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 반지 (118/123)


#118. 반지
2023.08.15.


앰버가 그에게 내민 것은 종이 가방이었다.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새까만 종이 가방은 빳빳하게 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 요즘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우리 자기한테 이벤트 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샀거든? 태서에게 양보할게.”

“이게 뭔데.”

“Role playing이 처음에는 좀 어색하기는 한데, 태서는 뻔뻔하니까 잘할 거야. 미스터 강이니 뭐니 다 잊고 그 뭐지? 본……, 그, 자연의, 뭐더라?”

“……본능.”

“그래! 본능! 본능에 충실한 짐승이 되어서! 재인이랑 뜨밤 보내.”

“…….”

“안에 보면 한약도 들어 있어. 그게 그렇게 좋대. 이벤트 세 시간 전에 먹으면 완전, 어휴. 태서, 동양 의학 좋더라. 그 놀라운 힘을 태서와 재인도 느껴 봐.”

성분을 알 수 없는 약에 대해 한참을 찬양하는 앰버와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가방을 번갈아 보던 태서가 일어섰다.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저딴 걸 내밀 거면 울지나 말든지. 젖은 눈가를 연신 닦아 내며 내민 게 이벤트용 역할극 소품과 정력제다. 어떻게 생각하면 앰버답기는 했다.


“아무튼, 이렇게 정리가 됐네. 잘됐어. 내 속이 다 시원해.”

앰버가 말하는 정리란, 최근에 태서를 두고 이슈가 됐던 상황을 말하는 거였다.

오늘 아침, 강선 그룹은 다시금 홍보 팀을 통해 태서의 결혼 발표를 정정했다.

선대 회장끼리의 약속을 이행하려는 생각에 결혼 당사자 둘의 동의나 확인 없이 결혼 발표가 이루어졌음을 시인하며 결혼 발표가 성급했음을 인정했다.

회사 차원에서 발표한 입장을 빠르게 정정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디에이지>에서 일반인 연인이 있음을 밝힌 태서의 행보에 힘을 실어 준 것이다.

태서는 강신재 회장이 그랬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마도 조모인 임홍진 관장의 지시였을 것이다. 그랬다는 것은 지금 강신재 회장이 그런 부분을 신경 쓸 수 없는 상태라는 뜻이기도 했다.

연류동 본가를 나올 때, 뒤에서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조모와 고용인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으니 아마도 강신재 회장은 지금 병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일 것이리라.

아마도 술 때문이겠지. 지속적인 알코올 의존으로 인한 부정맥이라거나, 혈압 상승이라거나.

태서는 강신재가 쓰러진 것을 제 탓이라 여기지 않았다. 당연했다. 강신재가 저로 인해 놀란 일은 그가 태어났을 때뿐이리라.

하찮게 여기는 존재로 인해 충격받아 쓰러질 강신재가 아니라는 것을, 태서는 잘 알고 있었다.


“……상황 설명했으니 간다.”

“이거 가지고 가야지!”

“너나 많이 먹고, 너나 많이 입어.”

“이거 for men이거든? 엄청 유명한 한약방이야! 며칠 줄 서야 사는 거라니까?”

“그래. 어렵게 구한 거, 네 자기 먹여. 난 필요 없어. 네 자기는 필요하겠지.”

“Hey! 우리 자기, 아직 팔팔하거든?”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연인을 둔 앰버가 발끈하든 말든, 사무실을 나서던 태서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귓속에 쟁쟁하게 남은 앰버의 말이 그의 발을 붙든 것이었다.

자기.

그러고 보면 재인과 저 사이에는 이렇다 할 연인 간의 호칭이 없었다. 아직도 재인 씨, 태서 씨, 윤재인, 강태서. 서로를 이름으로만 부르는 게 조금은 건조하게 느껴졌다.

쭉 외국에서 자랐고 애초에 그런 호칭을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조금은 욕심이 났다. 이제 서로를 부르는 애칭 하나쯤은 가져도 되지 않을까.

태서의 시선이 자연스레 제 왼손으로 향했다. 반지가 끼워진 약지를 살핀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종이 가방을 들고 태서를 쫓아오던 앰버가 태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뒤늦게 반지를 발견한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허, 그 반지 뭐야?”

“앰버.”

앰버가 반지에 대해 듣고 싶은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태서를 바라보았다. 어찌나 궁금해하는지, 피곤함에 찌들어 얼굴을 뒤덮은 다크써클까지 순간적으로 환해지는 듯했다.


“칸쿤에 있는 네 별장 좀 쓰자.”

“좋아. 거기서 이거 입으면 끝내주겠다. 자, 챙겨 가.”

“그건 네 자기나 입히고. 일정 정해지는 대로 연락할게.”

별장 좀 빌려 달라는 사람치고는 아쉬운 것 하나 없는 태도의 태서가 돌아섰다. 기껏 양보한 아이템을 무시하고 빈손으로 멀어지는 그를 보며 앰버가 소리쳤다.


“그 반지 뭐냐니까?”

궁금해하는 그녀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의 비서진을 가뿐하게 지나친 태서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약지에 낀 반지를 매만지는 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설렘이 번졌다.


 

* * *



“건물 앞이 왜 이렇게 어수선해?”

“아, 2층 치과 있잖아.”

“어. 간판 바뀌었더라?”

“거기 난리야. 건물주인 마귀할멈이 어디서 시위하는 걸 배워 왔는지, 아침저녁으로 시위하잖아.”

“……자기 건물인데?”

“2층만 주인이 바뀌었대. 오소똥 원장, 아니지, 이제는 원장도 아니지. 아무튼 그 오소똥이 2층만 자기 엄마 몰래 팔아넘겼다나 봐.”

“허……?”

“그거 뒤늦게 안 마귀할멈이 공인 중개사무소 뒤집어 놓고 치과에 가서 진상 부리고, 요즘 장난 아니었어. 그러더니 이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친구들 데려와서 건물 앞에서 시위해.”

오랜만에 <요가만다라>에 들른 재인이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한때 재인을 머리 아프게 하던 모자가 그동안 무척이나 드라마틱한 시간을 보낸 듯했다.

상화는 질색하는 표정을 짓다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좀 시끄럽고 성가신 것 말고 요가원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건 없었다. 하지만 건물주 남광순 여사의 행보는 제삼자가 보기에도 꽤나 징글징글했던 모양이다.


“더 웃긴 거 알려 줄까?”

“뭔데?”

“오소똥이 머리를 심었어. 뒤쪽 머리카락을 앞으로 옮겨 이식했나 봐. 근데 머리카락 좀 심었다고 자신감이 생겼는지, 치과 환자한테 수작 부리다가 고소당했대.”

“…….”

“그래서 짤렸대. 짤리기만 한 게 아니라 치과 이미지 하락시켰다고 치과 측에서도 고소 준비한다더라. 진짜 답이 없는 모자야.”

상화의 얘기를 듣던 재인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극적인 문구로 도배된 피켓을 든 노인 몇몇이 남광 빌딩 앞에서 소리 높여 부당함을 외치고 있었다.


“공부만 하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아들 속여 계약한 거라고, 매매 계약이 부당하대. 환자가 먼저 자기 순진한 아들을 유혹했다면서 해고도 부당하대. 부당은 무슨, 저래 봤자 자기 아들 등신이라는 거 인증하는 것밖에 더 돼?”

“……그러게.”

“저번에는 그 마귀할멈이 금쪽같이 챙기던 아들 머리카락을 쥐어뜯더라니까? 오소똥이 머리카락만은 안 된다고, 심은 지 얼마 안 됐다고 막 빌었는데도 마귀할멈 장난 아니더라. 오소똥이 엄마, 엄마아, 부르는데 나는 무슨, 강남 한복판에 염소 나타난 줄.”

상화가 덜덜 떠는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짖던 석동의 성대모사까지 하면서 재인에게 제가 목격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그 못난 모습에 재인이 쓰게 웃으며 고개 저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그냥 지나다 들렀을 리는 없고.”

“아, 그게…….”

오늘 재인은 상화에게 태서에게 프러포즈 받았다는 것을, 그래서 함께 미국으로 가려 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왔다.

덧붙여 태서의 아버지인 강신재 회장이 상화와 그녀의 가족을 두고 협박했음을 알려 주고 혹시 모를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음을 설명하려 했다.

그렇게 되더라도 걱정할 것 없다고, 나로 인해 네가 피해를 입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저나 태서가 최선을 다해 지켜 낼 거라는 얘기도 덧붙일 생각이었다.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재인이 말을 고르는 사이 의아한 눈으로 재인을 바라보던 상화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너!”

“어, 어?”

“반지!”

“아…….”

“태서 씨가 준 거지? 그치?”

재인의 왼손을 덥석 잡아 요리조리 살피는 상화의 입술이 점점 벌어졌다. 커다란 다이아몬드 없이 세련되고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였다.

하지만 여러 개의 작은 다이아몬드 주변으로 세공이 섬세하게 들어가 있는 반지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뭐야, 무슨 의미야? 커플링? 약혼? 설마, 결혼? 헐, 프러포즈야? 프러포즈 받았어?”

순식간에 생기 넘치는 표정을 짓는 상화가 재인의 답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응.”

“미친, 대박. 진짜? 프러포즈라고?”

고개 끄덕인 재인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설렘을 숨기지 못하는 시선은 반지를 향한 채였다.


“어떻게 했어? 응? 재벌은 프러포즈 어떻게 하디? 막 유람선을 빌려? 아니면 드론 십만 대가 하늘에 용을 수놓…….”

“무슨 올림픽도 아니고 드론 십만 대가 왜 용을 수놓아……, 그런 거 안 했어. 그냥…….”

재인은 저보다 더 기뻐하며 제 행복을 축하해 주는 상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면서 이런 친구를 얻게 된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새삼 깨달은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상화야.”

“응, 왜. 빨리 자랑해 봐. 반지 너무 이쁘다. 맞춘 거겠지? 이 디자인은 세상에 하나, 뭐 그런 거겠지? 반지 하나에 아파트 한 채 값, 막 그럴 거야. 어휴, 빛나는 거 봐. 눈부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음, 그게 말이야…….”

재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나뿐인 제 친구가 섭섭해하지 않기를, 제 제안을 받아 주기를 바라며 밤사이 생각한 것을 조곤조곤 털어놓았다.

환하게 웃던 상화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 갔다. 이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저를 보는 상화를 마주한 재인 역시 눈물을 참으려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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