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 너 나 할 것 없이 (106/123)


#106. 너 나 할 것 없이
2023.07.04.


피가 날 만큼 입술을 짓씹는 유리의 턱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 떨림은 금세 온몸으로 번져 유리는 마치 한겨울에 알몸으로 쫓겨난 사람처럼 떨어 댔다.

두 사람은 떨고 있는 유리를 지나쳐 본채에 들어섰다. 그때까지도 발도 떼지 못하고 선 유리의 시선이 중문 앞까지 마중 나와 재인의 손을 맞잡는 임 관장의 손에 닿았다.

임 관장은 행여 재인의 손을 놓치기라도 할까, 꼭 잡은 채 거실의 소파로 이끄는 듯했다.


“상투 과자를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만들어 봤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늙으면 주전부리가 좋아지는 법이오. 세상에, 잘도 만들었네. 예쁘기도 하지.”

열린 중문 너머로 들려오는 대화가 따뜻하고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예전에 유리가 구워 갔던 상투 과자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임 관장을 떠올린 유리의 커다란 눈에 와락, 눈물이 차올랐다.


“제가 하나 먹어봤는데, 맛있었습니다. 하루에 세 개만 드세요. 혈당 조절하셔야죠.”

“이 녀석아, 잔소리는 김 박사에게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늙은이에게 이런 즐거움이라도 있어야지. 고마워요.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 준 것만으로도 기쁜 일인데, 내 간식까지 신경 쓰게 했네.”

“아니에요.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이건 이따가 차랑 함께 후식으로 먹고. 점심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하니 어서 밥부터 먹읍시다. 우리 집 주방을 책임지는 황 여사가 오랜만에 집에 손님이 와서 신이 났는지 솜씨를 잔뜩 부렸다던데, 식기 전에 갑시다.”

“할머님, 말씀 편히 하세요.”

“그럴까? 그래, 우리 재인이는 뭘 좋아하누?”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습니다.”

“가리는 게 있어도 괜찮지. 예쁜 사람은 좀 까다로워도 되는 법이야. 태서 곁에서 고운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해롭지 않은 것만 가까이하시게.”

현관 앞을 지나 주방 곁의 식당으로 향하는 세 사람은 화기애애했다. 임 관장은 물론이고 윤재인과 강태서까지, 세 사람의 눈에는 중문 너머에 선 유리가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특히나, 강태서는 재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처럼 유리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지도 않았고 평소 유리를 향해 내보이던 차가운 조소도 없었다. 마치 유리가 그 자리에 없다는 듯이,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무관심에 유리가 캐리어만 움켜쥔 채 이를 악물고 버티는 사이, 열려 있던 중문마저 닫혔다.


 

* * *



“조유리 양은 호텔로 돌아가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음…….”

“마음이 급했는지, 점심때 전화가 왔습니다. 회의 중이셔서 통화가 어렵다고 하니 직접 뵙고 싶다고, 언제쯤 시간이 나실지를 물어 왔습니다.”

조유리는 강신재의 비서에게 하루 서너 번씩 메시지를 보내왔다. 비서의 번호를 신재의 개인 핸드폰 번호라고 생각했는지, 좋은 하루 보내시라는 인사와 식사 맛있게 하시라는 내용의 안부 메시지였다.

처음 그 메시지를 받은 비서가 해당 내용을 보고했지만, 강신재는 그냥 놔두라고 말하며 더는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회사까지 찾아와 도와 달라고 하기에 염치라고는 없는 줄 알았더니, 차마 전화할 용기까지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현관문 앞까지 배웅 나온 유리의 인사를 받아 주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어떻게든 제게 잘 보이고 싶은 속이 빤히 보이는 아이가 하찮았다.


“어떻게 할까요?”

비서의 물음에 강신재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겁도 없이 저를 찾아온 유리를 집에 데려다 놨지만, 그 아이에 대해 연민이라거나 하는 감정은 전혀 가지고 있었다.

그저 임 관장과 강태서의 속을 태울 요령이었다. 그래서 임 관장이 유리를 내쫓았다는 비서의 보고에도 피식 웃고 말았다.

집안이 망하다 못해 온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공주처럼 굴려는 아이의 철없음을 해맑다고 해야 할까.

검찰의 칼날과 대중의 따가운 시선이 그 아이를 비껴간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닐 것이다. 누군가 손을 쓴 듯한데, 조유리는 그것도 모르고 하루아침에 호텔을 전전하게 되었다고 억울해하기만 했다.

능력은 없으면서 시기와 질투로 똘똘 뭉친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제 처지도 모르고 자존심만 세우는 꼴이 한심한 동시에, 그런 아이를 짝이랍시고 본부장의 곁에 세워 두면 볼 때마다 우스울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강신재가 손을 뻗었다. 책상 위에 놓인 액자에는 아름다운 여자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여전히 젊은 서연희가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외부와 연락을 차단하고 호텔 안에서 얌전히 지낼 수 있도록 조처해 주도록.”

“네.”

“그리고…….”

가만히 액자의 유리를 매만지던 그가 조심스럽게 액자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홍보팀에 결혼 발표 보도자료 배포하라고 해. 언론에서 강선 건설 본부장 강태서가 아닌, 강선 그룹의 황태자 강태서의 결혼이라고 떠들게끔.”

강태서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날, 신재는 그 아이가 제 눈앞에 나타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그 아이를 마주하게 될 자신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그 아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저를 쏙 빼닮은 아이가 싫었다. 비도덕적인 말이긴 하지만, 연희의 죽음 이후 얼마간은 제 손으로 아이의 숨통을 끊어 버리는 상상까지 했다.

아이는 다행히 눈치가 빨랐다. 친모의 자살 이후 자발적으로 쭉 외국으로만 떠돈 것이다. 그런데 다 자라서 조모의 부름을 핑계 삼아 한국으로 온 게 거슬렸다. 바라는 것이야 뻔했다.

강태서가 제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나 눈에 들고 싶어 하던 아이였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신재는 끈질기게 저를 좇던 아이의 시선이 끔찍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주제에 함부로 부리는 욕심이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신재는 이참에 질긴 인연을 끊어 낼 생각이었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천륜이라고 하지만, 그는 제게서 연인을 앗아 간 하늘을 더 이상 우러르지 않는다.


“황태자라…….”

제가 뱉어 놓고도 웃겼는지, 신재의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태서가 화미 아파트 재건축 사업권과 강남 일대 재개발 사업권을 따낸 현양 건설을 몰락시키는 일에 발을 담근 것을, 신재는 제가 지시한 것을 잘 해내고 싶은 태서의 야망 때문이라 여겼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일에 전면적으로 나선 강태서는 처음이었다. 한창 혈기 넘치는 나이이니 그 어느 때보다 인정에 목마르고 주변의 시선에 민감할 때라는 것을, 신재 역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그룹 내에서는 강태서를 무척이나 좋게 보고 있었다. 지주 회사인 강선 전자가 아닌, 건설사에 자리를 줬는데도 강태서의 눈치를 보는 임원들이 많은 듯했다.

그쯤 되면 강태서 역시 그룹 내에서 제힘을 키우고 싶을 것이다. 저를 황태자라 칭송하는 무리의 찬양을 발판 삼아 강신재의 후계자로 우뚝 서는 날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신재는 그게 싫었다.

감히 제 뒤를 이을 생각에 젖어 있는 것도, 그러면서 사랑하는 이와의 행복을 꿈꾸는 것도.


“우습군.”

너 나 할 것 없이 죄다.

제가 벗어나지 못했던 끔찍한 굴레를 태서에게 덧씌울 생각인 신재가 찻잔을 들었다.

독한 브랜디를 섞은 차를 머금은 그가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익숙한 듯, 비서가 클래식 음악을 크게 켜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 * *

오래도록 청소하지 않고 관리하지 않아 엉망으로 어질러진 사무실 한가운데, 재훈이 앉아 있었다. 며칠째 갈아입지 않은 셔츠는 구깃구깃했고, 평소 늘 하고 다니던 커프스 버튼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이미 잔뜩 취한 채였다. 술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재훈이 이를 악물었다. 그때마다 8년 전의 교통사고 이후 남은 턱의 상처가 도드라졌다.


“어차피 바닥이야.”

그러니까 더는 참을 필요가 없다고 여긴 재훈이 제 결정을 독려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재훈은 법인 파산을 신청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한두 달 기다려야 하겠지만, 조부로부터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받아 잘해 보고자 했던 그로서는 모든 것이 끝난 기분이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다 내려놓기로 했다. 강태서의 끈질기고도 빈틈없는 공격에 가진 것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지켜 내려 버티고 버티던 재훈은 결국 제 패배를 인정했다.


“강태서, 네가 간과한 게 있어. 이렇게까지 날 짓밟으면 완전히 끝날 거라고 생각했겠지.”

쿡쿡, 웃으며 강태서의 판단을 비웃은 재훈이 위스키가 담긴 잔을 들었다.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술잔 안에 절절하게 보고 싶은 한 사람이 떠올라 미소 짓고 있었다. 10년 넘게 그가 바라고 바랐던 윤재인, 그녀였다.


“이젠 겁날 게 없지. 내가 무슨 짓인들 못 하겠어?”

한때는 별짓을 다 했다. 해외에 머무는 동안 끊임없이 여자를 사귀었고, 술과 담배, 약에도 손대며 제 머릿속에 가득 찬 한 사람을 잊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부질없었다. 그럴수록 재인의 잔상은 또렷해지고 그리움은 커졌다. 정재훈의 생에 갖고 싶은데 갖지 못한 것은 그녀가 유일했다. 그러니.


“이렇게 된 이상, 한 번쯤은 가져야겠지.”

이번에야말로 어떻게든 재인을 만나 제 순애보를 깨닫게 해야겠다고 결심한 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무실을 나서자 가장 늦게 입사한 비서가 일어섰다.


“이제 출근할 필요 없습니다.”

“…….”

“주안 엔터테인먼트도 오늘로 끝이니까.”

시선을 내리깐 비서가 가만히 고개 숙였다. 월급도 안 주는데 저러고 있는 걸 보면 저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걸까.

낮에 파산 신청을 마친 재훈은 마지막까지 제 곁에 머물러 준 비서에게 오늘 밤 제가 머무는 호텔 룸으로 들어오라고 할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어느 여자를 어떻게 안아도, 다 대용품일 뿐이다.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재훈은 한껏 팽팽해진 제 욕망이 향하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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