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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채워 줘요 (119/123)


#119. 채워 줘요
2023.08.18.



“미안해. 같이 일하자고 해 놓고 너한테 이렇게 다 맡겨 놔 버리고…….”

“…….”

“요가원 신경 쓰는 게 번거로우면 정리해도 돼. 내가…….”

“이 바보야!”

상화가 외마디 외침과 더불어 울음을 터뜨렸다.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던 재인이 상화의 모습에 어쩔 줄 모르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기울였다.


“상화야…….”

역시 기분이 안 좋겠지. 같이 하자고 차려 놓고 맡겨 두기만 한 거로 모자라서 나는 미국에 들어갈 거니까 아예 너 혼자 하라고 하니 화가 날 만도 하지.

재인이 미안한 마음이 담뿍 담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손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상화를 살피는데 갑자기 상화가 얼굴을 들었다.


“이 바보야! 네 행복이 우선이지! 왜 나한테 미안해해!”

“…….”

“그리고 네 돈 다 털어 차린 요가원,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 차린 요가원을 나한테 돈도 안 받고 그대로 넘기겠다면서 뭘 자꾸 미안하대!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어!”

“하지만……. 하지만, 너 화났잖아.”

“나는!”

울음 가득한 상화의 얼굴엔 어느새 눈물 콧물 범벅이었다.


“나는 너 미국 가게 되면 자주 못 보는 게 서운한 거란 말이야! 곱게 키운 딸내미, 먼 타국으로 시집보내는 마음이란 말이야! 화가 난 게 아니고! 내가 너한테 화를 왜 내!”

“…….”

“바보야!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왜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 내 눈치를 봐!”

“흐…….”

“강태서 씨 좋은 남자인 거 아니까, 결혼하지 말고 나랑 천년만년 살자는 말은 못 하겠고! 한국에 와서 좋은 꼴은 하나도 못 보고 강태서 씨랑 미국으로 간다는데 내가 다 속이 상해 죽겠단 말이야!”

“미안해. 흑, 미안해.”

“마음 같아서는 나도 너 따라 같이 가고 싶다고! 으허엉!”

상화와 재인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팔 벌려 서로를 안았다. 그야말로 아이처럼 엉엉 우는 두 사람의 뒤로 살짝 열렸던 요가원 문이 조용히 닫혔다.


 
정재훈에게 들렀다가 온 태서였다. 재인을 데리러 요가원에 들어섰다가 끌어안고 우는 두 사람을 목격하고 고민하다 돌아선 것이다.

들어가 위로할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두 사람에게는 둘만의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차에서 기다릴 생각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 * *



“도와줄까요?”

“아니. 거의 다 싸 가요. 아까 오피스텔에 들러서 거기에 있던 짐도 정리해서 들고 와서 그것도 살피느라 시간이 좀 걸리네요.”

그래 봤자 캐리어 두 개뿐이다. 한국 생활을 정리하기로 한 재인은 캐리어 두 개를 펼쳐 놓은 채였다. 태서 역시 짐은 단출했다.

재인은 그나마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로 꽉 찬 캐리어가 하나라도 있었지만, 태서는 아니었다. 아끼는 옷 몇 벌과 손에 익은 개인 물품뿐이었다.

오전에 재인은 오피스텔을 정리했다. 요가원이야 원래 상화의 앞으로 계약했으니 따로 신경 쓸 건 없었다. 마음먹으니 떠나는 것은 쉬웠다. 한국에 미련 둘 것이라고는 별로 없었던 두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두 사람의 마음에 쏙 든 정륜동의 집이었다. 고민 끝에 정륜동의 집을 정리하지는 않기로 했다. 한국에 오면 머물 수 있도록 주기적으로 관리해 줄 곳을 찾은 것이다.


“통장이 텅 비었는데, 괜찮습니까?”

태서가 재인이 싸 놓은 짐 옆에 놓인 통장을 열어 보며 웃었다. 오늘, 재인의 통장에서 큰 금액이 빠져나간 것을 두고 마음이 어떤지를 묻는 것이었다.


“안 괜찮을 건 또 뭐예요. 원래 나한테 없던 돈이니까 없어도 괜찮아요.”

“그래도. 욕심이 너무 없는 것 아닙니까? 적지 않은 돈인데.”

돈 앞에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통장을 내려놓은 태서가 재인의 뺨을 쓰다듬으며 고개 기울였다.

재인은 제 엄마에게 물려받은 주식 모두를 태서에게 넘겼다. 그리고 태서는 오늘, 재인에게서 받은 주식을 현금화해서 다시 그녀에게 건넸다.

휴지 조각이 될 뻔한 주식이었다. 주가가 그나마 안정을 찾은 것은 임시 CEO를 맡은 앰버의 기업 운영 방향이 꽤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어서였다.

재인은 그 돈에 엄마가 물려준 돈을 보태어 기부했다. 기부처를 두고 고민하다가 나이가 차서 보육원을 나오게 된 아이들의 자립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내가 왜 욕심이 없어요? 나 욕심쟁이라니까?”

“무슨 욕심쟁이가 통장의 돈을 다 긁어 남에게 퍼 줍니까?”

“나한테는 태서 씨가 있으니까.”

“아……?”

“통장, 새로 채워 줘요.”

당당한 요구에 웃음을 터뜨린 태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백수로 살면 안 되겠네.”

“응. 나 이제 정말 빈털터리라서 당분간은 태서 씨만 바라볼 거야.”

“아……. 그거 좋은데.”

영원히 저만 바라보기를 바라는 남자의 눈웃음에 재인이 입술을 삐죽이며 그의 품에 안겼다.


“미국에 가면 뭘 하고 싶습니까?”

“하고 싶다고 하면 다 시켜 주나?”

“노력해야지. 윤재인한테 예쁨받으려고 돈 버는 건데.”

태서의 품에 안긴 재인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가진 돈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후회는 없었다.

허전함을 느끼기엔 저를 안은 남자가 주는 충족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허탈함을 느끼기엔 약지에서 빛나는 반지로 인한 설렘이 더 컸기 때문이다.

목덜미를 간질이던 입맞춤이 조금씩 짙어진다고 느꼈을 때, 재인이 고개 들었다. 어느새 또. 남자의 눈에 지글지글 끓어오른 욕망을 확인하니 만족감에 절로 입매가 휘었다.

상화와 헤어지는 것은 아쉽지만, 재인은 강태서와 함께하기로 했다. 생에 두 번 다시 이런 사랑은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해서였다.


“여기.”

“응?”

고개 든 재인이 제 이마를 가리키고는 눈 감았다. 가만히 저를 향해 이마를 들이댄 재인을 바라보던 태서의 입매 역시 부드럽게 휘었다.

재인의 뜻을 알아챈 태서가 그녀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자 이번에는 재인이 고개를 들어 왼쪽 뺨을 내밀었다.


“여기도.”

다시 뺨에 내려앉은 부드러운 입술에 재인의 웃음이 짙어졌다.

오른쪽 뺨, 코끝, 턱, 입꼬리, 관자놀이, 목덜미를 가리키며 태서에게 입맞춤을 종용하던 재인이 마침내 눈 떴다.

태서는 제 인내심을 시험하듯 짧은 키스만을 바라는 재인을 내려다보며 타는 갈증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제 입술만을 향하는 것을 알면서도, 재인은 여유롭게 손을 들어 그의 목울대를 매만졌다. 그녀의 손길에 크게 오르내리는 목울대를 손끝으로 쓸어내리는 재인의 눈에도 열기가 피어올랐다.


“태서 씨.”

“……응.”

“내 침대 위가 엉망이라서 안 될 것 같은데.”

물건들을 늘어놓은 침대를 눈짓하며 재인이 슬쩍 눈짓하자 태서가 피식, 웃으며 그녀를 안아 올렸다.


“앗……!”

“……그만 놀리지?”

“으음…….”

“침대를 대체할 건 많으니까.”

보란 듯 재인을 안은 태서가 거실의 소파 위에 재인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그녀의 위로 제 몸을 겹쳤다.

아까부터 탐내던 재인의 도톰한 입술을 향해 태서가 작정하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

1층에서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열기에 찬바람이 들었다.


“누가 왔어요.”

“……무시합시다.”

미간을 찡그린 태서가 계단 쪽을 향해 고개 돌린 재인의 목덜미를 노리고 몸을 숙이려는데 또다시 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무시하자는 태서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딩동딩동딩동, 하고 연이어 초인종을 눌러 댔다.


“…….”

“누구지? 누가 오기로 했어요?”

“하아…….”

차오르는 욕구를 다독이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 감고 아랫입술을 짓씹는 태서를 올려다보는 재인의 눈은 마냥 순하기만 했다. 그사이, 집주인을 재촉하는 초인종 소리는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가 봐야겠어요. 이 시간에 누구지?”

한겨울이 지나면서 해가 길어진 터라 밖이 어둡지는 않았지만, 저녁 다섯 시를 막 넘긴 시각이었다. 택배가 오는 시간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여태껏 태서와 재인 둘만 지내는 집에 저렇게 마구 초인종을 눌러 댈 사람은 없었기에 재인의 눈에 의문이 차오른 것은 당연했다.


“……누군지 압니다.”

열이 오른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몸을 일으킨 태서가 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를 일으켜 세운 태서는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재인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는 것으로 제 욕망을 갈무리했다.

조금 전까지 함께 끓어올랐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말간 눈을 한 재인이 조금은 원망스러웠는지 뽀얀 두 뺨을 꽉 쥐었다 놓는 그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같이 내려가요.”

“응.”

태서가 재인의 손을 잡아끌고 1층으로 내려갔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들려오는 목소리로 인해 재인의 눈에 놀라움과 기쁨이 서리는 것을 보는 그의 입가에도 어느새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아니, 초대해 놓고 집에 없으면 어쩌자는 거야?”

“쌍화, 재인에게 전화해 봐.”

“나 핸드폰 차에 놓고 왔어. 앰버가 태서한테 해.”

“……그러면 테드가 태서에게 전화해.”

“……시러. 시러요.”

태서에게 통보받은 약속 시간은 일곱 시였다. 하지만 다섯 시 조금 넘기자마자 몰려온 세 사람의 손에는 와인과 케이크, 타코가 들려 있었다.

일찍 와서 일찍부터 놀 생각으로 들뜬 세 사람이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집주인의 성질머리였다.

상화는 몰라도 앰버와 테드, 두 사람은 강태서를 잘 알았다. 강태서는 약속 시간인 일곱 시까지 문을 안 열어 줄 수도 있는 사람인데, 재인을 만난 뒤 한결 말랑말랑해진 탓에 잊고 있었던 것이다.


“……쌍화, 그거 그만 눌러.”

앰버가 계속해서 초인종을 눌러 대는 상화의 손을 잡아 내렸다.


“아, 왜. 안에 아무도 없나?”

“……그거 자꾸 누르면 안에서 곰이 나올 수도 있어.”

“곰……? 귀엽겠다!”

“아니 그런 곰 말고. 쌍화는 겨울잠 자고 나와서 배고픈 회색 곰 만나 본 적 없지?”

“응……?”

앰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상화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굳건히 닫혀 있던 현관문이 열렸다.


“…….”

그제야 상화는 앰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열린 문 앞을 막은 채 서 있는 것은 한껏 굶주린, 커다란 곰이었다. 성난 곰의 뒤에서 새하얀 토끼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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