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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나는, 당신과 달라 (115/123)


#115. 나는, 당신과 달라
2023.08.04.



“응.”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재인의 질문에 답한 태서가 그녀의 곁에 섰다. 제 이런 맹목적인 애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태서는 알지 못했다.

평생을 시달려 온 추위에 허덕이던 그에게 재인은 따뜻한 빛이 되어 주었다. 숨통을 죄어 오는 자괴감에 헐떡일 때마다 그녀의 존재는 태서를 숨 쉬게 했다.

저만을 담고 있는 새까만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그가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강신재 회장을 마주한 그가 손을 내려 재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재인의 손끝이 차가워져 있었다. 긴장한 그녀가 이 상황을 두려워했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재인의 차가워진 손을 알아챌 만큼 제 손끝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태서는 언짢은 속내를 숨기지 않는 얼굴로 실소를 머금는 강신재 회장을 내려다보았다. 강신재 회장으로부터 저를 지켜 주려던 재인을 생각하는 그의 입매가 절로 부드럽게 휘었다.


“그럴 겁니다. 이 사람 건드리시는 건 제가 용납 못 합니다.”

“우습군. 강 본부장이 뭘 할 수 있지?”

“뭐든 할 겁니다.”

“아, 회사를 차렸다고 했지. 꽤 운영을 잘해 왔다고.”

“…….”

“회사가 미국에 있다고 해서 내가 손 못 쓸 것 같은가?”

방황하던 태서가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그의 이십 대를 다 바친 회사를, 강신재 회장은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강신재 회장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보기에 그저 하찮아서 그냥 둘 뿐, 마음먹는다면 얼마든지 짓밟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태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만하면 능력은 충분히 입증한 셈이고. 전자 본부장 자리 준비하라고 하마.”

“…….”

“그러려면 먼저 그 손을 놔야겠지.”

강신재 회장이 일어섰다. 자기가 큰 결단을 내렸으니 더는 얘기할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 같잖게도 당돌하게 굴던 재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같잖아서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뜻이었다.

태서는 저를 지나치는 강신재 회장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참아 내며 아까 저를 적셨던 차의 얼룩이 남은 가죽 소파를 응시할 뿐이었다.


“강선 그룹이든, 내 곁이든. 강 본부장이 그토록 원하던 것을 줄 테니 준비하라는 말이야. 결혼 문제는 좀 지저분하게 됐지만, 정치하는 집안으로 알아봐 주마. 조용해질 시간이 필요하니, 내년 하반기쯤 하는 게 좋겠어.”

조유리라고 했나, 그 쓸모없는 아이가.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혀를 찬 강신재가 서재로 향했다. 태서는 재인의 손을 더 꽉 잡아 제게 당겼다.

귀를 씻어 내고 싶었다. 쥐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면 강신재의 아들로 인정받게 해 주겠다는 말이, 본인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강선 그룹을 태서에게 물려주겠다는 그 말이 역겨웠다.

제 속을, 제 분노의 깊이를 전혀 헤아리려 하지 않는 부친의 작태가 환멸스러웠다.


 


“말씀하신 그 둘, 모두 다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어깨를 뻣뻣하게 굳힌 강신재가 뒤를 돌아보았다. 강태서는 강신재 회장으로부터 뒤돌아서 있는 상태였다. 오직 윤재인만이 눈을 크게 뜬 채 맹랑한 시선으로 강신재 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제게 그러셨죠. 제가 태어난 이후로 줄곧 지옥에 살고 계신다고.”

강신재는 태서의 너른 어깨와 등을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그 두 가지가 모두 회장님이 계신 지옥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킨다는 걸 뻔히 아는데, 제가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 미끼를 물겠습니까?”

천천히 저를 향해 돌아서는 태서의 모습에 강신재가 인상을 찡그렸다.


“탐이 나야 미끼인데, 어쩌죠? 전혀 탐나질 않으니. 그리고 회장님 아들 자리, 이제는 제가 버렸다고 말씀드렸는데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

“술을 좀 줄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평생을 다 바쳐 공들인 회사가 남의 손에 산산조각 나는 꼴을 요양원 침대에 누워 보지 않으시려면요.”

“너, 이……!”

태서가 반듯한 얼굴을 들어 강신재의 핏발 선 눈을 응시했다. 늘 강신재 회장의 분노 앞에 몸이 움츠러들던 그였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할머님께 들었습니다. 회장님께서 왜 지옥에 살고 계시는지.”

“…….”

“덕분에 배웠습니다. 평생 후회할 선택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요.”

태서는 재인의 손을 끌어당겨 그녀를 제 뒤로 숨겼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욕심을 부린 건 회장님 본인이셨습니다. 회사를 선택해 놓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방적 희생과 이해를 강요한 것도 본인이셨구요.”

“…….”

“나를 두고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겠다면서 이해해 달라니, 하……. 그게 무슨…….”

개떡 같은 말이야.

작게 중얼거린 태서가 웃음을 참지 못해 피식거릴 때였다. 격노한 강신재가 눈을 부릅뜨고 성큼 다가섰다. 하지만 태서는 피하기는커녕 고개를 기울이며 강신재를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저를 때린다고 분이 풀리시겠습니까?”

슬며시 내리뜬 눈으로 강신재 회장을 노려보는 태서의 눈에 쓰라린 조소가 일렁였다.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뱉으려는 그의 얼굴은 홀가분해 보이기도, 조금은 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탓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

“사랑하는 여자가 회장님을 믿지 못했던 것도, 그 여자가 죽은 것도, 제 어머니가 죽은 것도, 그리고, 제가 태어난 것도.”

“너, 너…….”

“모두 다. 회장님 탓입니다.”

“흐, 흡……!”

“그 지옥, 회장님이 만드신 거란 말입니다.”

짓씹듯 내뱉은 태서의 말에 강신재 회장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저는 그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태서가 소파의 등받이 부분을 잡아 몸을 기대는 강신재 회장을 끝까지 노려보았다.


“평생 후회할 선택,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욕심 따위 부리지 않을 겁니다. 저는 제게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 알고 있습니다.”

“…….”

“사랑한다는 이유로 우습지도 않은 이해를 강요할 생각도 없고요. 그딴 게 사랑이기는 합니까? 제가 배운 사랑은 안 그렇던데요.”

강신재 회장이 훅, 숨을 몰아쉬는 것과 동시에 가슴 부근을 움켜쥐었다. 멀리서 비서가 달려와 그를 부축했지만, 강신재는 비서의 손길을 뿌리치며 태서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크, 읏…….”

아니라고 여겼다. 사랑하던 연희의 죽음에 제 탓은 없어야 했다.

그래서 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부모를 탓하고, 실수로 태어난 아이를 탓했다. 평생을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왔다. 원망과 분노가 그를 살게 한 것이다.

회사를 물려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을 용기가 젊은 날의 강신재에게는 없었다.

평생 강선 그룹이 제 것이 될 거라 여기며 살아왔던 그였다. 모든 것을 가지며 살아왔기에, 사랑 역시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오만했다. 하지만 강신재는 제 젊은 날의 선택을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덮어 둔 채 외면해 온 진실을 마주하게 만든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강태서라는 게 끔찍했다. 평생 저주해 온 아이의 비난 앞에 선명해진 과거를 되짚는 강신재 회장이 탁한 신음을 흘렸다.


“나는, 당신과 달라.”

“…….”

“짓밟으시려면 짓밟으시고, 빼앗으려면 빼앗으십시오. 저는 최선을 다해서 저와 제 사람들의 행복을 지켜 낼 테니까.”

“으흐, 흐…….”

“그 지옥에 저를 끌고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 건 제가 아닙니다.”

태서가 가쁜 숨을 힘겹게 내쉬는 강신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마지막이라는 듯, 슬쩍 고개를 숙였다.


“사직서는 비서실에 전달해 두었습니다.”

“…….”

“이 말만큼은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실수로라도,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빙긋 웃은 태서가 재인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향했다. 비통한 표정으로 현관에 서 있는 임홍진 관장을 발견하고는 입을 꾹 다문 그가 다시 한번 고개 숙였다.


“그래. 궁금해할 것도, 뒤돌아볼 것도 없다.”

“네.”

마지막까지 부자간의 화해를 바랐지만, 일이 어그러진 것을 알아챈 조모는 착잡해 보였다. 하지만 태서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인정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태서가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뒤에서 커다란 무언가가 쓰러져 바닥을 찧는 소리와 함께 비서의 짧은 외침이 들려왔다.


“회장님!”

“……신재야!”

잠시 굳어 있던 태서는 다급하게 신발을 벗고 현관으로 올라서는 임홍진 관장을 돌아보지 않았다. 재인의 손을 잡은 채 연류동 본가의 현관문을 나서는 그를, 아무도 막아서거나 부르지 않았다.

* * *



“으응……. 이 밤에 어디에 가려고요?”

“급하게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더 자요.”

“뭐야. 사직서도 냈다면서…….”

쿡쿡, 웃음을 터뜨린 태서를 재인이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재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넘기는 중이었다.

연류동에서 나온 후, 태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집에 도착한 후에야 무너지듯 그녀의 품에 안겨 들었다.

눈물을 보인다거나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재인의 품에 안겨서 저를 쓰다듬는 재인의 손길을 느끼다 잠들었다.

재인 역시 태서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그런데 밤 열두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 태서는 언제 깼는지 나갈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어디 가는데…….”

“비밀.”

“비밀 있는 거 싫어.”

“음…….”

조금 망설이던 태서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거 압니까?”

“뭘요?”

“나 이제 정말 백수 된 거.”

“아……?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 어디 면접이라도 보러 간다고 말하려는 거예요?”

재인이 졸린 눈을 들어 새초롬히 뜨자 태서가 웃으며 고개 저었다.


“윤재인.”

“응.”

“우리, 시카고에 갈까?”

“응……?”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몰라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의 이마에 태서가 지그시 입술을 붙여 다시 눕혔다.
 

 


“병원에 다녀올 겁니다.”

“병원에? 갑자기 왜요? 누가 아파요……?”

잠이 싹 달아난 재인의 놀라 커다래진 눈에 순식간에 걱정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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