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 죽지만 않으면 (107/123)


#107. 죽지만 않으면
2023.07.07.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취해서 해선 안 될 짓을 저지를 생각에 잔뜩 달아오른 그였다. 그러니 음주 운전 같은 것을 따질 정신이 없었다.


“정륜동이라고 했지?”

유리에게 들었던 재인의 행방을 되짚어 낸 재훈이 제가 아끼는 세단을 짚었다. 힘이 빠진 손은 차 문의 손잡이를 자꾸만 놓치며 헛손질해 댔다.

그동안 밀려드는 일이 바빠 윤재인을 지척에 두고도 그냥 두었다. 하지만 이제 남는 게 시간이다.

일단 어디든 사람 없는 곳에 가둬 두고 둘이서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낸 다음에 회사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같이 해외로 나가든 하면 될 일이었다.


“기다려, 재인아.”

사실 처음부터 회사 운영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업무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장손에게 선뜻 사업체를 내어 주신 할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려야 한다며 엄마가 억지로 시켜서 한 것뿐이니 큰 미련도 없다. 그가 평생 욕심낸 건 윤재인 하나였다.

강태서가 사람을 써서 이중, 삼중으로 그녀를 지키고 있다지만 방해하는 것들 따위, 죄다 차로 들이받아 버리면 알 게 뭔가. 윤재인 역시 조금은 다쳐도 괜찮을 것이다.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그녀의 예쁜 얼굴이나 아름다운 몸매가 상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몸이 불편하거나 아프면 저항하기 어려울 테니 그가 뜻한 바를 이루기 쉬워진다.

완벽한 것을 가질 수 없다면 조금 고장 나더라도 괜찮다. 윤재인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흠집이 나더라도 그게 저로 인한 것이라면, 망가지더라도 제가 망가뜨린 것이라면 기꺼웠다.


“푸흐, 흐큭, 큭…….”

스스로 생각해도 대책이 없다 싶지만, 진심으로 돌아 버렸을 때 나오는 무계획성은 비틀린 성격과 더불어 술에 취해 치솟은 아드레날린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미 바닥이다. 더는 강태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그는 지금 8년 전에 미수에 그쳤던 일을 해낼 생각으로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킥, 킥킥, 계속해서 새어 나오는 웃음 사이로 음산한 흥얼거림이 흩어졌다. 마침내 차 문을 여는 데 성공한 재훈이 축축 늘어지는 몸을 휘청이며 차에 올라타려던 순간.


“윽…….”

갑작스럽게 목 뒷덜미에 전해진 충격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재훈의 뒤에서 나타난 것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였다. 재훈이 완전히 뻗어 버린 것을 확인한 그가 주차장 구석을 향해 눈짓했다.


“옮겨.”

남자의 지시에 덩치 커다란 사내가 다가왔다. 그가 재훈을 들어 차에 던지듯 싣자마자 시커먼 승합차는 서둘러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이 모습을 숨어 지켜보던 비서가 손에 든 핸드폰에 대고 빠르게 덧붙였다.


“네, 지금 납치된 것 같습니다. 차량 번호는…….”

 

 

* * *

반차를 쓰고 연류동에서 재인과 함께 임 관장을 뵙고 나온 태서는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다시 출근해야 했다. 모르는 척하기엔 본부장의 결재를 기다리는 업무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복귀하자마자 일복이 터졌다. 그 덕에 요 며칠 계속 퇴근이 늦었다. 그러니 반차를 내고도 출근한 오늘만큼은 칼퇴근하리라는 결심으로 태서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런데.


“…….”

뒤쪽에서 자꾸만 헛기침해 대는 인기척에 태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같은 층의 사무실을 쓰는 황 전무였다.

그는 마치 태서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태서가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그의 뒤에 붙어 선 것이다.


“이제 퇴근하십니까?”

“아, 강 본부장. 난 또 누구라고. 응, 응. 나도 이제 퇴근하는 길입니다.”

강태서는 멀리서 봐도 빛이 나는 강태서였다. 태서만큼 훤칠한 이가 드물다는 것을 알면서도, 황 전무는 절대로 먼저 인사해 오는 법이 없었다. 태서가 미소 지으며 묵례하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려 할 때였다.


“그…….”

“말씀하십시오.”

“축하해. 응?”

뜬금없는 말에 태서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는 제 곁에 선 황 전무를 내려다보았다. 태서가 아는 황 전무는 눈치가 없기는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그. 우리 처조카가 강선 전자 홍보 팀에 있는데. 아니, 그렇다고 내가 꽂아 준 건 아니야. 에헤이, 내가 그럴 힘이나 되나?”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던 황 전무가 태서의 짜증 어린 얼굴을 확인하고는 아차차, 하는 표정으로 다시 본론을 기억해 냈다.


“그게……. 우리 처조카한테 조금 전에 들었는데, 우리 강 본부장이 5월에 결혼한다고……. 내일 아침에 기사 뜰 거라던데……?”

“…….”

“5월 말은 좀 더워도, 5월 초는 딱 좋지. 거참, 그룹 홍보 팀을 통해서 결혼을 발표하다니. 며느리 사랑하시는 회장님의 이벤트인가, 아니면 신부 아끼는 본부장이? 뭐 어떻든 처가가 그렇게 되어서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겠지만 신경 쓰지 말고! 누가 뭐라든 가장 중요한 건 신랑 신부의 행복 아니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를 늘어놓던 황 전무는 싸늘하기만 한 태서의 표정을 뒤늦게 깨닫고 말을 줄였다.


“……아, 아닌가?”

“…….”

“……결혼 안 하십, 안 하나?”

“제가 누구랑 결혼한다고 합니까?”

“그, 현양 건설의…….”

“먼저 가십시오.”

태서가 고개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려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아직 퇴근하지 않은 장 실장에게 돌아가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개인 핸드폰이 먼저 울렸다. 장 실장이었다.


“네.”

―퇴근하셨는데 죄송합니다. 몇 가지 급하게 보고드릴 게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먼저, 조금 전 강선 전자 홍보 팀에 회장 직속 지시 사항이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 부분 확인하셔야 할 것 같…….

“장 실장, 들어와요.”

어느새 비서실에 도착한 그는 이미 전화를 끊은 뒤였다. 태서는 비서진을 그대로 지나쳐 사무실로 들어갔다.

상사가 퇴근한 줄 알고 있던 비서진들이 놀라 벌떡 일어난 가운데, 장 실장이 다급하게 종이 몇 장을 프린트하여 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선 장 실장은 기다리고 있었던 태서에게 바로 결재 서류 파일을 건넸다. 강선 전자 홍보 팀에서 내일 아침에 공식 발표할, 강태서와 조유리의 결혼 발표문 전문이었다.


“보통은 홍보 팀에서 발표문을 작성하는데, 이번에는 회장 직속 비서실에서 발표문 전문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최근에 비서실장을 제외한 회장 직속 비서실 인력이 전부 물갈이되는 바람에 정보 입수가 늦었습니다.”

당황한 장 실장의 얼굴에 낭패감이 역력했다. 몇 번이나 터지려는 헛웃음을 겨우 참아 내고 발표문을 끝까지 다 읽어 낸 태서가 서류 파일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도의, 약속, 신뢰.

발표문에 강조하여 사용된 단어 중에 진심이 담긴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럴듯하다고 여길지 몰라도, 당사자인 동시에 일의 내막을 모두 알고 있는 태서가 볼 때는 저열하기 그지없는 발표문이었다.

마치 태서를 놀리는 것만 같은 문장의 나열 속에 진실은 없었다. 순 거짓투성이인 발표문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는 그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거짓 결혼에 관한 소문을 흘리는 정도일 줄 알았는데, 회장님은 제 생각보다도 더 대범하신 듯합니다.”

“…….”

“아니면, 그만큼 내가 우습거나.”

피식 웃음을 흘린 그의 시선이 저 먼 곳을 향했다. 집이 있는 정륜동 방향이었다. 그곳에서 저를 기다릴 재인을 생각하는 태서의 입 안이 썼다.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태서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주하기 끔찍해서 미뤄 뒀던 독대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연류동으로 가야겠습니다. 차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본부장님, 지금 정재훈이…….”

갑자기 울린 핸드폰 진동에 장 실장의 말이 끊어졌다.

장 실장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그녀가 최근에 절대 몸에서 떼어 놓지 않는 핸드폰으로, 정재훈과 조유리 쪽에 감시를 붙여 둔 이들과의 연락을 위해 개통해 둔 것이었다.

시안이 급한 전화임을 눈치챈 태서가 통화를 허락하자마자 서둘러 전화받은 장 실장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네. 계속 추적 부탁드립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게, 정재훈이 납치된 것 같다고 합니다.”

“납치……?”

“오늘 법인 파산 신청하고 내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다고 들었는데, 조금 전에 윤재인 씨 이름을 계속 중얼거리면서 사무실을 나서는 게 수상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윤재인 씨 주변에 경계를 강화를 지시했고, 이 부분을 본부장님께 보고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정재훈에게 붙여 놓은 비서에게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안 봐도 뻔했다. 법인 파산을 신청하고 더는 두려울 게 없다고 여겼을 정재훈 그 빌어먹을 새끼가 재인을 만나려 한 게 분명했다. 그러다가 일을 당한 듯했다.


“납치 배후는?”

“아직까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정재훈의 고종사촌 한유라 쪽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아…….”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정재훈을 단죄하는 것은 부족했다. 그렇다고 제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었다. 태서는 기꺼이 불법을 저질러 가며 정재훈을 박살 내 줄 인물을 찾았다. 그게 바로 한유라였다.

애초에 주안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고 키운 것은 한유라였다. 그녀는 주안 그룹 회장 사후에 벌어진 주안 그룹의 밥그릇 싸움에서 지주 회사인 주안 식품을 차지한 정신영 회장의 장녀이기도 했다.

한유라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빨리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수완을 발휘했다. 안하무인인 성격에 폭력적인 성향까지 더해져 사람들에게 자주 손가락질을 받기는 해도, 정재훈보다는 훨씬 더 능력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주안 그룹의 선대 회장은 유약한 장손인 정재훈을 어여삐 여겼고, 그녀가 일궈 놓은 주안 엔터테인먼트를 빼앗아다 정재훈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제 것을 앗아 간 정재훈만 보면 이를 가는 그녀에 대한 소문은 재계에서 유명했다.

태서는 일부러 한유라에게 정재훈에 관한 이런저런 말이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손을 써 두었는데, 그녀의 묵은 분노가 결국 오늘의 사건으로 이어진 듯했다.


“생각보다 맺힌 게 더 많았나 본데.”

납치라니. 한유라의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헛웃음을 터뜨린 태서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콩가루 집안이라고 비웃을 일은 아니었다. 당장 오늘부터 친부와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게 될 그였다.


“아무래도 한유라 측에서 그쪽으로 전문가를 고용한 것 같습니다.”

“죽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네?”

태서의 중얼거림을 알아듣고 놀란 장 실장에게 태서가 슬쩍 입꼬리를 당겨 보였다.


“목숨은 붙여 놔야죠.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그냥 죽여 달라고 빌게끔.”

“아…….”

“그런 새끼한테는 지옥도 사치지.”

장 실장은 지금의 태서가 저승사자 같다고 생각했다. 꿈에서도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을 만큼 오싹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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