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깜짝 놀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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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깜짝 놀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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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깜짝 놀랄 일
2023.07.21.
그때부터였다. 쿵쿵, 쿵쿵, 점차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이 귓가로 옮겨붙기라도 한 모양이다. 제 심장 박동에 압도된 재인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 그녀에게 태서가 슬쩍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려 보였다.
“혹시 비혼 주의입니까?”
“그건 아니에요. 나도 태서 씨처럼 살면서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연애도 처음이니까……. 나랑은 상관없는 단어라고 여겼던 것 같아.”
“또 공통점을 발견했네.”
태서가 씨익 웃고는 제 몫의 스콘을 들었다.
“사실 난 비혼 주의자였습니다.”
“음…….”
하긴, 부모님의 결혼 생활이 어땠는지를 지켜봤으니 결혼에 대해 회의적일 만도 했다.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 재인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던 태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숨을 내뱉었다.
“재인 씨 만난 후로 나도 모르게 가끔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계속 이렇게 함께 지내면 어떨까, 하고. 함께하지 못한 날들이 아쉬웠습니다. 함께하지 못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고, 그렇게 재인 씨 늙어 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
“그 모습, 나만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장 실장이 나 같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 인류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고 알려 줬습니다.”
“음…….”
“그러니까 재인 씨는 오늘부터 결혼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상큼하게 결론 내린 태서의 말투는 마치 오늘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 생각해 보자는 것처럼 들렸다. 그만큼 담백한 태도였다.
“진지하게. 자주. 틈나는 대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인의 찻잔에 밀크 티를 따라 주는 그의 담백함이 옮겨 온 걸까. 어느새 두근거리던 가슴은 진정되었다. 재인은 그가 따라 놓은 밀크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강태서. 그를 알게 된 이후로 자꾸만 기대하게 된다. 처음 그가 동거를 제안해 왔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빠르게 그에게 푹 빠지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때도 이미 빠졌다고 생각했었다. 다만 더 깊이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재인도 태서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원할 땐 언제든 보고 싶고 닿고 싶었다. 그가 저만 바라봤으면 좋겠고, 근사한 미소를, 키스를 바랄 때의 얼굴을 저에게만 보여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봤는데, 지금 이거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응?”
사과를 한입 크기로 잘라 재인의 앞에 내려놓던 태서의 고개가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
“만약 태서 씨가 정말 그 발표문대로 5월에 조유리랑 결혼한다면.”
“끔찍한 소리.”
“나는 태서 씨 결혼하는 예식장에 새하얀 드레스 입고 가서 깽판 놓을 거야.”
“…….”
“이 결혼 무효라고 외치고 태서 씨 손 잡고 나와야지.”
조금은 멍해 보이는 태서에게 재인이 턱을 조금 들어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여 주었다.
“내가 못 할 것 같아요?”
“아니. 꼭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태서의 즉답에 풉, 웃음을 터뜨리는 재인을 향해 태서가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하지만 그럴 일 절대 없습니다. 아무튼, 기사가 나더라도 신경 쓰지 말아요.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해서 미안해.”
“태서 씨가 불쾌하죠. 사람들 입에 조유리랑 묶여서 오르내리게 될 텐데…….”
태서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재인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재인 역시 위로하듯 그를 다독였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재인은 제 정수리에 입 맞추는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에 반짝, 눈 떴다.
“사실, 오늘 재인 씨가 깜짝 놀랄 일이 하나 있을 건데.”
“응? 태서 씨 약혼 기사 나는 거 말고요?”
“응. 나 좋다는 윤재인 믿고 좀 까불었습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재인을 향해 태서가 조금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일을 저질렀다고 고백하는 남자의 미소가 근사하면 어쩌자는 건지, 재인은 푸스스, 마주 웃어 버렸다.
“좋아요. 봐줄게요.”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묻지도 않고?”
“뭐든, 화가 안 날 것 같아서.”
“…….”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네요.”
재인의 꾸밈없는 대답에 잠시 감동한 눈으로 재인을 내려다보던 태서가 재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선을 따라 내려가던 입맞춤이 점점 짙어질 무렵, 깊은 한숨과 함께 그가 재인을 으스러져라, 안았다.
“하……. 회사 가지 말까?”
“응.”
“정말?”
“가지 마요. 어차피 회장님 눈 밖에 난 거. 열심히 일해도 알아주지도 않는다면서.”
“장 실장 말로는, 여자들은 해야 할 일을 해 내는 남자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한다던데?”
“태서 씨 그런 모습은 이미 많이 봐 와서요. 지금 나는 내 곁에 있는 태서 씨가 더 멋있어. 그러니까 땡땡이쳐요.”
“……매일 새롭게 반하는 거 알고 있습니까?”
재인이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팔을 뻗었다. 태서를 안아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간지러운 키스에 답하는 그녀의 뺨이 복숭아처럼 달콤하게 물들었다.
“근데, 진짜 출근 안 해도 돼요?”
“자르려면 자르라지. 사장 애인 둬서 그런가, 백수 되는 게 하나도 안 두렵네요.”
“사장은 상화라니까.”
“아무튼.”
급한 건 연락이 올 터다. 어제 반차 쓰고도 출근해서 일한 마당에 오늘은 꾀병이라도 부려야겠다. 어차피 출근해 봤자 오늘 있을 여러 이슈로 인해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일도 제대로 못 할 게 뻔했다.
그렇게 생각한 태서가 장 실장에게 메시지로 병가를 통보하고는 핸드폰을 멀찍이 슥, 밀어냈다. 그러고는.
“앗!”
자연스럽게 재인을 안아 번쩍 들고 일어섰다. 그가 유일하게 눈치 봐야 할 사람이 출근하지 말라고 했으니 기쁜 마음으로 명령에 따를 생각이었다.
아침도 든든히 먹였겠다, 종일토록 재인과 붙어 있기로 마음먹은 태서가 침실로 향하는 것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유리야, 진짜 축하해. 강선 그룹 사모님이라니……. 나는 너 잘될 줄 알았어.”
“연락이나 받지 그랬어?”
“아, 그게……. 엄마 아빠가 네 연락 받지 말라고…….”
“왜. 집이 망해서 내가 너한테 돈이라도 빌려 달라고 할 줄 알았어?”
“……미안.”
“미안하면 앞으로 잘해.”
“응! 이거, 다른 건 아니고 결혼 축하한다는 의미로…….”
크게 고개 끄덕인 친구가 내민 종이 가방에는 명품 로고가 박혀 있었다. 유리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종이 가방을 슬쩍 벌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뭐야. 지난 시즌 거잖아. 나 이거 있어.”
“어, 그……, 너희 집에 다 압류 딱지 붙었다고 해서…….”
“…….”
싸늘해진 분위기에 눈치를 살피던 친구 하나가 재빠르게 찻잔을 들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애프터눈 티파티는 유리의 결혼 발표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오늘 오전, 강선 그룹 홍보실에서 강태서와 조유리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관련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그러자마자 그동안 유리를 피하고 외면했던 친구들이 앞다퉈 그녀에게 연락해 왔다.
유리는 제게 연락해 온 친구 중에 고르고 골랐다. 그리고 H 호텔 사주의 막내딸이 저를 위해 특별하게 준비했다는 호텔 애프터눈 티파티에 조금 늦게 참석했다.
오랜만에 아침 일찍부터 헤어와 메이크업, 손톱까지 공들이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치 없는 애가 하나 끼어서 말끝마다 사람 심기를 건드린다.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더 기분 나빴다.
유리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손끝으로 종이 가방을 밀어 넘어뜨리자 유리를 불러낸 세 명의 친구들이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재미없다.”
“어, 그래? 그러면, 음, 아!”
심드렁한 유리의 반응에 애가 탄 친구 하나가 저 멀리 들어온 비서를 발견하고는 손을 번쩍 들었다. 그녀의 부름에 비서는 손에 뭔가를 들고 빠르게 다가왔다.
“나왔어?”
“네, 나오자마자 구해 오는 길입니다.”
“이리 줘. 유리야, 이거 볼래? 이거 말이야…….”
그녀가 내민 것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 주간지였다. 주로 유명한 정치인이나 경제인을 표지 모델로 세우곤 했는데, 이번 호 표지 모델은 최근 들어 전 세계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대세 한국 배우였다.
“그게 뭔데?”
“얘 요즘 덕질하잖아. 야. 너 이거 오늘 나오자마자 구해 오라고 한 거야?”
“응. 유리야, 너도 얘 난리인 거 알지? 인터뷰도 했다던데. 유리 너 먼저 볼래?”
“격 떨어지게. 그런 애들은 부르면 오는 거 아니야?”
“아니야. 우리 배우님은 스폰서 따위 필요 없대. 내가 오빠 통해서 소속사 대표한테 그렇게 앓는 소리 했는데 이도 안 들어가더라. 백 퍼센트 실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거야.”
“됐어. 너나 실컷 봐.”
유리는 환희에 차서 표지 사진을 몇 번이나 찍어 댄 후에야 인터뷰 기사를 보기 위해 조심스레 페이지를 넘기는 친구를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
“왜.”
“……이 남자, 강태서 아니야?”
“강태서? 어디, 어디 봐 봐.”
“미친, 개잘생겼…….”
유리는 뜬금없이 등장한 강태서라는 이름에 눈을 치떴다. 머리를 맞댄 채 강태서의 사진과 그의 인터뷰 내용에서 눈을 못 떼는 셋은 어느새 유리의 눈치 보는 것도 잊은 듯했다.
“헐, 강태서, 앞으로의 10년이 기대되는 글로벌 100인 중 한 명으로 뽑혀서 인터뷰한 거래.”
“눈빛 봐. 턱선……. 하, 겁나 섹시해…….”
“근데 왜 강선 그룹 얘기가 없지?”
“강태서가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E&K의 공동 대표 중 한 명이라는데? E&K가 뭐야?”
궁금증을 참지 못한 유리가 눈을 찡그리며 잡지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마치 화보 촬영이라도 한 듯이 주간지 몇 면을 꽉 채운 강태서의 멋진 사진에 눈을 빼앗긴 세 사람은 유리의 손을 무시했다.
“허……?”
“…….”
“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몰라.”
한참이나 시선을 주고받으면서 쑥덕거리던 셋이 주간지를 덮어 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유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는데, 조금 전과는 온도 차이가 있었다.
“아, 나 깜빡했다. 엄마가 오후에 가야 할 곳이 있댔는데.”
“어, 나도. 나도 오늘 시댁에…….”
“나도! 나도 이만 가 봐야겠어. 집에 손님이…….”
갑자기 허둥대며 주섬주섬 짐을 챙겨 드는 친구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훑어보던 유리가 손을 뻗었다. 친구의 손에 들린 주간지를 빼앗듯이 낚아채고는 쯧, 혀를 찼다.
설설 기어도 봐줄까 말까 한데,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뭘까. 뭐가 됐든 지금 유리에게 두려운 것이라고는 없었다.
명실상부 강선의 며느리로 공식적인 발표가 난 지금, 유리는 한동안 그녀를 옭아매던 불안과 반성도 잊은 채였다.
“뭔데 난리들이야?”
“그게, 그게 유리야…….”
“야, 그냥 가자. 유리야, 우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 볼게.”
“그래, 가 봐. 이제 너희는 두 번 다시 내 얼굴 볼 생각 하지 말고.”
친구들이 가든 말든, 주간지에 실린 태서의 인터뷰 기사에 시선을 고정한 유리가 다리를 꼬았다.
아무리 봐도 잘났다. 이런 남자가 남편이 된다니. 강태서가 내 것이라니.
승리감에 취해 절로 번지던 미소는 태서의 인터뷰 기사를 읽을수록 사라져 갔다. 그리고 어느새, 유리는 또다시 손톱을 물어뜯으며 입술을 질근질근 씹고 있었다. 찻잔을 향해 뻗는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