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 셋 중에 하나 (117/123)


#117. 셋 중에 하나
2023.08.11.



“으, 으! 읍! 으흡!”

정재훈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벼락 맞은 사람처럼 굴었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더니 이내 온 힘을 다해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한 것이다.

병원 침대 바로 옆, 정재훈의 시야가 닿을 곳에 슬랙스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서 있던 태서를 이제야 알아챈 모양이었다.


“팔자 좋네. 늦잠이나 처자고.”

쯧, 혀를 찬 태서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정재훈이 깰 때까지 기다리느라 소중한 시간을 40분이나 허비했다. 또다시 이런 식으로 제 시간을 좀먹은 쓰레기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시리게 빛났다.


“흐으……. 으, 으읍!”

“나를 봐서 반가운가 봐?”

“으으으, 읍! 흡!”

“그러게 똑바로 살든, 열심히 살든, 그게 아니면 죽든. 셋 중에 하나라도 하지 그랬어.”

“으으! 흐으읍!”

“사촌 누나가 보낸 사람들한테 처맞아서 이도 몇 개 안 남았다며. 그렇게 소리를 질러 대다간 남아 있는 이도 다 상하겠어. 아, 이건 걱정이 아니라 권유야. 나는 네가 어느 한 곳이라도 성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라서.”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웃은 태서가 정재훈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정재훈이 발작이라도 하듯 버둥거리려 했지만 석고 붕대에 싸인 팔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으! 으흐읍!”

“나라고 네 얼굴 보는 게 좋겠어? 혹시라도 귓구멍까지 붕대로 싸맨 네가 내 말을 못 알아 처먹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는 중이야. 너랑 내가 이렇게 살아서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어야 하니까.”

“…….”

다음에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처럼 온몸의 뼈가 부서지고 신경이 끊어진 것만으로는 부족할 거라는 태서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시끄럽게 굴던 정재훈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네 사촌 누나가 혈육의 정은 있나 봐. 목숨은 붙여 놓은 걸 보면.”

“…….”

“물론, 평생 누워서 살아야 한다지만.”

“…….”

“아, 고개도 못 가눌 거라던가. 그래도 의식이 있으니 죽을 때까지 뭘 잘못했나, 반성할 수는 있겠네.”

태서가 피식 웃으며 온통 새하얀 붕대에 싸인 재훈을 내려다보았다. 의식이 있다고 한들 반성은커녕, 평생 분노와 원망에 휩싸여 괴로워할 인간이었다.


“골절된 뼈가 붙는 대로 어디 시골구석에 있는 요양 병원으로 옮길 거라던데. 들었어?”

“…….”

“어쩌겠어. 널 간호해 줄 어머니는 지금 네가 싼 똥 치우느라 바쁘시더라고.”

정재훈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며 불법적으로 취한 이득을 제 어머니의 이름을 빌려 세탁했다.

아들만 믿고 이름을 빌려준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마약 유통과 성매매 사업의 최고 수익자가 되어 있었다. 그것을 입증하는 자료를 검찰에 넘긴 것이 태서였다.

정재훈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을 살살 부채질해서 손대지 않고 정재훈을 처리했다. 마음 같아서는 괴로워하는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자근자근 밟아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제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재인은 어제, 그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이면서 이제부터 그의 시간은 그녀의 것이라 했다. 기꺼이. 어디 시간뿐일까. 태서는 이미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그녀에게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몇 시간 전을 곱씹으며 품 안의 재인을 떠올리는 태서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지기도 잠시, 태서는 불규칙적으로 숨을 내쉬는 정재훈을 바라보며 표정 없는 얼굴을 천천히 기울였다.


“시골 생활이 잘 맞기를 바라.”

“…….”

“아니지. 어차피 기저귀 차고 침대에 누워만 있을 거라서 상관없지?”

“…….”

“너는 지방 어느 요양원에서 숨만 쉬다가 어느 날은 그 숨 쉬는 것조차 끔찍해질 거야. 네가 갖지 못한 것, 네가 이루었던 것, 사람들을 발아래에 두었던 옛일을 곱씹을수록 현재의 네가 초라해지겠지.”

떠들지 못하는 재훈 대신 그의 앞날을 그려 주는 태서의 입꼬리가 그린 듯 휘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다.


 


“어떻게든 다시 사람처럼 살고 싶은 마음에, 혹은 알량한 복수심에 불타 미친 듯이 재활해서 기적적으로 일어나 앉게 될 수도 있을 거야.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

“그러면 검찰이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거고.”

아직 넘기지 않은 자료가 많거든. 혹시 몰라서 공소 시효 긴 것들로 남겨 뒀어. 그러게, 잘 좀 살지 그랬어.

허리를 숙여 정재훈의 귓가에 짓씹듯 속삭인 태서가 다시 반듯하게 섰다. 그리고 잠시 정재훈을 응시했다.

의사는 정재훈에 대해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폐공장 근처 산에서 발견된 정재훈을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멧돼지를 잡을 포획 틀을 놓다가 시체를 발견했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재훈은 살아 있었다.

열아홉 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난 뒤, 의사는 앞으로 정재훈이 평생 누워서 천장만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비극 앞에 울 틈도 없이 검찰 조사에 응하는 중이었고, 친누나들은 모두 그와 손절하고 권력을 쥔 사촌에게 빌붙기 바빴다.


“거기가 바닥인 줄 알았어?”

“…….”

“그래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고 여기고 재인 씨를 만나려고 한 건가?”

“…….”

“어떡하지? 바닥은 이제부터인데. 이제부터 네가 살아가야 할 시간이 네가 기어야 할 바닥이야.”

빙긋 웃어 보인 태서가 재훈의 두 다리를 슬쩍 내려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 기어 다니지도 못하지.”

“…….”

“그나마 좋은 소식이 있어. 앞으로는 죽을 때까지 주사에만 의존해야 한다더라.”

“…….”

“잘됐네. 너, 주사 좋아했잖아. 두 팔이 부족해서 다리에도 그렇게 찔러 댔다며.”

“…….”

“축하해. 이제는 합법적 약쟁이가 되었어.”

대견하다는 듯 고개 끄덕인 태서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 냈다.


“윤재인, 꿈도 꾸지 마.”

“…….”

“함부로. 네까짓 게. 감히.”

씹어 발기듯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힘이 실려 있었다.


“너 따위한테는 윤재인의 그림자도 허락 못 해.”

“…….”

“나는 네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널 보고 있을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네가, 숨 쉬는 것 말고는 할 수 없는 네가, 자괴감에 말라 갈 네가 비틀리고 뒤틀린 채 하루하루 죽어 가는 걸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받을 거야.”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 정재훈의 눈이 이상하게 부풀었다. 아마도 갑작스럽게 차오른 혈압 탓인 듯했다. 태서는 병실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정재훈에게 조언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혀 깨물 힘이라도 있기를 바라.”

병실 문을 열어 둔 채 나서는 태서의 뒤로, 정재훈의 외침만이 병원 복도에 울려 퍼졌다. 목이 쉬어라 외친들, 그에게 달려가는 의료진은 아무도 없었다.

* * *



“나 정말 죽겠어! 재인, 태서 좀 어떻게 해 봐!”

태서는 핸드폰을 붙들고 하소연하는 앰버를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재인, 잘 들어. 태서는 악마야.”

“앰버.”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쳐. 태서는 악마라고!”

재인에게 도망치라고 외치는 앰버의 핸드폰을 빼앗은 태서가 태연하게 제 귀에 댔다.


―앰버, 태서 악마 아니에요.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웃으며 앰버의 말을 정정해 주는 재인의 목소리에 절로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 모습을 보는 앰버가 인상을 구기고 닭살을 털어 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금방 갈게요.”

―태서 씨?

“응. 오늘 날씨 좋은데 나갑시다. 준비하고 있어요.”

통화를 끝낸 태서가 앰버를 향해 휴대폰을 건넸다. 앰버는 태서를 노려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렇게 봐?}

{내 꼴을 봐. 내 아름다운 머리카락 끝이 다 갈라졌다고!}

{그러면, 회사 하나 먹는 게 쉬운 줄 알았어?}

{이 정도로 개판일 줄은 몰랐지! 내가 이번 주에 몇 시간 잤는지 알아?}

{힘내.}

{그 말이 날 더 화나게 하는 거 알고 그러는 거지?}

앰버는 현양 건설의 임시 CEO를 맡아 고군분투 중이었다. 직원들을 해고하지 않으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도 결국엔 칼을 들었다. 손볼 곳이 너무나도 많았고, 정리해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덕분에 한국에 데리고 온 애인과 데이트는커녕, 잠도 회사에서 쪼개어 자는 실정이라고 했다. 그렇다 보니 오랜만에 사무실에 방문한 태서에게 화가 난 건 당연했다.


{이 회사가 여태까지 굴러온 게 말이 안 돼.}

{잘해 봐. 너 벼랑 끝에 선 회사 살려서 보람 느끼는 거 좋아하잖아.}

{하……. 역대급이야. 더군다나 너는 강선 건설로 이관할 업무 빼고는 아예 발 빼고 있으니까.}

{음, 이참에 그것도 정리하려고.}

{뭐?}

앰버가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태서를 향해 눈을 치떴다.


{다음 주 중으로 미국에 갈까 해.}

{……뭐?}

{여행 아니고. 아예 돌아가겠다는 말이야. 이미 결정된 사항이야. 정리 시작했어.}

태서를 가만히 바라보던 앰버가 욕을 내뱉었다. 걸죽한 욕설이 익숙한 듯, 태서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나한테 다 맡겨 놓고?}

{처음부터 네가 다 먹기로 했잖아.}

{강선 건설에 넘기는 일은?}

{그거야 내 후임자가 맡아서 하겠지. 사표 냈어.}

이 난장판에 나만 놓고 가느냐고 버럭 소리 지를 듯 일어선 앰버가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 입을 가만히 벌리고 태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금 소파에 주저앉았다.


{……미스터 강이랑 정리했구나?}

앰버는 태서의 부친인 강신재 회장을 가리켜 미스터 강이라고 불렀다.


{정리라고 할 게 없었지.}

{……태서.}

{그래서 말인데, 네가 좀 더 힘들어질지도 몰라. 강선 건설 측에서 비협조적일 수도 있고, 다른 외부 세력을 통해 방해가 들어올 수도…….}

상황을 말하던 태서는 벌떡 일어난 앰버가 사무실을 가로질러 책상 뒤편으로 향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

태서는 눈이 촉촉해진 앰버가 제 앞에 내려놓은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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