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아무리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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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아무리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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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아무리 그래도
2023.07.14.
“그러면 누나는?”
“재인이가 온들 2층에 올라오지는 않을 거 아냐. 난 2층에 숨어 있을 테니까 재인이 불러서 강태서 씨 옮겨. 아, 신발!”
“……누나, 쌤이 그거 나쁜 말이라고, 하지 말랬어.”
최근 테드는 한국어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제대로 된 한국어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성격 급한 상화는 다른 건 잘 가르쳐도 언어 부분에서만큼은 좋은 선생님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수업을 들으면서 만난 외국인들과 메신저에 단체 방을 만들어 한국어로 대화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한국어 실력은 빠르게 늘었다.
하지만 테드는 거기서 욕과 은어를 잔뜩 배웠다. 그 결과 얼마 전, 한국어 수업 선생님께 된통 혼나고 말았다.
“아니, 그거 아니고 신발! 슈즈! 내 부츠 말이야!”
“아, 오케이.”
“빨리. 강태서 씨 정신 차리기 전에 내 신발부터 숨겨.”
“응, 응.”
다시 1층으로 내려가려던 테드가 홀린 듯 다시 상화를 향해 고개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제가 붙잡아 늘어뜨려 놓은 상화의 티셔츠 목 부분 위, 정확히는 그녀의 빗장뼈 아래 새롭게 새겨 넣은 불그스름한 흔적이었다.
“왜?”
“……누나 진차, 진차 예뻐.”
반쯤 돌아 버린 테드의 눈빛을 알아챈 상화가 몸을 움츠렸지만, 팔다리가 긴 테드가 더 빨랐다. 얼굴부터 가까이 하고는 해사하게 웃어 보인 테드가 은근한 눈빛을 보내왔다.
“너 아무리 그래도 안 돼. 아, 좀!”
“한 번만. 태서 지금 완전히 꽐라야. 키스만 할게, 키스만.”
“야, 내가 키스고 뭐고 상황 보면서 하랬지!”
“상황이 뭐야? 나는 상황 안 봐. 상화만 봐.”
한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마음이 말랑말랑해질 말은 잘도 한다. 꼬리 흔들며 달려드는 대형견처럼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테드가 입술을 들이밀었다.
“한 번만. 응?”
“으이그, 정말.”
“하……. 나는 누나가 으이그, 하면 미취겠어. 또, 또 해 줘. You‘re so hot.”
킥킥, 웃음이 샌 상화가 못 이기는 척 그를 받아 주려는 순간.
쿵,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놀라 동그랗게 눈 뜬 두 사람 모두 얼어붙었다.
* * *
태서는 정원의 돌담에 기대어 선 채 재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술에 취해 몸이 자꾸 기울고 흐트러지는데도 시선만큼은 재인의 방 창문에 꽂혀 있었다.
재인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테드가 지내는 집에서 나와 집으로 왔다. 하지만 평소처럼 자기 방이 있는 1층으로 들어가지 않고, 재인이 머무는 2층 정원 쪽으로 향한 그였다.
재인의 방 창문에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다. 블라인드 너머 불도 꺼진 채였다. 스르륵, 기울던 시선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으로 툭 떨어졌다.
<맨날 나보고 연락 안 받는다고 뭐라고 하더니, 오늘은 태서 씨가 통 연락이 없네요.>
<미안해요. 저녁은 먹었습니까?>
<먹었어요.>
<혼자 먹게 해서 미안. 상화 씨라도 불러서 같이 먹지.>
<상화 바쁜가 보더라. 저녁때 약속이 있대. 그리고 태서 씨가 일부러 늦는 것도 아니잖아. 누구보다 집에 오고 싶은 태서 씨라는 걸 알아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말아요. 오늘도 늦어요? 일이 그렇게 많아서 어떡해.>
<난 괜찮습니다. 오늘도 늦을 것 같으니 먼저 자요.>
아까 연류동에 가기 전, 차 안에서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곱씹는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진짜……. 보고 싶네.”
종일토록 재인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태서는 연류동에서 나온 이후 바로 그녀에게 달려가지 못했다.
집 앞에 다 와서 다시 발을 돌려 테드가 지내는 곳으로 향했다. 거기서 술을 더 마시다가 결국 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해 여기에 선 것이다.
지금도 재인을 지척에 두고 차마 다가가지 못하는 그였다. 지금의 제 모습이 너무나 약하고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윤재인의 앞에서는 늘 멋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약한 모습을 보인 건 한 번으로 족하다. 이런 제 꼴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명색이 강선 그룹의 황태자 결혼인데.”
“그러고 보니 처음이군. 본부장과 술을 마시는 날이 올 줄이야.”
강신재 회장이 뱉은 말 같지도 않은 말 몇 마디에 드디어 아버지에게 인정받았다고, 그래서 기쁘다고 말한 게 몇 시간 전이었다. 태서는 그런 제가 너무나 역겨웠다.
강신재 회장이 저를 인정해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태서도 알고 있었다. 제 속을 긁으려고 일부러 고르고 고른 말들이었다. 제가 행복한 꼴을 보지 못해 짜 놓은 판인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제 아비가 펼쳐 놓은 판에 올라 미친놈처럼 장단 맞춰 주었다. 고맙고 기쁘다며 아버지라 부르고는 미소 지었다. 그게 제 아비를 화나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신재는 사실 태서에 대해서 잘 모른다. 관심을 가진 적이 없으니 태서의 성격도, 태서의 머릿속도 전혀 읽지 못한다.
하지만 태서는 강신재를 잘 알았다. 오랫동안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고 그를 우러러봤으니 당연했다.
강신재 앞에서 태서는 웃었지만, 사실은 입술 안쪽을 깨물고 있었다. 구토감이 치미는 것을 겨우 참아 낸 것이다. 다정한 부자지간에 주고받은 덕담 속에 잘 벼린 칼날을 박아 들이미는 순간이 끔찍했다.
“강태서, 이 머저리 같은 새끼…….”
쓴웃음을 내뱉는 그의 가슴이 헛헛했다. 아무튼 태어나 처음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친부가 저를 인정해 준 것은. 비록 비아냥거림이 가득 담긴 우스갯소리였을지언정, 저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갖다 쓴 말이었을지언정 인정은 인정이었다.
오래도록 바라던 일이었다. 그에게 칭찬받는 것. 그의 눈을 마주 보며 그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
강신재를 사랑하거나 존경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의 칭찬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당연한 것이 태서에게는 너무나 어렵다. 어렵다 못해 괴롭다. 비참함, 슬픔, 분노, 체념, 실망. 우울한 감정이 뒤섞여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고작 그딴 일로 휘청이는 스스로를 향해 조소를 날린 태서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친부를 만나 그의 의중을 정확하게 알게 되자 허탈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궁금하기는 했다.
친부가 원하는 대로 제가 불행해진다면, 저와 꼴이 같아진 아들을 대하는 친부의 눈빛이 조금은 부드러워질까?
아주 잠시 떠올린 의문에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자신은 뭘 기대하는 걸까. 매번 그렇게 실망하고 버려졌으면서도 또 기대하다니, 등신도 이런 등신이 없다.
“진짜 등신이네, 이거…….”
그의 눈에 들고자 그렇게나 노력했던 시간이 부질없었다.
머리가 좋아 중고등 과정을 빠르게 마친 태서는 대학에 일찍 입학했다. 대학 역시 하고자 했다면 조기 졸업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남들보다도 늦게 졸업했다.
태어나 처음 해 보는 반항이었다. 잘난 모습을 보여 줘 봤자 칭찬은커녕 쳐다보지도 않으니, 못난 모습을 보이면 어떨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몇몇 과목에서 낙제점과 경고도 받았다. 유혹이 가득한 모임에 나가 보기도 했고, 술을 진탕 마셔 보기도 했다.
“강태서가 여기에 얼굴을 다 비치고. 어쩐 일이야?”
“그러게. 야, 좋은 거 있는데 해 볼래?”
“꺼져.”
“야, 아무나 안 주는 거야.”
“꺼지라고.”
그는 강신재 회장이 제 주변에 심어 놓았을 눈이 제 비행을 모두 보고해 주기를 바라면서 술잔만 들고 자리를 지켰다. 여자와 약에 손을 댄 건 아니지만, 바른길만 걷던 그로서는 용기 낸 일탈이었다.
딱 한 학기, 그렇게 자신을 내려놓았던 태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빠르게 깨달았다. 걱정이나 잔소리도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것인데, 애정 없는 친부가 제 그릇됨을 타박할 리 없었다.
그래서 태서는 그때부터 살길을 모색했다. 강선 그룹을 물려받을 욕심은커녕, 강선 그룹사에 들어가 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치열하게 공부하고 치열하게 경험했다. 노는 척하며 졸업을 미루고 강신재의 눈을 피해 회사를 차렸다.
그러다 뜻이 맞는 앰버를 만났고, 시행착오 끝에 회사를 키웠다. 정보를 모아 살피고 기업을 사들여 합병하거나 찢고 분해하여 팔았다. 그렇게 돈만 좇던 그는 손대는 것마다 대박을 터뜨렸다.
한국에서 사는 것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기에 아예 미국에서 자리 잡으려 했다. 하지만 미국까지 날아온 조모의 설득에 흔들리고 말았다.
“언제까지 외국으로만 떠돌 생각인 게야. 태서야, 이제는 그만 들어와야지.”
“거기에는 제가 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태서 네가 할 일이 왜 없어? 없다면 내 만들어 주마.”
“…….”
“태서야,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하나뿐인 손자다. 너 하나만큼은 내가 지켜 주마.”
“할머님…….”
“강 회장이 지금이야 저렇지. 후회하는 날이 올 게야. 그러니 태서야. 못난 아비와 할미 곁에 있어 주련?”
그길로 미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친부인 강신재가 반대할 수 없도록 손을 써 둔 임홍진 관장은 그를 위해 강선 건설 본부장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한국 생활이 시작됐다. 강신재 회장의 눈에 들기 위해 그가 내린 어려운 지시 사항을 모두 해내려 노력했다. 그렇게라도 한 번쯤은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을까.
별짓을 다 해도 반응하지 않던 친부가 움직인 것은 태서의 행복을 확인한 직후였다. 증오해 마지않는 아들이 행복해지니 그 행복을 빼앗아 짓밟고 싶어서 손을 내민 것이다.
오늘 저녁, 그는 목적지가 연류동이라는 것만으로도, 만나야 할 상대가 강신재라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고 피곤했다. 하지만 연류동으로 가는 내내 일말의 기대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니까.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런데 태서에게 쏟아진 건 비웃음과 조롱, 원망과 분노,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회사의 이미지 핑계를 대며 조유리와의 결혼을 종용하는 아버지에게 태서는 질려 버렸다. 말 그대로, 질려 버렸다.
지긋지긋한 두통에 관자놀이를 짚은 태서가 비틀거리며 정원을 나섰다. 건물을 빙 돌아 1층 현관문을 열자 그를 맞이한 건 따뜻한 느낌의 불빛이었다.
해가 지면 거실의 간접 조명이 자동으로 켜진다. 줄곧 혼자였던 그는 집을 꾸밀 때 제 오랜 습관을 반영하여 조명까지 신경 썼다.
외롭다는 것을, 혼자라는 것을 깨닫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아늑하고 포근한 것을 좋아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술에 취한 탓일까. 오늘은 침실에도 저를 기다리는 불빛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명으로 감출 수 있는 공허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헛웃음이 샌다. 자꾸만 잡생각이 드는 제가 싫어 미간을 찡그리며 침실 문을 연 순간.
“…….”
태서의 뒤에서부터 비춘 단호박빛 조명에 새하얀 이불이 드러났다. 반듯하게 펼쳐져 있어야 할 이불이 작고 둥근 산을 이루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을 깨닫기도 전에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의 방을 가득 채운 향기는 윤재인, 그녀였다. 재인이 2층 제 방도 아닌, 1층 거실도 아닌, 태서의 방에서 그를 기다리다 잠든 것이다.
“왜…….”
당신은 자꾸 나를 아이처럼 만드는지.
울고 싶게. 떼쓰고 싶게. 사랑해 달라고 조르고 싶게.
울컥, 태서의 너른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