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 참는 자에게 복이 (120/123)


#120. 참는 자에게 복이
2023.08.22.



“뭐. 왜 그런 눈으로 봅니까?”

“……태서가 무서워서.”

“……태서 씨 무서워서요.”

앰버와 상화가 동시에 답하자 태서로부터 멀찍이 앉은 테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태서는 한껏 더 입을 끌어 올리며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웃고 있지 않습니까.”

“……입만 웃고 있잖아요. 눈은 안 웃잖아요. 무표정보다 그게 더 무서워요.”

상화의 지적에도 태서의 억지 미소는 바뀌지 않았다.


“태서 씨……. 태서 씨가 초대했다면서요.”

옷을 갈아입고 나온 재인이 곁에 다가오자 태서의 눈이 사르륵, 곱게 접혔다.


“초대는 했지만,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한 시간 반이나 남았습니다. 케이터링 서비스도 아직 도착하기 전인데. 너무 일찍 오는 손님도 매너 없는 겁니다.”

재인이 나타나자마자 거짓말처럼 표정이 바뀌어 부드럽게 풀어지는 태서를, 상화와 앰버, 테드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예정된 시각보다 이르게 온 것은 파티라는 말에 들뜬 상화와 앰버가 서두른 탓이 맞았다. 그래서 묘하게 냉대하는 태서를 탓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앰버와 테드는 이런 태서의 모습에 익숙했다.

오히려 재인 앞에서 한없이 자상해지는 태서가 낯선 두 사람이었기에 지금 태서가 입으로는 웃고 눈으로는 욕하는 것을 무섭게 여기면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윤재인을 만나기 전의 강태서는 늘 저랬으니까.


“에이, 우리 사이에 손님은 무슨. 편하게, 편하게 생각해요. 아, 장 실장님은 정각에 오신대.”

상화가 넉살 좋게 웃으며 들고 온 와인을 들어 보이자 재인이 일어섰다.


“잔 가져올게. 안주는 과일이랑 치즈면 되겠지?”

“안주 없어도 돼. 우리가 케이크랑 타코 사 왔잖아. 잔만 가져와.”

“그래, 태서! 우리 이거면 돼! 케이터링 서비스 필요 없는데 뭐 하러 불러써? 근데 메인 메뉴 뭐야?”

“연어랑 랍스터.”

“끼얏, 연어 쪼우아!”

“헐, 랍스터! 랍스터래! 대박, 빨리 오라고 그래요!”

흥분해서 소리를 질러 대는 앰버와 상화의 곁에서 테드가 얌전히 사 온 음식들을 꺼내어 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재인이 주방으로 향하자 태서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어섰다. 커다란 접시를 꺼내려 손을 뻗는 재인의 뒤에 선 그가 재인의 허리께를 잡으며 재인이 꺼내려던 접시를 꺼냈다.


“내가 할게요. 재인 씨는 앉아서 쉬고 있어요.”

“나도 할래요. 우리 집이니까.”

“…….”

“왜요?”

“가끔 그렇게 훅 치고 들어오더라.”

“응……?”

“우리 집이라며.”

“…….”

‘우리 집’이라는 말에 윤재인이 제 프러포즈를 받아 줬음을 실감했다고, 그래서 감격했다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당장 안고 싶다는 뜻이었다.

말을 알아듣자마자 제 목덜미에 닿는 열기 어린 태서의 숨을 느낀 재인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하아……. 참아야 하는 사람은 환장하겠는데 정작 윤재인은 아무것도 모르지.”

두 명의 파티광과 한 마리의 커다란 강아지가 들이닥치기 전에는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키스도 하기 전에 등장한 손님들로 인해 달아올라 있던 태서는 찬물을 맞은 격이었다. 그러니 지금 그는 참고 있는 게 맞았다.

태서는 상화를 끌어안고 함께 울던 재인을 생각해서 재인 모르게 사람들을 초대했다. 나름의 작별 파티를 계획한 것이다.

케이터링 서비스가 도착할 시간, 손님이 올 시간까지 정확하게 체크한 그는 그 전까지는 계속해서 제 연인을 물고 빨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화와 앰버가 설레발치며 나타날 줄은 몰랐다. 앰버 혼자 서둘렀다면 테드가 말렸겠지만, 성격이 비슷한 두 사람 상화와 앰버가 만나니 시너지 효과가 더해졌다.

파티라는 말에 방방 뛰기 시작한 두 사람의 귀에 테드의 만류가 들렸을 리 없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키스도 제대로 못 했는데.”

툭, 불거진 턱으로 불만스러움을 표출하는 태서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재인이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그러고는 슬쩍 몸을 틀어 거실을 왁자하게 만들며 웃고 떠드는 세 사람을 확인했다.


“지금부터 최소 자정까지는 참아야 할 텐…….”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입술에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에 태서의 몸이 굳었다. 한껏 발꿈치를 들어 순식간에 태서의 입술을 훔친 재인이 생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참아요.”

거짓말처럼 짧게 입 맞춘 자리를 뭉근하게 매만지는 손길에 태서는 얼이 나간 채로 제 앞의 연인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마치 조련당하는 맹수가 된 기분인데, 그게 또 싫지는 않아 입술을 내어 준 채 헛웃음을 흘렸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잖아.”

“…….”

“잔은 태서 씨가 들고 와요. 타코 냄새 너무 좋다. 그쵸? 연어랑 랍스터, 기대된다.”

접시와 포크 몇 개를 들고 살랑살랑 주방을 벗어나는 재인의 뒷모습을 보던 태서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오늘 밤, 제게 복을 내려 줄 단 한 사람의 말이 절대자의 명령처럼 그에게 새겨졌다. 와인 잔 다섯 개가 올려진 트레이를 든 태서가 얌전히 조련사의 뒤를 따랐다.

* * *



“미스터 조랑 그 여우처럼 생긴 아줌마, 완전 개판이라며?”

시끌시끌한 분위기를 틈타 앰버가 조대훈과 지승희의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부리는 사람들을 통해 대충이나마 들어 알고 있지만, 담당 검사와 인연이 있는 태서에게 직접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재인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평소보다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음,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 죄를 입증하는 게 어려워서가 아니라, 부부가 서로 물어뜯느라 혐의가 자꾸 추가된다고 하네. 혹시 몰라서 가지고 있는 자료 중에 일부를 넘기지 않은 게 의미가 없을 정도던데.”

“그러면 감옥 가는 거지?”

“추징이 들어가고 벌금도 내야 할 거야. 징역살이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여러모로 아쉽지.”

“하긴……. 한국 법은 어느 부분에서는 너무 물러. 벌금 이천팔백억, 징역 오천 년! 이런 식으로 시원하게 때려야 되는데.”

“징역 몇 년 살다가 사면되든, 보석으로 풀려나든 하겠지. 그래도 다시 현양 건설을 갖게 될 순 없을 거야. 빈털터리일 테니까.”

“당연하지. 내가 지금 그 인간 때문에 뺑이치잖아.”

“……도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 오는 건데.”

비속어나 은어의 사용에 있어서 태서는 앰버를 따라가지 못했다. 주로 술자리에서 한국어를 배운 앰버의 한국말은 그만큼 화끈했다.


“조유리, 그 깜찍하게 못된 년은? 우리 재인 주변에 얼씬도 못 하고 있는 거 맞지?”

어느새 상화뿐 아니라 앰버 역시 재인을 ‘우리 재인’이라 불렀다.

강태서만의 재인이면 좋겠다는 욕심에 슬쩍 눈빛이 사나워지려던 태서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상화와 웃고 떠드는 재인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음, 조유리한테 돈 받고 집 주변에 어슬렁거리던 놈들은 진작에 치웠고.”

“하, 걔 하는 짓마다 소름 돋아. 싸이코야, 싸이코. 머물던 호텔에서도 쫓겨났다며?”

“그랬다더라.”

“지금은 어쩌고 있어? 또 눈 뒤집혀서 우리 재인 괴롭히려고 어디 숨어 있는 거 아니야?”

호텔에서 쫓겨난 조유리는 발악하다가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친구나 먼 친척들에게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녀를 받아들여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돈도 다 떨어지고 갈 곳 없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연락한 건 조대훈 전 회장의 비서였던 그녀의 친부, 김형주였다.

김형주가 먼저 태서에게 연락해 왔다. 검찰 조사에 협조하는 중이어서 바쁜 와중에 조유리의 연락을 받았다는 그는 조유리를 걱정했다.


“유리는 평생 온실 속에서 자란 아이입니다. 뭐든 다 제 뜻대로 할 수 있다고 믿는 아이여서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김형주 씨. 제게 연락하신 이유를 말씀하시죠.”


“지금은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만……, 그냥 두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면…….”


“저는 그 아이가, 더는 망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아이로 인한 사건 사고가 없기를 바랍니다.”

 
결혼 발표 후 자만에 젖어 있다가 태서의 인터뷰가 공개되면서 순식간에 주변인들의 비웃음거리가 된 조유리였다.

쫄딱 망하고 빈털터리가 된 제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한 그녀는 있는 돈을 모두 끌어다 또다시 심부름센터를 찾아갔다고 했다.

조유리는 거기서 윤재인 살해를 의뢰했다.

방법이 어떻든, 죽여만 달라는 조유리의 부탁에 알겠다고 답한 이들은 조유리가 나가자마자 찾아온 태서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태서는 조유리의 뒤에 사람을 더 붙였다.

마지막까지 뉘우치지 않고 발악하는 조유리가 사실상 가장 큰 문제였기에 태서는 김형주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키려 합니다. 이 부분은 지승희나 조대훈도 동의한 내용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조유리에게 정이 없던 조대훈이나, 그녀보다 자기가 살기 급급한 지승희의 선택은 그렇다 쳐도, 평생 제 딸에게 고개 숙여야 했던 친부 김형주에게는 쉽지 않을 선택이었다.


“유리는 현재 알코올 중독 증상이 있습니다. 거기다 최근에는 약에도 손을 댄 듯한데……. 더 늦어지기 전에 치료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법의 심판을 피해 갈 수는 없을 듯하니……. 돌봐 줄 사람 없는 그 아이에게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그렇게 되면서 조유리는 본격적으로 술에 의지한 듯했다.

호텔에서도 매일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한 채 호텔 직원들을 상대로 행패를 부렸다는 보고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약에도 손댄 줄은 몰랐다.

자존심 하나로 도도하게 굴며 지저분하게 놀던 무리를 경멸하던 조유리였는데, 기댈 곳이 사라지면서 빠르게 무너진 모양이다.

절망에 빠진 그녀에게 누가 손을 내밀었을지, 어떤 부류와 어울렸을지를 가늠한 태서가 눈을 감았다.

노력 없이 넘쳐 나는 돈을 물려받게 된 재벌 3세들 중에는 유독 더럽게 노는 부류가 있었다.

태서가 유학 생활할 때 끊임없이 그를 유혹하던 무리였다. 그들은 누군가 자기들과 함께 진창에 빠져 뒹구는 것을 보며 즐기고 위안 삼았다.

그래서 오늘 아침, 김형주는 검찰 출석 이전에 조유리를 강원도의 어느 병원에 입원시켰다.

제게 왜 이러느냐고, 다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발악하며 끌려간 조유리가 진정제를 맞고 나서야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을 태서 역시 보고받았다.


“신경 쓸 필요 없어. 걱정하지 마.”

태서가 안심하라는 듯 속삭이고는 쓰게 웃었다. 어떻게 보면 저나 조유리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부모 운이 없다는 것. 하지만 나쁜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해서 조유리의 행동과 말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조유리는 제 잘못으로 인한 결과를 책임져야 마땅했다.


“무슨 얘기 하고 있어요?”

어느새 다가온 재인을 향해 태서가 싱긋이 웃었다. 윤재인은 더럽고 나쁜 것들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는 좋은 것만 보고 듣게 될 테니까. 제가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재미없는 이야기.”

“응?”

“이제 손님들 좀 가라고 합시다. 나 졸려.”

“거짓말.”

떼쓰는 아이를 혼내듯 엄한 눈길로 고개 젓는 재인의 손을 잡아 제 가까이 끌어당긴 태서가 그녀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들어 남은 와인을 마셨다.

아직도 더 참아야 하나. 복을 바라는 태서의 눈이 자꾸만 시계를 향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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