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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결혼해야지 (110/123)


#110. 결혼해야지
2023.07.18.


반가우면서도 미안하고, 그러면서도 고마웠다. 먹먹함에 말문이 막힌 그는 존재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그녀의 곁에 살포시 누웠다. 그리고 등 돌리고 누운 그녀의 머리카락에 조심스레 얼굴을 묻었다.


“윤재인.”

“…….”

“당신이 좋아.”

술기운을 빌려 곤히 잠든 재인에게 고백하는 태서의 눈이 촉촉했다.


“당신이 좋아.”

“…….”

“당신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바라던 아이는 무관심 속에서 방치된 채 자라면서 제 처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저 역시 아버지를 필요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번번이 마음 다치고 상처 입으면서도 매번 친부를 향하는 시선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는 오래도록 붙들고 있던 미련을 마침내 놓기로 했다. 그의 결핍과 공허를 모두 채워 주는 한 사람을 비로소 만났으니.

태서는 종종 윤재인이 숨 쉬는 세상에 제가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히 여겼다. 그녀의 미소가 저를 향하는 것은 기적이었고, 그녀의 살 내음을 독식할 수 있는 세상은 천국이 되었다.


“윤재인.”

“…….”

“재인아.”

악몽을 꾸지 않는 한, 재인은 한번 잠들면 깊이 잠들었다. 잠든 그녀의 말캉한 살을 콕콕 찌르고 입술 새에 물어 지분거리며 지새운 밤이 셀 수도 없었다. 그래서 태서는 마음 놓고 제 하나뿐인 연인을 불렀다.


“내가 너를.”

“…….”

“윤재인을.”

“…….”

“……사랑해.”

마침내 제 입에서 나오고 만 사랑이라는 말에 태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고 참은 끝에 나온 말을 깨닫자마자 눈물이 번진 시야가 흐려졌다. 고작 세 마디 말을 내뱉은 것만으로도 가슴을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토록 외면하던 단어였는데, 그 말이 아니고는 제 감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모자란다. 사랑한다는 말로도 다 전하지 못한 애틋함에 태서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뺨을 비볐다.

그러다 불현듯 꽉 죄어 오는 심장을 느낀 그가 슬그머니 재인의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작고 여린 어깨에 가만히 뺨을 기댄 그의 입술이 살며시 휘었다. 하지만 그린 듯 아름다운 미소와는 별개로 속눈썹은 젖은 채였다.


“사랑해. 사랑해, 윤재인.”

몇 번 더 사랑한다고 되뇐 태서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랑한다는 말이 남긴 파동이 제 상처 난 심장 곳곳을 유영하며 보드랍게 감싸는 것을 눈을 감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 벅찬 행복을 지켜야겠다.

한 문장의 결심이 그의 가슴에 단단히 새겨졌다.

마침내 되찾은 평온에 잠긴 태서의 의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 * *



“세상에, 옷도 안 갈아입고.”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귀여웠다. 서서히 잠에서 깬 태서는 눈 뜨지 않은 채 저를 향하는 잔소리를 음미했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잠깐만……? 그러면 씻지도 않았다는 거잖아?”

“…….”

그러다 제 꼴이 엉망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술을 잔뜩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지도, 씻지도 않았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재인을 안고 잠들어 버린 것이다.


“어휴, 술 냄새.”

꾹 다문 입술에 힘을 준 태서가 슬며시 눈 떴다. 아침 햇살처럼 눈 부신 재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이 바빠서 늦는다더니, 술이나 마시고 다니고.”

“…….”

“어디 말 좀 해 보시죠, 거짓말쟁이 강태서 씨?”

“음…….”

“사람 걱정하고 기다리게 하고.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을 거야. 그렇죠?”

제가 지은 죄를 아는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늘 깔끔함을 유지하던 평소와는 다르게 오늘의 그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면도하기 전의 얼굴을 본 게 처음도 아닌데, 오늘은 이상하게 얼굴도 어딘가 해쓱하게 보였다.


<재인, 밤늦게 미안해요. 태서 집에 잘 들어간 거 맞죠? 태서가 밤 열한 시가 넘어서 술에 취해 왔는데, 여기에서도 또 혼자 술 마시다가 갑자기 가 버렸어요. 그렇게 취한 태서는 처음 봤는데, 혹시 둘이 싸웠어요? 천사 같은 재인, 태서를 용서해 줘요. 태서 성격이 원래 안 좋잖아요. 싸운 게 아니라면 미안해요.>

재인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 뒤에서 저를 안고 잠든 남자의 존재를 확인했다.

웃으며 돌아누웠다가 그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인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밤사이 테드로부터 온 장문의 메시지를 확인한 끝에 태서가 어제 혼자 술을 마셨음을 파악했다.

왜 집으로 바로 오지 않았을까. 혼자서 술을 이렇게나 많이 마신 이유는 뭘까.

처음에는 제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한 남자에게 서운했다. 곱씹을수록 점점 화가 났다. 그런데 그 와중에 집에 돌아와 씻지도 않은 게 분명한 남자가 잘생겨 보여서 우습기도 했다.


“진짜 짝을 만나면 미운 짓을 해도 예뻐 보이는 순간이 와. 눈에 두꺼운 콩깍지가 들러붙은 거야. 그건 떼어 내지도 못해.”

 
상화의 모친 배 여사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을 떠올린 재인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래도 제 눈에 두꺼운 콩깍지가 씐 모양이다. 그래서 이 남자가 뭘 해도 예쁘게 보이나 보다. 누가 봐도 잘생긴 강태서다. 그래서 제 눈에만 특별히 더 어여쁘게 보이는 줄 몰랐다.


“그렇다는 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재인의 입술이 다시 딱 다물렸다. 다시금 배 여사님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게 울려 퍼졌다.


“그건 떼어 내지도 못해.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뭘 어떻게 해. 결혼해야지. 이렇게 된 거, 나중에 뒤늦게 떨어지지만 말아라, 하고 같이 살아야 하는 거야.”

 
결혼해야지. 결혼해야지. 결혼해야지.

배 여사님의 말씀 중에 단 한 문장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됐다.

결혼. 재인은 제가 떠올린 어마어마한 단어를 인식하고는 눈을 꾹 감았다. 살면서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단어를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 단어와 연결 지어 떠오르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인 탓이었다.


“……씻고 올게요.”

태서의 낮은 목소리는 죄지은 사람답게 평소보다 힘이 없었다. 재인이 눈 감은 것이 제 꼴이 엉망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뒤늦게 눈 뜬 재인의 눈에 힘없이 욕실로 향하는 태서의 뒷모습이 보였다.


“흠, 음, 씻고 와요. 씻고 와서, 안아 줘요.”

“…….”

“용서를 빌 기회를 줄게.”

뒤돌아본 태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관대한 천사를 향해 미소 지었다.


 

* * *



“오늘, 내 결혼 기사가 나갈 겁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스콘에 잼을 얹던 재인이 멈칫했다. 사실 다른 말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저 아침부터 그녀의 머릿속을 꽉 채운 “결혼”이라는 단어를 그가 콕 짚어 얘기하니 놀란 것이다.

처음에는 태서가 제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재인은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그의 말을 다시 되짚었다. 하지만 말의 뜻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지금 뭐라고……. 결혼 기사?”

“응. 내 결혼 기사가 나갈 거라고 말한 거 맞아요.”

“……태서 씨, 결혼해요? 누구랑?”

큰 눈을 깜빡이며 고개 기울이는 재인을 본 태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늘 당차고 똑똑한 그녀였는데, 가끔 이렇게 멍해지는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이런 모습마저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그때마다 태서는 사진으로 남겨 놓고 싶었다.


“할래요? 결혼.”

“……이거 설마 프러포즈예요?”

“그럴 리가.”

“……뭐야.”

태서가 눈 흘기는 재인을 향해 웃어 보였다. 재인이 피식 웃고는 따끈한 스콘을 한입 크게 물었다.

어제 잔뜩 구워 놓은 것을 아침에 데웠다. 태서는 영국에서 자주 먹던 메뉴라며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해쓱하게 보이던 남자는 씻고 나오니 말쑥해졌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미모로 저를 안고 미안하다, 잘못했다며 빌었다. 어제 머릿속이 복잡해서 혼자 술을 마셨노라 고백했다.

재인은 뭔가를 숨기는 것 같은 그에게 더 묻고 싶었지만, 그는 일단 아침부터 먹자며 재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지금, 둘은 따끈한 스콘과 밀크 티, 사과를 곁들여 근사한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사실은…….”

잠시 머뭇거리던 태서는 어제 퇴근하려다 장 실장의 보고를 듣고 연류동으로 갔던 것, 거기서 친부인 강 회장과 독대한 일, 그 뒤에 홀로 술을 마신 사실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힘든 밤을 보냈을 태서를 걱정하는 재인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갔다.


“결혼 기사 날 거라는 걸 들었을 때 바로 조유리를 떠올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건, 내가 아침부터 조금 정신이 없어서 그래요. 지금도 조금 붕 뜬 상태고.”

“왜 정신이 없습니까?”

“……그런 게 있어요.”

“나는 다 털어놨는데, 재인 씨는 비밀이 있네요.”

“……알려고 하지 말아요.”

재인은 지금도 배 여사가 제 귀에다 대고 “결혼해야지.”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는 말을 죽어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전개였다.


“아무튼, 그래서 곧 기사가 날 겁니다. 미안해요. 그딴 거 신경 쓰게 해서. 그 기사에 실릴 내용, 사실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까 읽지 말아요.”

“……하긴, 내 애인이 다른 여자랑 결혼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겠네요.”

“미안.”

정말 미안한 얼굴이었다. 버터나이프를 내려놓는 태서를 보던 재인이 찻잔을 내려놓고 그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을 살살 매만지며 지그시 마주하는 그녀의 눈에 애정이 가득했다.


“……아침에 잔소리하지 말고 안아 줄 걸 그랬다. 많이 속상했을 텐데.”

“버릇 나빠집니다. 혼날 짓을 했으면 혼나는 게 맞습니다. 다만, 쫓아내지만 말아요.”

제집에서 쫓겨날 걱정하는 태서가 우스웠는지, 재인이 코를 찡긋거리며 아삭, 사과를 베어 물었다.


“그런데 아까 표정 보니까, 프러포즈였으면 바로 퇴짜 놓을 각이던데?”

“당연하죠. 세상에 아침 먹다가 반지도 없이 프러포즈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재인의 비난에 태서가 제법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나는 평생 혼자 살아야겠다.”

“이건 또 협박이에요?”

“윤재인이 싫다는데, 내가 누구랑 결혼합니까.”

“……이런 식으로 떠보는 거 싫어요.”

“떠보는 거 아닙니다. 음……. 솔직히 말하자면.”

태서가 재인의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을 얹어 주며 잠시 머뭇거렸다.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결혼하게 된다면, 상대는 윤재인뿐일 겁니다.”

“이것 봐.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 이런다.”

“왜냐하면, 윤재인 없으면 나는 못 살 것 같거든. 나 죽게 만들지 말아요.”

“…….”

담백하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이 진지했다. 태서가 지금 장난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한 재인의 가슴이 쿵, 높이 치솟았다가 천장을 치고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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