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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참지 않아도 돼 (113/123)


#113. 참지 않아도 돼
2023.07.28.



“유혹하려고 온 줄 알았지. 일부러 씻자마자 내 드레스 룸까지.”

“넥타이, 내가 매 주고 싶어서 갔던 거라니까.”

재인이 입술을 삐죽 내밀자 태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왜 다시 풀었습니까?”

“……연습을 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엉망으로 매 줘도 안 풀고 다닐 건데?”

“그럴 것 같아서 풀었어요.”

킥킥 웃은 재인이 저를 향해 내민 태서의 오른손을 발견하고는 주저 없이 맞잡았다. 그의 손은 평소보다도 조금 찬 기운이 돌았다.

어느덧 차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들어섰다. 가파르게 경사진 오르막길에 오르면 한 폭의 병풍처럼 북악산이 보이는, 연류동 고급 주택가의 초입에서부터 두 사람은 모두 말이 없었다.

오르막길 끝자락에 다다른 차는 높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집 앞에 섰다. 집 안에 연결된 주차장이 있음에도, 태서는 들어가기 싫은 듯 집 밖에 차를 댄 것이다.

지난번 임홍진 관장과 함께 점심을 먹을 때 와 보기는 했지만, 다시 와도 이 집이 주는 압도감에 적응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화려하기로 유명한 대훈의 집에 살았던 그녀였지만, 태서의 본가는 그 정도가 달랐다. 담 너머로 슬쩍 보이는 기와지붕이 마치 북악산을 등에 인 것처럼 웅장한 느낌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렸다. 하지만 태서는 발을 떼지 않았다.


“재인.”

박물관 같은 본가에 들어서기 전, 그가 재인을 불렀다. 재인은 제 손을 꼭 잡은 태서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경직되어 있었다.


“혹시, 안에서 무슨 말을 듣더라도…….”

“태서 씨.”

“응.”

태서는 제 친부라는 인간이 제게 하듯 재인에게 쏟아 낼 냉대를 걱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재인은 그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그가 무슨 사고를 쳤는지, 재인도 알고 있었다. 오후에 장 실장이 보내온 주간지를 태서의 앞에서 읽었다.

전 세계인 앞에서 재인에게 공개 고백한 남자는 멋쩍어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고, 재인은 그가 쳤다는 사고의 규모에 놀라 푸스스 웃고 말았다.


“내가 태서 씨의 그녀다?”


“왜요. 음……. 기분 상했습니까?”


“그러면 태서 씨는요?”


“나?”


“다음에 또 인터뷰할 일이 있으면, 그때는 강태서가 누구 남자인지를 확실하게 말해 줄래요?”

 
당당히 그의 무릎에 앉으며 눈을 내리깐 재인은 마치 오만한 왕 같았다. 그 아름다움에 태서가 황홀한 듯 미소 지으며 고개 끄덕였다.


“아, 그건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나는 아예 내 성을 바꾸는 것도 좋습니다.”


“성을 바꿔요?”


“Taeseo of JaneYoon”으로 할까?

 
강태서가 아닌 윤재인의태서로, 아예 성을 “윤재인의”로 바꾸겠다는 남자의 느물거림에 재인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애정을 담뿍 담아 그와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추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잘 웃던 남자가 지금은 웃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재인은 그게 속상했다.


“나 봐요.”

메마른 입술을 슬쩍 적신 그가 재인을 향해 돌아섰다. 재인은 가만히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안에서 무슨 말을 들어도 나는 상처 받지 않아요. 왜냐하면, 회장님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니까.”

“…….”

“하지만 태서 씨가 상처 받을 건 걱정 돼.”

“…….”

“하나만 물어볼게요.”

재인은 저를 내려다보는 태서를 분명히 응시하며 심호흡했다.


“나, 참지 않아도 돼요?”

“……응?”

“안에 들어가서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해도 돼?”

이런 질문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태서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재인은 채근하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잡은 손은 그 어느 때보다도 꼭 쥔 채였다.


“응.”

핏기 없어 더더욱 조각상 같던 그의 얼굴에 드디어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돼.”

소중하다는 듯 제 뺨을 감싸는 남자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다 돼. 윤재인은.”

재인은 그의 긴장을 모르는 척하며 미소 지어 보였다. 그가 저를 지켰으니, 이제 그녀의 차례였다.

* * *

임홍진 관장이 일어섰다. 서재 안을 몇 걸음 서성이다 앉고, 그러다 시계를 보고는 다시 일어섰다. 그러기를 벌써 여러 번이었다.


“아직도 얘기 중인 게야?”

“예. 아직 본채에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

태서와 재인이 강신재가 머무는 본채에 들어선 지 한 시간이나 지났다. 비서의 말로는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는다며, 걱정을 내려놓으라 했다.

하지만 임 관장은 그래서 더 걱정이 컸다. 그녀가 아는 아들 강신재는 독을 바른 바늘 같은 말로 조용히 태서를 찌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때마다 아프다 소리 한번 못 지르고 자란 아이였다. 괜찮다 말하지만, 고통은 참아 내는 것일 뿐이다. 여러 번 당한다고 해서 면역이 생길 리 없다.

다 자란 아들을 다그치는 일은 아무 소용 없었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 태서를 감싼 적도 있지만, 그럴수록 손자를 향하는 아들의 눈빛은 더 차가워지기만 했다.

늙어 간다는 것은 순해진다는 것이다. 이만큼 사는 동안 임홍진 관장이 깨달은 바였다. 그래서 이제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아들이 마음을 달리하기를 바랐다. 저만큼이나 잘 자란 태서를 받아들이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강신재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후로 제 주변에 담을 쌓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담은 높아져만 갔다.

이제는 그 누구도 함부로 그 담을 넘어갈 수 없다. 만약 담이 무너지면 담 안쪽에 있는 강신재든, 담 밖에 있는 사람이든, 누구든 다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흐음…….”

주먹을 말아 쥔 채 고심하던 임 관장이 마침내 일어섰다. 마음을 먹은 듯, 서재를 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에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부자를 이어 주고 싶었던 것은 제 욕심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죽기 전, 어리석고 미련한 아들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들이 하는 짓을 보니 안 될 일이다. 아들은 평생 제가 쌓아 올린 담 안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 태서라도 살게 해야지. 암.”

죽을 날이 더 가까운 마당에 두려워할 게 뭐가 있으랴. 어차피 그녀가 태서의 편에 선 것을 아들인 강 회장도 알고 있을 터였다.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질러 본채의 문을 연 임 관장이 막 신발을 벗을 때였다.


“아뇨. 두렵지 않습니다.”

임홍진 관장의 귀를 사로잡는 차분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 * *

태서는 제 손을 꼭 잡은 재인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집에 들어선 이후로 단 한 번도 태서의 손을 놓지 않은 작은 손이 주는 위안은 생각보다도 더 컸다.


“그래. 미국에서 꽤 그럴듯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지?”

맞잡은 손을 바라본 강신재 회장이 피식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여느 때처럼 독한 브랜디 향이 풍기는 홍차였다.

불러 놓고 한참이나 말도 없이 차만 마시더니, 마침내 꺼낸 이야기는 태서가 이끌고 있는 컨설팅 회사 E&K에 관한 것이었다.


“꽤 오래전부터 준비해서 이끌어 온 모양이던데.”

“…….”

“내 눈을 속이려고 한량처럼 굴며 대학과 대학원 졸업을 미뤘을 테고. 그러는 사이 사업에 손댄 모양이구나.”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강신재가 태서를 빤히 바라보았다. 태서는 부친의 얼음송곳 같은 시선 앞에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물러서지 않았다.


“음침하게.”

“…….”

“그런 부분까지 네 어미를 닮았어.”

“어머니를 기억하고 계시는 줄 몰랐습니다.”

“…….”

“기뻐하실 겁니다. 남편의 마음 한 자락이라도 가져 보는 것이 소원인 분이셨으니까요.”

숨이 막히는 시선의 대립이 이어졌다. 오랜 침묵을 깬 것은 강신재였다.


“윤재인 씨.”

그의 눈이 태서의 곁에 있던 재인을 향했다. 여태껏 무시했으면서, 이제 와 새삼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에는 경멸이 짙게 깔려 있었다.


“네.”

재인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신재의 부름에 응했다. 태서는 입술을 말아 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떤 식으로든, 강신재의 차가운 시선이 재인을 향하는 것이 불편했다.


“확실히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닮았군요. 윤재인 씨 어머니가 무척이나 미인이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번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도 더 생기 넘치고 우아한 분이셨지.”

“……네.”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쭉 시카고에 머물면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고?”

“네.”

이미 윤재인에 관한 조사는 다 마쳤을 터였다. 태서는 제 아버지란 작자가 재인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지를 가늠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홀로 귀하게 키우셨을 텐데, 사랑받고 자란 남자를 만나지 그랬나?”

“…….”

“겉보기에나 멀쩡한 하자품을 주울 게 아니라. 아, 식어서 못 마시겠군.”

말 중간에 찻잔을 입에 대던 신재가 미간을 찡그리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갑자기 자리를 빙 돌아 태서의 앞으로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놀란 재인이 눈을 크게 뜨고 강신재 회장을 바라보았다.

태서는 강신재 회장에게서 늘 옅게 풍기던 술 냄새가 오늘은 유독 짙다는 것을 알아챘다. 친부의 곁에 머문 시간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가 이렇게 취한 때면.

아, 오랜만인데.

태서는 이제 곧 제게 가해질 상황을 내다보고는 쓰게 웃었다.


“이딴 것 말이야. 내가 망가뜨렸거든.”

찻잔 아래쪽에 도톰하게 붙은 굽으로 태서를 가리키던 그가 태서의 머리를 내려치듯 손을 휘두른 것은 순간이었다.


“태서 씨!”

놀란 재인이 소리 지르며 일어섰을 때, 찻잔을 든 강신재의 손목은 태서의 커다란 손에 붙들려 있었다. 쏟아진 찻물이 태서의 머리카락을 적시고 뚝뚝 흘러내렸다.


“마지막으로 맞았던 게 7년 전입니다.”

“…….”

“모르시는 것 같은데.”

짓씹듯 내뱉은 태서가 천천히 일어섰다. 여전히 저를 후려치려던 강신재의 손목은 꽉 붙든 채였다. 태서는 제 바로 앞에 선 강신재 회장을 노려보았다. 태산 같던 강 회장은 이제 태서보다 작았다.


“그때도 맞아 드렸던 겁니다.”

“…….”

“더는 맞아 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치밀어 오른 분노로 눈에 불이 일 것만 같은 강신재의 팔이 가늘게 떨렸다.

태서는 쥐고 있던 그의 손목을 뿌리치듯 놓고 어깨를 쭉 폈다. 그리고 재인을 보호하듯이 강신재의 시선이 닿지 않도록 그녀를 가리고 섰다.


“당신에게 아들이 없듯이, 이제는 제게도 아버지가 없으니까요.”

“…….”

“반갑지 않으십니까? 지긋지긋하게 굴던 게 떨어져 나갔다는데.”

눈을 치뜬 강신재 회장을 향해 태서가 입꼬리를 끌어당겨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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