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Yes, yes, 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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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Yes, yes, yes
2023.08.08.
“정재훈이 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이 왜 병원에 있어요?”
“죽지는 않았다던데. 안타깝게도.”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재인은 잠이 호다닥 달아난 눈으로 태서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태서는 무서운 말을 한 사람 같지 않게 그림처럼 웃고 있을 뿐이었다.
“병원에 다녀온 뒤에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할까 합니다.”
재인은 저를 보며 미소 짓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가 지금 슬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한국에 정이 없다고 해도, 어떻든 제 뿌리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마음 붙일 데가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재인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말의 기대도 없던 저와는 다르게, 아주 조금이라도 관계가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한국으로 들어왔다가 결국 친부와의 관계를 정리하게 된 그였다. 그 실망감이 얼마나 클지를 짐작하는 재인의 입 안이 썼다.
오늘 저녁의 일을 떠올리자 절로 왈칵, 눈물이 솟았다. 이 남자도 참고 있을 테니 울지 말자고 그렇게나 다짐했는데, 생각할수록 속상했다.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인데, 강신재 회장은 당연하다는 듯 태서를 외면했다. 그 무시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그동안 태서가 겪었을 지독한 냉대를 상상할 수 있었다. 거기다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가하려 하는 모습을 본 충격이 컸다.
“표정이 왜 그래요.”
“……속상해서.”
태서는 재인에게 뭐가 속상한지 묻지 않았다. 그 역시 재인의 마음을 알 터였다. 재인은 제 목덜미에 코를 비벼 대며 아이처럼 구는 태서를 두 팔 벌려 안았다. 그는 잠에서 깬 재인이 다른 때보다도 더 따끈하다며 그녀의 살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나 대신 울어 주려고?”
“응.”
“좋다. 대신 울어 주겠다는 사람도 있고.”
“욕이라도 제대로 배워 둘 걸 그랬어.”
“욕은 내가 잘합니다.”
“……태서 씨가요?”
“응.”
재인은 상상할 수 없는 태서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너른 등을 쓸어내렸다.
한국에 태서의 조모가 계시기는 하지만, 오늘 본 임홍진 관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여든이 넘은 나이를 실감케 하는 모습이었다. 자기가 만든 지옥에 빠져 술에 취해 망가진 아들을 살피는 것도 쉽지 않을 터였다.
임 관장은 그녀가 가진 강선 그룹과 관련된 지분 모두를 태서에게 넘기는 중이었다. 동시에 강신재에게 반감을 품은 태서의 배다른 형제나 그의 친족들을 부추겨 강선 그룹의 자회사 분리를 조심스럽게 추진하고 있었다.
아들인 강신재가 장악한 권력과 부를 축소하고 태서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였다. 남편이 일군 회사가 쪼개지도록 도모하는 그녀의 마음이 좋을 리 없지만, 그녀의 선택은 태서를 살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아들의 눈을 피해 태서를 챙겨 준 조모는 감사한 분이지만, 그뿐이었다. 태서가 조모 하나만을 바라보고 한국에 남아 강신재 회장과 대립을 지속하기엔 어려움이 컸다.
강신재 회장과 태서가 가진 힘의 차이도 문제였지만, 태서가 조모를 의지하는 마음이 적기도 했다. 냉정하게 보자면 조모가 태서에게 잘해 준 것은 미안한 마음이 커서였다. 함께 지낸 시간이 길지 않았으니 정서적 친밀감이 쌓일 틈이 부족했던 것이다.
“한국 떠나면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생각해 봤는데 시카고가 어떨까 싶어. 마침 시카고에 있는 사무소 확장도 해야 하고. 재인 씨만 괜찮다면 같이…….
“갈게요.”
대뜸 뱉은 말에 재인보다 태서가 더 놀란 눈치였다. 번쩍, 고개 들어 재인을 바라보는 태서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져 있었다. 재인은 충동적으로 답한 제 말에 확신을 싣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태서를 바라보았다.
“……꼬시려고 준비한 말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어디 해 봐요.”
“나 추운 거 진짜 싫단 말이야. 시카고는 아직도 추울 텐데, 곁에 있어 줘요.”
기껏 꼬시려고 준비했다는 말이 투정 섞인 부탁이라니. 재인이 눈을 가늘게 뜨자 태서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잘게 일렁이는 웃음 끝에 깊은숨을 내쉰 태서가 재인의 손가락 끝마다 입 맞췄다.
“매일 밤, 내게 돌아갈 곳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대신 나는 매일 아침, 윤재인이 눈뜨고 싶은 이유가 되도록 노력할게.”
“…….”
“내 하루의 시작과 끝이 윤재인으로 인해 빛나듯, 윤재인 역시 나로 인해 행복하다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제 윤재인의 행복을 위해 살고 싶어.”
“……내가 행복하면 태서 씨도 행복해요?”
“응. 웃는 윤재인이 나를 살게 하니까.”
가만히 속삭이는 태서의 눈빛에 강요의 기색은 없었다. 깜빡깜빡, 재인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드리운 음영 아래를 살살 어루만지는 커다란 손은 늘 그렇듯 조심스러웠다.
태서의 묵직한 말이 주는 여운을 곱씹던 재인은 문득 제 손에 느껴지는 이질감에 시선을 옮겼다. 뒤늦게 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놀라움에 소리도 없이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자 태서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재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잠깐, 잠깐만요. 태서 씨, 이거 지금…….”
“응.”
“……이제 보니까 태서 씨도 반지 꼈네요?”
“응.”
“그러면 이번에는 정말 프러포즈…….”
“꽃도 없이, 멋없이 프러포즈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아까 연류동에서 날 지켜 주려던 재인 씨 모습 보면서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았어. 원래 계획은 이러려던 게 아니었…….”
재인이 함께 시카고로 가겠다고 한다면, 태서는 시카고로 돌아가기 전에 멕시코의 휴양지 칸쿤에 들를 생각이었다. 칸쿤에서 한동안 지내면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프라이빗 해변에서 프러포즈하려던 계획을 털어놓으려던 그의 입을 막은 것은 재인의 입술이었다.
“Yes.”
태서가 차마 하지 못한 질문, “Will you marry me?”에 대한 대답을 태서의 입술에 속삭이는 재인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참았던 눈물이 기어코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재인은 눈물을 닦는 대신 온 힘을 다해 태서를 움켜쥐었다.
“Yes, yes, yes.”
“하아…….”
재인은 결혼할지 말지의 문제는 고민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민 따위는 생각날 틈도 없었다. 제게 함께하자고 말하고는 기대감과 불안감에 떨고 있는 남자를 안아 줘야 하는 게 먼저였다.
그와 깊은 입맞춤을 나누면서 절로 입술이 움직였다. 몇 번이고 그에게 제 마음을 전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벅차오른 가슴이 이대로 펑 터져 버릴 것만 같아서.
“응. 할래. 할게요. 나 태서 씨랑 결혼…….”
“윤재인.”
“응, 응.”
“사랑해.”
“…….”
재인은 제 입술에 사랑을 속삭이고 잠시 저를 바라보는 남자를 마주 보았다. 그 역시 제가 뱉은 말에 놀란 눈치였다.
“아…….”
“나도.”
“…….”
“나도.”
그가 무슨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지, 태서의 아픈 기억을 알고 있는 재인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사랑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사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깊은 마음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초조하지 않았다. 다만 언젠가는 그가 아픈 기억으로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제가 대신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를 보고 있으니 자꾸만 눈물이 난다. 재인은 온 힘을 다해 태서의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는 코와 뺨, 입술이 씰룩거렸다. 이 우스운 모양새에도 재인은 지금 꼭 태서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나도 강태서를…….”
“사랑해.”
처음에 사랑한다 말하고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태서가 다시금 재인이 할 말을 먼저 뱉고는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새삼스럽다는 듯이 그녀의 고운 이마, 선이 아름다운 콧대와 붉게 물든 뺨, 촉촉하게 젖은 눈가와 도톰하게 부푼 입술을 새기듯 바라보던 그가 다시금 입술을 뗐다.
“사랑해. 윤재인, 사랑해.”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몇 번이나 더 반복해서 사랑한다고 말하던 그가 마침내 웃었다. 그 말간 모습에 재인은 제 품으로 안겨 오는 그를 두 팔 가득 받아들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나는 동시에 웃음이 나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평생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허기가 꽉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재인이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쥐고 그의 키스에 열렬히 답하다 결국엔 몸을 일으켜 그를 침대 위에 눕혀 버렸다.
“하……. 병원에 가지 마?”
정갈한 슈트 차림의 남자는 어느새 잔뜩 흐트러진 채였다. 재인은 저로 인해 구겨진 셔츠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며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내던졌다. 빨개진 눈이 부어 있을 테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응, 가지 마.”
“…….”
제 위에 앉아 단호히 말하는 재인을 올려다보던 태서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이동했다. 재인은 호기롭게 그의 손을 잡아 제 허리에 올렸다.
커다란 손이 뜨끈하게 허리를 감싸며 저를 바짝 잡아당기자 절로 신음이 샜지만, 겨우 참아 내고는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고무줄마저 풀어 버렸다.
“프러포즈하고 어딜 가려고? 오늘은 누구한테도 강태서 양보 안 해. 욕심부릴 거야.”
“이제 막 열두 시 지났을 텐데?”
“응. 그러니까 태서 씨는 이제부터 적어도 24시간은 아무 데도 못 가요.”
“아……. 나는 윤재인이 이렇게 욕심부릴 때마다…….”
“응?”
“환장하겠더라고. 좋아서.”
꺅, 소리에 간지러운 웃음이 이어졌다. 어느새 눈물은 잊은 두 사람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