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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더는 안 되겠어 (105/123)


#105. 더는 안 되겠어
2023.06.30.


별채로 가기 위해 1층으로 내려오던 유리는 집 안에 가득한 맛있는 냄새를 맡고 눈을 크게 떴다. 고소한 기름 냄새와 함께 짭조름하고 달콤한 냄새에 코가 벌름거렸다.


“어……?”

연류동의 강신재 회장 본가로 온 후, 유리는 늘 혼자서 식사했다.

일단 강신재 회장은 집에서 식사를 거의 안 하는 듯했고, 며칠 전에 귀국한 임홍진 관장은 아예 본채에 발길을 끊었다. 별채에 머물며 그곳에서 식사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 집으로 와서 처음 식탁에 앉았을 때는 실망했다. 정갈한 반찬 네댓 가지와 담백한 국이 맛없는 건 아니지만, 재벌가라고 하기엔 너무나 소박한 밥상이었기 때문이다.

주방을 담당하는 고용인에게 격에 맞는 상을 차리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겨우 참고 있는 그녀였다. 그런데 오늘은 마치 잔칫집과 같은 냄새가 유리를 들뜨게 했다.


“뭐지……?”

1층에 내려오자마자 거실의 모습이 평소와 다름을 깨달았다. 커다란 집은 생활감이라고는 없어서 고요하리만큼 조용했다.

그래서 저 혼자 사는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주방과 거실을 오가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고용인들 덕에 생기가 돌았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유리는 탐스러운 꽃이 가득 담긴 화병을 들고 지나가는 고용인을 붙잡았다.


“뭐예요? 오늘, 무슨 날이에요?”

“관장님께서 오늘 점심 식사에 특별히 신경 쓰라고 하셨습니다.”

“……점심에 관장님도 본채에 오셔서 드신대요?”

“네.”

그 늙은이랑 마주 보고 밥 먹으면 체할 것 같은데.

잔뜩 인상을 쓴 유리의 중얼거림을 들은 고용인이 놀람을 숨기려 다급하게 고개 숙였다.


“왜 그러고 있어요?”

“네, 네?”

“뭐, 기분 나빠요?”

“……아닙니다.”

“가서 할 일 하세요.”

표정을 숨긴 고용인이 자리를 떴다. 이 집 고용인들은 대체로 다 마음에 안 든다.

아트 센터의 비서진도 그렇고, 제가 이 집의 안주인이 되면 갈아 치워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유리가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강태서의 할머니는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저와 처음으로 함께 먹는 식사에 공을 들이려는 모습을 보니 불쾌함이 조금 누그러졌다.

유리는 늙은이가 이렇게까지 굽히고 나온다면 저도 조금은 살갑게 굴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별채로 발을 옮겼다.

하지만 유리가 미소를 띤 채 별채의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그 다짐은 깨졌다. 아트 센터에서도 봤던 비서는 제게 슬쩍 묵례하고는 미닫이문을 두드렸다. 그 모습이 조금은 불손하다고 느낀 유리의 미간에 금이 갔다.


“음.”

안에서 임홍진 관장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비서가 미닫이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시죠.”

저번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비서를 한 번 노려본 유리가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임홍진 관장의 취향에 맞춰 지은 별채는 고풍스럽고도 안온했다. 본채보다도 조금 더 전통적인 한옥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 유리에게는 그저 고루하게만 느껴졌다. 그럴 리는 없지만, 늙은이의 취향에 맞춘 집 안 곳곳에서 쿰쿰한 냄새도 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같이 점심을 먹어야 하니까. 같이 점심을 먹으려는 걸 보면 저 늙은이도 나랑 잘 지내고 싶은 생각이 있는 모양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유리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눈을 살포시 접어 웃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할머님. 부르셨어요?”

발랄하게 인사했지만, 되돌아오는 인사는 없었다. 늙은이가 귀라도 먹은 건가. 길어지는 침묵에 유리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 갔다.


“저, 할머님……?”

불러 봤자 안경을 쓴 채 책상 앞에 놓인 서류를 살피는 임 관장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저 왔어요, 할머님.”

대꾸도 하지 않고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상황에서 유리는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문 앞에 선 채 눈동자만 바삐 움직이는 그녀의 귀에 째깍째깍 초침 움직이는 소리만이 크게 들렸다.


“현 실장.”

“네.”

문 앞에 대기 중이었는지, 조금 전 미닫이문을 열어 주었던 나이 지긋한 비서가 빠르게 들어와 유리의 곁에 섰다.


“강릉 센터의 새 수석 맡을 사람은 진솔미 씨로 하지.”

“네. 선임 자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 자리는 일단 공석으로 두는 게 좋겠어. 마음에 차는 사람이 아직은 안 보여.”

“네.”

“음, 그리고 차가 식었어.”

“다시 내올까요?”

“따뜻한 물만 한 잔.”

“네.”

비서와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보아하니 귀가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말은 임 관장이 작정하고 그녀를 무시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유리가 모멸감에 입술을 짓씹는 사이, 찻잔을 들고 나갔던 비서가 새로운 찻잔에 따뜻한 물을 담아 놓고 나갔다.


“……할머님.”

유리가 마지막으로 용기를 짜내어 임 관장을 불렀다. 하지만 임 관장은 눈썹도 까딱하지 않았다. 유리는 임 관장이 저를 골탕 먹이려고 불렀다고 생각하며, 끓어오르는 화에 가빠지는 숨을 겨우 눌렀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흰머리가 성성한 임 관장의 정수리를 노려보는 일 말고는 없었다.

얼마나 오래 그러고 있었을까. 이윽고 고개 든 임 관장의 시선이 유리를 향했다. 유리가 서재에 들어선 지 딱 30분 만이었다.


“그래, 불편한 건 없고?”

갑작스러운 질문에 유리가 조금 늦게 날 선 눈빛을 풀었다. 가만히 벌 받듯 서 있었기 때문일까. 다리가 아프고 당겨 왔다.


“네, 네. 불편한 건 전혀 없습니다.”

“저런……. 집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남의 집에 들어와 살면 불편한 줄을 알아야지.”

“……네?”

가식적으로 꾸며 낸 미소에 쨍, 하고 금이 갔다.


“우리 태서는 유리 양과 결혼할 생각은커녕, 마주 보고 싶지도 않다던데.”

“하지만, 하지만 회장님께서…….”

“강 회장은 제 핏줄에게도 매정한 사람이오. 하물며 유리 양에게는 어떨까?”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말투의 임홍진 관장의 얼굴에는 미소 한 점 걸려 있지 않았다.


“지금이야 못난 아비가 제 자식 앞길 막으려고 유리 양을 이용하려는 모양인데, 이용 가치가 없다고 여기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자네, 뭘 잘하지?”

“저, 저는…….”

“잘하는 게 없으면,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만큼 가진 게 많은가?”

“그건…….”

“스스로를 아껴야지. 왜 이용하려는 게 뻔한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 주나.”

“…….”

“내, 나이 든 사람으로서 젊은이에게 조언 하나 하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당황한 유리의 얼굴이 붉었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인생 쉽게 살려고 하는 거 아니라오.”

“…….”

“알아들었나?”

“네, 네.”

“알아들었으면, 나가야지?”

“……네?”

“이 집, 내 집일세. 내가 허락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내 집일세.”

“…….”

“무릇 사람이란 염치가 있는 법이라 여겼네. 그런데 자네는 염치를 모르는 모양이야. 사정이 딱하다고 해서 며칠은 봐주었네만, 더는 안 되겠어. 자네가 뭐라고 내 집에서 주인 행세하는가?”

“할, 할머님…….”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내가 더는 자네를 보는 일은 없어야겠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유리가 붕어처럼 입술만 뻐끔거리는 사이, 임 관장이 다시 펜을 들었다.


“현 실장.”

“네.”

“손님 가신다네.”

“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비서가 미닫이문을 연 채 유리를 기다렸다. 손톱자국이 날 만큼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유리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돌아온 본채, 현관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낯익은 캐리어 두 개와 핸드백이었다. 모두 그녀가 이 집으로 들어올 때 들고 온 것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어……?”

“가지고 오신 물건은 립밤 하나, 손거울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다 싸 두었습니다.”

불쾌함에 얼굴을 와락 찡그리는데 어느새 집안 전체를 맡아 관리하는 정 실장이 다가와 현관의 중문을 막아서듯 섰다.


“이게 무슨…….”

“살펴 가십시오.”

허리 굽혀 인사하는 정 실장의 뒤로 아까 화병을 들어 옮기던 고용인이 지나갔다. 그녀는 유리가 쓰던 게 분명한 침구와 수건, 바쓰 로브와 슬리퍼가 담긴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들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뒷문을 통해 나가 쓰레기를 모아 처리하는 곳으로 향할 게 분명한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유리가 씨근덕거리며 애꿎은 정 실장을 노려보려 했지만, 어느새 정 실장은 사라진 뒤였다. 그녀 앞에는 커다란 중문이 굳건히 닫혀 있을 뿐이었다.

임 관장이 저를 별채로 불러낸 것이 그녀를 내쫓기 전, 짐을 싸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유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었다.

태어나 이렇게까지 제 존재를 부정당해 본 적이 없었다. 뻣뻣하게 굳은 유리가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은 채 겨우 울음을 참아 내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열렸다. 본채에 들어선 것은 임홍진 관장이었다.


“할머…….”

유리가 뭐라 말하기도 전, 중문이 활짝 열렸다. 그 앞에 선 정 실장이 깍듯하게 허리 굽혀 임 관장을 맞이했다.


“정 실장, 점심 준비는 다 됐나?”

“네. 부족함 없이 준비를 끝냈습니다.”

활짝 열린 중문을 지나 본채에 올라서는 임 관장은 석상처럼 굳어 선 유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녀를 지나쳤다.


“고운 아가 입에도 맞아야 할 텐데.”

“황 여사가 오랜만에 솜씨를 부렸습니다.”

“황 여사 솜씨야 내 잘 알지. 다들 수고했네. 그런데 올 시간이 다 되지 않았어?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시간 맞춰 오셨습니다. 조금 전에 주차장에 들어오신 것 같습니다.”

“이 나이에 설렐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야.”

흐뭇한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아이처럼 들뜬 마음을 내비치는 임 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리는 뒤에서 다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목을 움츠렸다.

훅, 끼친 겨울바람에 너무나 근사한 향기가 어우러져 순식간에 공간을 채운다. 누가 들어왔는지를 알아챈 유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저희 왔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태서 할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윤재인입니다.”

“곱기도 하지. 어서 들어와요.”

풍부한 저음과 어우러지는 고운 목소리,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아 발을 떼는 산뜻한 움직임, 시선 끝에 담긴 결 좋은 머리카락과 꼭 잡은 두 손.

새롭게 등장한 두 사람의 존재가 유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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