 윤재인 없으면 내가 못 삽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이거 원, 친구 없는 사람 서러워 살겠나.”
“강태서 씨한테 친구가 왜 없어요? 앰버도 있고, 테드도 있고.”
“친구는 무슨. 그리고 앰버나 테드가 내 편을 들어 줄 것 같습니까? 다들 윤재인만 예쁘다 예쁘다 하지.”
다들 윤재인만 예뻐해서 서운하다는 말투가 아니었다. 저만 윤재인을 예쁘다 예쁘다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심통 난 사람의 말투였다.
“……하긴.”
“쌍화, 나랑 태서는 친구 아니야. 우린 완전 비즈니스 관계. 내가 만약 태서 돈 조금이라도 들고 튀면 태서는 바로 경찰에 신고할걸? 나한테 사정이 있어서 그렇겠구나, 그런 생각은 요만큼도 안 할 거야! 날 붙잡으면 당장 돈 내놓으라고 할걸?”
앰버의 말에 태서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 끄덕이며 덧붙였다.
“이자까지 더해서.”
“저것 보라니까? 테드도 봐. 태서한테 꽉 잡혀 사는데 친구는 무슨. 쟤들도 비즈니스 관계야. 돈 주고 일 시키는 사람, 돈 받고 일하는 사람.”
대충이나마 말을 알아들은 테드 역시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은 저렇게 해도 테드나 앰버가 태서를 많이 믿고 따른다는 것은 누구나 알았다. 태서 역시 인정머리 없이 굴기는 해도, 앰버와 테드만큼은 제 곁에 두고 챙긴다는 것을 누구나 알았다.
넌 정말 재수가 없다. 천사 같은 재인이 왜 너랑 만나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가 네 반지를 받아 준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앰버가 태서의 속을 긁으려 덤벼들었지만 태서는 귀찮다는 듯 한쪽 눈썹만 일그러뜨리고 있을 뿐, 앰버의 말도 제대로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상화가 눈에 어린 눈물을 닦으며 미소 짓고 있을 때, 재인이 돌아왔다.
“우리 재인이, 이제 정말 가야겠네?”
“응…….”
“이렇게 한국 왔다가 가서 어떡해? 너한테 한국에 관한 좋은 기억이라고는 없다는 게……. 내가 다 속상해.”
“아냐. 한국에서 온 너를 만났고, 여기서 태서 씨도 알게 됐는걸. 살면서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은 모두 한국과 인연이 있어. 엄마도 그렇고. 그러니 내게 한국은 좋은 나라가 맞아.”
상화가 기특하다는 얼굴로 재인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사람처럼 그 손길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멀리서 태서가 그 모습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성큼 다가섰다.
“야, 강태서 씨 질투 진짜 장난 아니다.”
“응?”
“아니, 아냐.”
상화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 내젓고는 강태서 보란 듯 재인의 엉덩이를 한 번 더 토닥였다. 그러자 태서가 팔을 뻗어 재인을 제 품에 안았다.
“이제 들어가야죠.”
“응.”
어느덧 시간이 다 되었다. 공항에서의 인사도 마지막이었다. 오늘 비행기로 한국을 떠나는 사람은 세 명이었다. 바로 칸쿤으로 향하는 태서와 재인, 그리고 홀로 시카고로 향하는 테드.
태서의 사직서가 수리되는 대로 장 실장 역시 강선 그룹과의 인연을 정리하기로 했다. 태서를 따라 미국으로 가서 그의 사람이 되어 그의 일을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태서의 사표가 수리되지 않았기에 장 실장은 바빴다. 거기다 사직서를 내더라도 후임자 인수인계 관련하여 해야 할 일이 많았으므로 미국으로 건너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앰버는 현양 건설의 임시 CEO로서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좀 더 남아 있었다.
해서 당분간은 애인과 함께 한국에 더 머물며 밤마다 제게 폭탄을 던져 준 태서를 안주 삼아 맥주를 들이켤 예정이었다. 다만 태서의 집에서 데리고 온 고양이가 제 곁에 있다는 것이 그녀의 희망이었다.
“아무튼, 미국에 놀러 와. 알겠지?”
“그래. 너무 자주 온다고 뭐라고 하지나 마.”
“무슨, 내가 왜.”
“상화 씨, 미국에 진짜 자주 올 텐데?”
“응……?”
내가 왜 뭐라고 하느냐며 웃던 재인은 제 곁에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태서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 오더라도 우리 집에 길게 머물 일은 없으니 상관없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상화 시카고에 아는 사람 없어요. 시카고에 오면 당연히…….”
“아는 사람이 없기는. 서상화 씨 시카고에 오면 당연히 머물며 지낼 집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눈을 동그랗게 뜬 재인을 내려다보던 태서가 짓궂게 웃었다.
“테드가 한국에 좀 더 머물고 싶다는데, 내가 일단 미국에 가서 급한 일 처리하고 다시 한국 가라고 그랬습니다.”
“아, 그래요?”
“응. 이번에 가면 테드도 시카고에 집 얻을 겁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옆에 있는 게 본인도 일하기에 편하다고 하고.”
갑자기 테드 얘기는 왜 하는지, 영문을 몰라 하던 재인의 눈빛이 순간 반짝, 빛났다.
“그래서 두 사람, 사귀는 건 언제 말할 겁니까?”
휙, 돌아선 태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상화가 눈을 치떴다. 태서의 품에 안긴 재인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상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게, 사귄다기보다는…….”
“아, 사귀는 게 아니다? 어리고 순진한 남자애 데리고 놀기만 할 거다?”
“누가, 누가 그렇대요?”
“나는 내 방식으로 테드를 아낍니다.”
상화를 향해 완전하게 돌아선 태서가 입꼬리를 올렸다. 같은 사람인데 이번에 짓는 미소는 어쩐지 조금 살벌하게 다가왔다.
그게 기분 탓일 리만은 없다고 느낀 것은 서상화 역시 양심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테드가 온라인 게임 아스테리온 세계 랭킹 1위입니다. 게임 출시한 이래 온갖 짓을 다 해 가며 그 자리를 3년째 지키고 있는 애인데.”
“…….”
“얼마 전에 무기며 방어구, 캐릭터까지 싹 다 매물로 내놨더라고요. 그게 아니어도 주식 좀 만져서 돈이야 많을 텐데 굳이 게임 캐릭터를 팔아 치우려는 이유는 뻔하지 않습니까? 이제 게임할 시간도, 그럴 생각도 없다는 뜻이겠죠. 게임보다 더 푹 빠진 게 있어서.”
“…….”
“테드가 그 게임에 쓴 돈이 어마어마할 겁니다.”
“…….”
“물론, 시세를 보아하니 그거 팔면 강화한 비용 몇 배는 남겨 먹고도 남겠지만.”
입을 꾹 닫은 상화가 저만치 선 테드를 보며 눈짓하자 테드는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신난 얼굴로 다가왔다.
밖에서는 최대한 거리를 두라던 상화가 사람 많은 곳에서 저를 부르자 한껏 들뜬 모양새가 마치 순한 강아지 같았다.
“나는 윤재인이랑 행복하게 지낼 테니까. 서상화 씨는 입던 팬티까지 팔아서 좋아하는 사람 곁에 있으려는 어린애 마음, 가볍게 여기지 맙시다. 테드는 한국과 시카고 오가며 지내려고 양쪽에 집을 알아보고 있는 것 같던데.”
“……가볍게 여기지 않아요. 나는 그냥…….”
“그냥……?”
“사람들한테 알리기 창, 창피해서…….”
“창피해……?”
“내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애 덮친 꼴밖에 더 되냐구요. 아니 덮친 건 맞지. 알고 보니까 내가 먼저 얌전히 있는 테드를…….”
“…….”
“덮쳤더라고. 꼬시고, 살살 달래고. 새로운 세계를 가르쳐 주겠다고 누나만 믿으라고…….”
순간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상화의 빠른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은 테드만이 빙글거리고 웃고 있을 뿐, 재인은 얼굴을 붉힌 채 헛기침했고 앰버와 태서는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돌렸다.
“……그 밤, 그러니까 일이 있었던 그 날 밤에……, 내가 중간에 30분만 자고 일어날 테니까 각오하라고, 홍콩 보내 주겠다고 했다는데……. 테드는 그 말이 홍콩 여행 가자는 건 줄 알고 여권 가지러 사라졌던 거래요. 그런데 집에 가서 급하게 여권만 들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니까 내가 없었다고…….”
쿡, 웃음을 터뜨린 태서를 시작으로 모두 참지 못한 웃음을 흘리며 상화와 테드 커플 탄생을 축하하려던 때였다.
“……대표님.”
본부장님, 이라는 호칭 대신 새롭게 대표님이라는 호칭으로 태서를 부른 것은 장 실장이었다. 잠시 전화를 받겠다며 몸을 돌리고 서 있던 그녀가 사색이 된 채 태서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