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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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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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보고 싶다
2023.07.11.
강신재는 젊은 날의 저와 똑 닮은 태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적막이 감도는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찻잔의 차는 싸늘하게 식은 지 오래였다.
공식적인 발표는 내일이지만, 홍보 팀에 발표를 지시한 이상 어떻게든 당사자에게 말이 흘러갈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했다. 저를 찾아와 화내며 따질 본부장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린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나타난 본부장은 비교적 차분했다. 속마음을 감추고 무표정한 얼굴로 제 시선을 받아치듯 눈을 맞춰 오는 것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피곤하구나. 찾아온 이유는?”
“제가 5월에 결혼한다고 들었습니다.”
“음. 가정을 꾸리기에 더없이 좋은 달이지.”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강신재는 기대하고 있었다. 제 도발에 본부장이 어떻게 나올지, 언제까지 참아 낼지를 가늠하는 그의 눈빛에 조소가 떠올랐다.
“결혼은 제 개인적인 일입니다. 회사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사자의 의사도 묻지 않고 신재가 독단적으로 결혼을 진행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먼저일 줄 알았다. 혹은 그가 결혼 상대로 택한 조유리에 관한 불평불만을 털어놓는 게 우선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태서는 회사 차원에서 나서서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것만을 문제 삼았다. 마치 상대가 누구든 제 의견에 따를 것처럼 구는 모양새에 강신재의 고개가 슬며시 기울었다.
속내를 짐작하기 위해 한동안 눈을 가늘게 뜨고 태서를 응시하던 강신재가 차게 식은 찻잔을 스윽, 밀었다. 찻잔에 담긴 찻물이 찰랑이며 은은한 브랜디 향이 풍겼다.
“아니지.”
“…….”
“본부장과 조유리 양의 결혼이야말로 회사에서 나서서 공식화하는 게 맞아. 본부장이 현양 건설 총수 일가의 몰락에 개입한 건 본부장 개인적으로 저지른 일인데, 사람들은 강선이 움직였다고 생각하고 있어.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저에게 어떻게든 화미 아파트 재건축 및 강남 일대 재개발 공사를 따내라고 하신 건 회장님이십니다.”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것과 모르게 하는 것. 그 차이가 능력이야. 게다가 조대훈을 그렇게까지 진창에 처박은 게 공사를 따내기 위해서만은 아니지 않나?”
신재는 강태서가 제 여자를 위해 움직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보력도 힘이었다. 태서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강신재가 태서가 아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결혼을 미끼로 지켜보고 있다가 필요해지니 잡아먹어 버렸다고, 그렇게 말이 돈다던데. 본부장이 일을 따낸 것과는 별개로 강선의 이미지는 나빠졌어. 그러니.”
“…….”
“본부장이 수습해야지. 현양 건설이 그렇게 된 상황에서도 조유리 양과 결혼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도는 말도 들어갈 거고, 그렇게 되면 사위가 장인의 회사 업무를 물려받는 게 될 테니 오히려 이상할 게 없지.”
“…….”
“내가 본부장을 괴롭히기 위해 결혼을 서두른다고 생각하나? 아니야. 나는 강선 그룹의 총수로서 회사를 생각하는 것뿐이야. 본부장도 책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결혼, 못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피식, 웃은 강신재가 가만히 떨리는 손을 말아 쥐었다. 지금쯤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게 분명한 강태서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명색이 강선 그룹 황태자의 결혼인데, 회사 차원에서 나서서 알려야지.”
강신재는 비틀린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서재 구석에 놓인 바 위에 늘어선 술병 중 하나를 꺼낸 그가 잔을 들고 돌아섰다.
“아무튼, 결혼은 축하할 일이니까 축배는 들어야 하지 않겠나?”
얼음도 채우지 않은 커다란 잔 두 개에 독한 위스키를 넘치도록 담은 그가 태서에게 다가가 한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잔 하나는 제 손에 든 채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이군. 본부장과 술을 마시는 날이 올 줄이야.”
몇 모금 마신 후 다시 자리에 앉은 그가 느긋하게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술이 들어가니 떨림이 차차 잦아든다. 마음이 한결 편해진 강신재가 소파 깊숙하게 몸을 묻었다.
술에 의존하는 것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숨기고 감추는 건 약한 자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강선 그룹을 장악한 그는 강했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글로벌 리더로 우뚝 선 그를 감히 공격할 존재는 없었다.
부와 권력을 손에 쥐었기에 두려울 게 없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소중히 지키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이 약점도 가진 법이다. 내가 더없이 귀하게 여기는 것, 그것 자체가 적에게는 약점이다. 그런 면에서 강신재는 자유로웠다.
소중히 지키고 싶은 게 없으니.
그래서 강신재는 여태껏 가만히 두었던 강태서를 향해 시선을 돌린 것이다. 소중히 지키고 싶은 존재를 들킨 본부장은 약자였다. 제 귀한 것을 내어 주지 않기 위해 발악하다가 끝끝내 처절하게 무너지게 될 것이다.
신재는 그 과정을 기꺼이 눈에 담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목숨처럼 아끼던 것을 잃고 실의에 빠진 황태자에게 제가 쓰고 있는 왕관을 물려줄 생각이었다.
가시 왕관.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으나 정작 원하는 것은 그의 세상에 없을 것이다. 텅 빈 눈으로 마지못해 세상을 마주하고 평생 원하는 것을 그리워하며 살게 될 것이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강신재는 태서가 술을 마시지 않고 빤히 내려다보고만 있는 것을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제 기분 낼 생각으로 준 것이지, 함께 술을 나눠 마실 생각도 아니었다.
“술 마실 생각이 없나 본데, 본부장은 이만…….”
“저를 가리켜 황태자라고 하셨습니다.”
태서의 나직한 목소리에 슬슬 돌기 시작한 취기로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강신재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 말은.”
“…….”
“저를 아들로 인정해 주시는 겁니까?”
강태서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감도는 것을 신재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손에 쥔 술잔이 부들부들 떨렸다. 넘친 술이 그의 손을 적시고 소파 팔걸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기쁘네요.”
얼핏 보기에 정말 기쁜 듯 곱게 눈을 접어 웃은 태서가 손을 뻗었다. 그가 든 것은 술이 가득 담긴 잔이었다.
잔을 기울여 다 비워 내는 동안, 강태서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강신재를 바라보았다. 신재 또한 제 분노를 안주 삼아 호박빛 액체를 들이켜는 태서를 노려보았다.
탁,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태서가 젖은 입가를 문질러 닦고는 허리를 쭉 폈다. 웃으며 진득하게 눈을 맞춰 오더니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아버지.”
강태서가 저렇게나 저를 올곧게 바라보며 저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서늘한 한기가 그를 덮쳤다. 강태서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욕을 듣는 것보다도 더 불쾌했다.
“…….”
“평생 소원 중의 하나를 이뤄 주셨습니다.”
해사하게 웃는 태서를 쏘아보는 신재의 어깨와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화에 훅, 열이 올라 그를 잠식했던 한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고맙습니다.”
짧게 감사의 뜻을 전한 태서에게서 손에 쥐고 있던 크리스털 잔으로, 강신재의 사나운 시선이 옮겨 갔다.
* * *
한숨만 푹푹 내쉬던 테드가 안경을 벗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가 이내 헝클어뜨리고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핸드폰을 들고 입술을 꾹꾹 깨무는 그의 시선이 자꾸만 제가 머무는 2층으로 뻗은 계단을 향했다.
결국 핸드폰마저 내던지듯 내려놓은 그가 소매를 걷었다. 태서의 앞에 놓인 양주병을 들어 발치에 숨겨 놓고는 빈 잔을 쥔 채 끔뻑끔뻑 조는 태서를 채근했다.
“하……. 황태자는 무슨.”
“……태서?”
“응…….”
“집에 가. Go home. 집에 재인 이짜나.”
“응…….”
“태서는 집 좋아해. 그치? 그런데 왜 여기 있어? Why?”
“……너 한국말 많이 늘었다. 그런데 이 새끼, 다 반말이네.”
“……가자요. 내가 데려다줄게.”
“보고 싶다, 윤재인.”
“그러니까 가자. 태서, 내 말 들려요?”
일어설 듯 식탁을 짚은 팔에 힘을 주던 태서가 픽, 하고 식탁 위로 엎어졌다.
테드가 난감한 얼굴로 태서와 2층 계단을 번갈아 보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조심조심 큰 보폭으로 느릿하게 걷던 그가 계단에 다다르자 후다닥, 2층으로 올라갔다.
“누나, 어떠캐?”
“뭘 어떡해. 재인이 불러.”
2층 입구에서 1층의 동태를 살피던 상화가 단발머리를 쓸어 올리며 눈짓했다.
아무리 은근히 힘센 테드라지만, 혼자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태서를 집까지 들어 옮길 수는 없었다. 테드가 푸우, 하고 입술을 쭉 내밀고는 고개 끄덕였다.
상화에게 온갖 어리광을 부린 끝에 얻게 된 달콤한 시간이 코앞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태서의 난입으로 분위기가 다 깨지고 말았다. 테드로서는 너무나 속상한 일이었다.
태서의 등장에 놀란 상화는 후다닥 2층 화장실로 숨어 버렸고, 이미 술에 취해 현관에 놓인 상화의 신발도 알아채지 못한 태서는 가지고 온 술병을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어디서 다쳤는지, 태서의 뺨에는 긁힌 자국이 꽤나 크게 있었다. 피가 나기에 약상자를 가지고 오려고 했더니 그런 건 됐고 같이 술이나 마시자며 테드를 주저앉혔다.
그리고 말도 없이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태서가 저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본 일이 없었기에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2층에 숨겨 놓은 상화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테드는 태서의 곁에서 대충 장단을 맞춰 주며 그를 내보내려 했다.
그런데 태서가 엎어졌다. 흔들어도 꿈쩍하지 않을 만큼 취한 채로. 밥도, 잠도, 술도 모두 다 집에서 해결하는 사람이 왜 오늘은 여기에 나타난 건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이 집도 태서의 집이기는 하지만.
“알게쏘오…….”
“잠깐만. 재인이 부르기 전에 저거 치우고. 저거, 저기 저것들.”
상화가 가리킨 것은 2층으로 뻗은 계단을 어지럽혀 놓은 옷가지들이었다.
몇 가지 간식과 잡다한 것이 들어 있는 편의점 봉투, 그리고 그가 벗은 외투와 후드 집업이 계단 두세 개 간격으로 허물처럼 놓여 있었다.
그 사이사이 상화의 핸드백과 머플러, 점퍼도 보였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뜨거운 키스를 나누며 급하게 2층으로 향하느라 어질러 놓았던 모습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