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전혀 다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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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전혀 다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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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전혀 다른 사람
2023.08.01.
재인이 볼 수 있는 거라고는 강신재 회장의 손뿐이었다.
태서의 커다란 몸이 가린 탓에 찻잔을 틀어쥔 강신재 회장의 커다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만 겨우 본 것이다. 그걸 보는 재인의 몸도 부들부들 떨려 왔다.
놀랍고 두렵기도 했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저를 가지고 장사하려던 조대훈을 마주했을 때보다도 더 격하게 차오른 분노에 그녀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재인은 조금 전, 강신재 회장이 찻잔을 들어 태서를 내려치려는 것을 보았다.
아들을 향해 손을 뻗는 강신재 회장의 얼굴에 죄책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질 뻔한 폭력의 잔상에 재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태서의 말로 미루어 볼 때, 강신재 회장이 폭력을 행사한 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그게 너무나도 화가 났다.
이렇게나 소중한 사람을 왜. 도대체 왜. 당신이 뭐라고.
“당신에게 아들이 없듯이, 이제는 제게도 아버지가 없으니까요.”
“…….”
“반갑지 않으십니까? 지긋지긋하게 굴던 게 떨어져 나갔다는데.”
재인은 저를 막아선 채 담담히 말하는 태서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었다. 쓰게 웃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심장이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재인은 한 발 옆으로 비켜섰다. 태서의 곁에 나란히 서서 태서를 오래도록 괴롭혀 온 남자를 마주했다.
처음 봤을 땐 TV에서 볼 때보다도 더 태서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30년 후의 태서가 이렇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원망으로 가득 찬 눈빛, 고집과 아집이 그대로 드러나는 입매가 태서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인의 움직임을 알아챈 태서가 몸을 틀어 다시 그녀를 가리려 했지만, 재인이 먼저 태서의 팔을 잡아 그를 저지했다. 그가 괜찮은지 잠시 확인한 재인이 결연한 눈빛으로 강신재 회장을 응시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강신재 회장은 어깨를 씨근덕거리면서 재인을 비딱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쌓인 화를 폭발시키려다 저지당한 상황이 노여웠던 모양이다.
“태서 씨는 찻물 좀 닦아야겠어요.”
“아니, 괜찮습니다.”
“회장님이랑 얘기하고 싶어서요. 5분만 시간을 줄래요?”
태서는 절대 안 된다는 눈으로 고개 저었지만, 재인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저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 하는 재인이 당돌하게 느껴졌는지, 강신재 회장이 비스듬히 웃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래, 강 본부장보다는 윤재인 씨랑 얘기를 좀 더 하는 게 좋겠어. 어떻게, 자리도 지저분해졌는데 내 서재로 갈까요?”
“아뇨. 그냥 여기서 얘기하겠습니다.”
쏟아진 찻물 탓에 축축하게 젖은 소파 따위는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지금 재인이 신경 쓰는 것은 독한 술이 섞인 차에 젖어 눈이 붉어진,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마음에 상처 입었을 게 분명한 태서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저를 지켜 주었던 것처럼, 재인은 지금 그를 지켜야 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하지만…….”
“어서. 눈에 들어가지 않게 씻어 내요. 응? 나는 괜찮아.”
재인이 억지로 태서를 밀어냈다. 강신재 회장의 폭력이 강태서만을 향한다는 사실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재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태서를 두고 뒤돌았다.
“앉으세요.”
“하…….”
먼저 앉기를 권한 재인이 우스웠는지, 강신재 회장이 헛웃음을 흘리며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재인 역시 자리에 앉아 태서가 멀어지기를 잠시 기다렸다. 그가 1층의 손님용 욕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재인이 입을 열었다.
“제게 원하시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음.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저를 함께 부르셨을 리 없으니까요.”
물끄러미 재인을 바라보던 강신재 회장이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원하는 게 있지. 그리고 윤재인 양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고.”
“말씀해 주세요.”
“윤재인 씨는 생각보다도 더 똑똑한 사람이군요.”
강신재가 헛기침하며 시선을 들자 주방 쪽에서 비서가 다급히 다가와 물 잔을 내밀었다. 목을 한 모금 축인 그는 조금 평정을 찾은 모양새였다.
“지금은 서로가 특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서로에게 서로가 전부라는 건, 환상이야. 누구에게나 한 번은 찾아오는 신기루 같은 것일 뿐이지.”
의외의 말을 꺼내는 강신재 회장을, 재인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사실 난 강 본부장이 누구를 만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를 만나든, 행복하지만 않으면 돼.”
“…….”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싶은 얼굴인데.”
“네.”
“그 질문에 답을 하자면……. 나는 강 본부장을 내 아들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속을 들쑤시는 답변에도 재인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강 본부장과 나는 악연이야. 함께할 수 없는데도 저 아이는 함께하기를 바라지.”
물 한 모금을 더 마신 강신재 회장은 눈을 감았다. 취기에 어지러운 듯, 다시 소파 깊숙하게 몸을 묻었다. 그리고 그가 꺼낸 이야기는, 30여 년 전의 이야기였다.
태서가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 태서가 태어나던 날 누가 죽었는지, 그 사람이 왜 죽게 되었는지를 옛 이야기하듯 털어놓은 그가 슬며시 눈을 들었다.
“그러니 내가 저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나? 비극의 씨앗인 강 본부장을 말이야. 똑똑한 윤재인 씨가 대답해 봅시다.”
“저는…….”
“아, 그보다 먼저. 강 본부장 어미가 자살한 것은 알고 있나?”
“……네.”
“모두가 제 어미의 죽음을 목격한 강 본부장을 걱정했지만, 아니. 나는 강 본부장이 제 어미가 죽도록 방치했다고 생각하고 있네.”
강신재 회장의 말에 재인의 눈이 커졌다. 강신재 회장의 뒤틀리고 비틀린 생각이 뻗어 나간 끝에 도달한 결론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태서 씨는 어린아이였습니다.”
“지나치게 영리한 아이였지. 성적표를 들고 내 눈치를 살살 보던 아이가 제 어미가 평소랑 다르다는 걸 몰랐을까? 나에게 시위하듯 웨딩드레스를 입고 손목을 그은 어미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그 이야기를 왜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태서 씨 어머님께서 자살하신 건.”
“그래. 나 때문이지.”
재인의 말허리를 자른 강신재의 눈빛은 어느새 날카로워져 있었다.
“다들 강 본부장이 나를 꼭 닮았다고 하던데.”
“…….”
“저 아이 역시 누군가를 말라 죽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지. 그게 윤재인 씨가 될 수도 있고. 지금이야 잘해 주겠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
그러니 태서를 떠나라는 뜻이었다. 재인은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지금 요가 수련하면서 쌓은 극강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내 어머니께서는 너무 점잖으셨지. 내 사람을 만나 한 말이 고작 떠나 달라고 부탁한 거라니. 남녀가 서로에게 미쳐 있는데, 부탁이 먹힐 리가 있나.”
“…….”
“평생 손에 쥘 수도 없는 큰돈을 건네면 어떨까, 생각도 했지만. 재인 양을 만나고 보니 돈에 움직일 사람 같지는 않고.”
“…….”
“마음 의지할 가족이라고는 없고, 자매처럼 지내는 친구가 하나 있다던데. 윤재인 씨가 일하는 요가원을 운영하는 서상화 씨라고. 맞나?”
재인은 허벅지 위에 내려놓은 두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풀어내려 노력하며 눈 떴다.
“네, 맞습니다.”
“그 친구 어머니께서도 윤재인 씨를 친딸처럼 아껴 주셨다고?”
“네.”
“귀한 인연이군요. 그런 소중한 사람들이 윤재인 씨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된다면 윤재인 씨도 아주 속상하겠어. 마음 터놓고 지내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윤재인 씨를 원망하게 되는 상황은 원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
태서를 떠나지 않으면 너의 소중한 사람들이 너를 원망하게 될 거라는, 협박이었다.
막대한 부는 곧 막대한 권력이다. 강신재 회장이 상화나 상화의 집을 망하게 하려고 마음먹는다면,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이 분명했다.
재인은 화를 삭이느라 꾹꾹 씹던 입술 안쪽의 연한 살을 뱉어 냈다.
참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태서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은 뭐든 다 해도 된다고 했다. 재인은 이제, 강신재 회장으로부터 들어야 할 말은 다 들었다고 결론 내렸다.
“저는, 모두에게 폭력적인 것보다, 한 사람에게만 폭력적인 것이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
부디, 이 떨림을 분노라 여겨 주기를. 재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저는, 모두에게 폭력적인 것보다, 한 사람에게만 폭력적인 것이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뭐……?”
“회장님이 그러세요.”
“…….”
“태서 씨는 회장님을 닮지도 않았고요.”
젖은 머리를 닦아 내고, 말끔히 세수한 태서는 찻물이 번진 슈트 재킷을 벗어 든 채로 욕실에서 급히 나왔다.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그의 귀에 차갑게 꽂히는 재인의 목소리에 태서가 놀란 눈을 들었다.
“제가 아는 태서 씨는 다정하고 상냥하고 따뜻합니다. 배려할 줄 알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늘 선택권을 주는 사람이에요. 제가 오늘 겪은 회장님과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하…….”
재인의 당돌함을 하찮게 여긴 강신재 회장이 실소했지만, 재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태서는 숨죽인 채 맑게 빛나는 재인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태서 씨 어머니가 죽도록 방치하신 건 고작 열 살짜리 어린아이가 아닌, 회장님이시잖아요.”
“…….”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태서 씨 역시, 보호해 주지 않으셨구요.”
“…….”
“솔직히 말씀드리면, 회장님께서 사랑하시던 분의 죽음을 왜 태서 씨 탓이라고 여기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서 씨는 태어난 것뿐인데요.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비극의 시작은 태서 씨가 태어나기 이전에 시작된 것, 아닌가요?”
“……윤재인 씨, 이렇게 생각 없이 구는 건 하나뿐인 친구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기 때문인가?”
“네. 회장님께서 제 친구와 그 친구의 가족을 어떻게 하시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말한 재인이 뒤쪽에 선 태서를 알아챘는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저를 위해 강신재 회장에게 맞서는 재인을 울컥거리는 마음으로 바라보던 태서는 저와 눈 마주치자 미소 지어 보이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순간,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싶었다.
“알고 계신 것처럼, 다행히도 제가 소중히 여기는 친구가 하나뿐이어서요.”
재인의 대답이 의아했는지, 강신재 회장의 고개가 슬쩍 기울었다.
“그 친구나, 그 친구의 집이 망하더라도 제가 책임질 수 있습니다. 그 정도 돈은 있습니다.”
“…….”
“죄송하지만, 저는 회장님의 협박이 겁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태서 씨를 믿고 있으니까요. 태서 씨 역시 저를 믿고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저는, 회장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지 않을 겁니다. 태서 씨를 혼자 두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오늘 회장님을 만나 뵙고, 태서 씨에게 더 지독하게 달라붙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
“그리고.”
재인이 일어섰다. 태서를 향해 돌아선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제가 제 친구의 원망을 사게 될 것을 걱정하셨지만, 제가 사귀고 있는 사람이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
“그렇죠, 태서 씨?”
태서는 제 앞에서 빛나는 한 사람을 향해 홀린 듯 발걸음을 뗐다. 지금 이 순간, 윤재인의 발등에 입을 맞춰야 마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