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 세상이 다 아는 연애 (104/123)


#104. 세상이 다 아는 연애
2023.06.27.



“골치 아프게 구네.”

태서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책상 위에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지금 그는 윤재인의 체향이, 그녀의 웃음소리가, 안온한 품이 절실했다.

대기 발령으로 인해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새벽까지만 해도 재인과의 달콤한 시간에 푹 젖어 있던 그였다.

물론 그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였다. 지치지도 않고 달려드는 태서를 버거워하다가 결국엔 밀어내던 재인에게 지난밤은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았을 터다.


“계속 이럴 거면 운동량을 늘리는 건 어때요?”


“힘이 남아돌아서 재인 씨 괴롭히는 것 같습니까?”


“……힘을 좀 뺄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지금도 봐. 나는 죽겠는데 태서 씨는 쌩쌩하잖아. 나가요. 나가서 뛰고 와요.”


“같이 갈까?”


“아니, 태서 씨 혼자. 나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그렇게 태서는 밝아 오는 아침에 제집에서 내쫓겨 동네를 한 바퀴 돌아야 했다.

쪽잠을 자고도 반들반들 빛이 나는 남자는 지쳐 잠든 재인의 어깨에 입 맞추고 내키지 않는 출근을 준비했다. 그리고 강선 건설 본부장 강태서로 복귀했다.

회사에 복귀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화미 아파트 재건축과 관련된 일이었다.

험한 상황을 겪고 마음 흉흉해진 화미 아파트 재건축 조합원들과 주민 몇몇이 오늘부터 강선 건설 앞에 진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화미 아파트 재건축은 예전에도 한 번 엎어진 적이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 다시 현양 건설이 맡아 진행하기로 했는데, 발표가 나자마자 또다시 일이 어그러졌다. 그 덕에 애가 탄 관계자들이 막무가내로 나서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아 시중 건설사에서 맡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감돌자 그걸 알아챈 조합원들은 가장 마지막까지 현양 건설과 경합을 벌였단 강선 건설을 찾아와 재건축을 맡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좀 순순하기라도 할 것이지, 오히려 요구 조건은 예전보다도 많아졌다. 태서는 집단으로 뻔뻔하게 굴며 관련 책임자인 태서와의 면담을 바라는 조합원장의 요구를 거절했다. 주도권을 확실히 하려는 것이었다.

일의 진행 방향과 시기를 두고 생각에 잠겨 있던 태서가 핸드폰을 들었다.


<정말 올 겁니까?>

은근한 기대와 걱정이 모두 담긴 말이었다. 머지않아 짧게 진동하는 핸드폰을 확인한 그의 입가에 또렷한 미소가 번졌다.


<벌써 가고 있는걸요. 오늘의 메뉴는?>

재인의 질문에 태서가 핸드폰에 새로운 화면을 띄웠다. 사내 인트라넷에서 구내식당의 선택 메뉴를 훑은 그가 다시 메신저 창을 열어 빠르게 답했다.


<오늘은 파스타와 찹스테이크를 메인으로 한 양식 메뉴와 나주식 곰탕과 꼬막무침을 메인으로 한 한식 메뉴가 있습니다.>

<좋은데요? 30분 안에 도착할 거예요.>

태서가 눈을 감았다. 재인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가신다.

구석구석 번지는 설렘을 잠시 만끽한 그가 다시 눈을 뜨자마자 손에 쥔 건 업무용 핸드폰이었다. 임홍진 관장의 개인 연락처를 찾아낸 그의 손가락이 지체 없이 움직였다.


―오냐.

“결심이 섰습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었을 답을 하는데도 반응에 씁쓸함이 묻어난다. 태서는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아들과 손자가 반목하는 것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부추기게 된 것이 속상하리라.

아침 일찍 전화해 온 임홍진 관장은 이미 강신재 회장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아들의 속 좁음을, 그 안에 눌어붙은 원망의 찌꺼기를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없음을 확인한 임 관장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아마도 밤새 잠 못 자고 속을 끓였을 것이다.

다른 말 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전한 임 관장의 속내를 태서는 간파했다. 여러 뜻을 담았을 게 분명한 그 말에 태서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임 관장은 태서에게 생각지 못한 것을 제안해 왔다.


―할미가 되어 해 줄 수 있는 것이 얼마 없어 미안하다.


“…….”


―태서야, 내 차마 네 아비 원망하지 말라는 말은 못 하겠구나. 다만…….


“네.”


―가슴 속에 뭘 깊이 묻으려 하지 말아라. 뭐든 그러면 병이 나는 법이야. 너라도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구나.

 
조모가 덧붙인 말에 태서는 말을 아꼈다. 그러겠다고도, 그러지 않겠다고도 답할 수가 없었다. 이미 태서의 가슴 깊이 묻힌 것은 많았다. 정상인 척 살아왔을 뿐, 병도 탈도 제대로 난 그였다.


“하겠습니다.”

―그래, 준비하마.

“내일 중으로 아트 센터로 찾아뵙겠습니다. 일단 오늘은 장 실장을 보낼 겁니다.”

―그렇게 해라. ……태서야.

“네.”

―마음 단속 잘하고.

“…….”

짧은 말에 담긴 염려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태서가 뭐라 답하기도 전, 임홍진 관장이 먼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바쁠 테니 긴말 안 하마. 이만 끊는다.

“네.”

통화를 끝낸 태서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이런 식으로 아비라는 사람과 마주하는 걸 바랐던 건 아니지만, 해야만 했다. 그의 친부가 태서 곁의 재인을 허락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허락은 무슨.”

그의 허락을 받아 환영받으며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이제 와 친부의 허락이 필요할 리 없다. 시계를 확인한 태서가 일어섰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존재가 지금 그를 향해 오는 중이었다.


 

* * *

강선 건설의 구내식당은 외부인 출입이 가능했다.

하지만 구내식당이 회사 2층에 있다 보니, 1층 입구에서 보안 카드를 찍거나 방명록에 개인 정보를 기입하고 들어와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외부인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직원 사이에 낀 외부인을 알아볼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니 외부인을 알아본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일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외부인이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라면, 그리고 강신재 회장의 아들이자 등장만으로도 빛이 나는 강태서 본부장과 함께 나타났다면 말이 달라진다.


“…….”

태서가 들어서자마자 조용해진 구내식당을 여상한 눈으로 훑고는 곁에 선 재인을 향해 식판을 내밀었다. 조금 전, 사람들을 훑을 때는 웃음기 하나 없이 매끈하기만 하던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더 맛있는 거 사 주고 싶은데.”

“곰탕 좋아요. 오늘 날씨도 추운데, 아주 딱이야.”

“음, 업체에서 재료 선정과 조리법에 신경 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맛은 괜찮을 겁니다.”

식판에 음식을 받으며 얘기 나누는 두 사람의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두 사람을 흘끔거리는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태서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재인을 살폈다. 집에서 늘 그러듯 그녀가 앉을 자리를 봐주고, 수저와 물컵을 챙겼다. 재인 역시 그의 배려에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서로 눈을 맞추고 밥을 먹고 이야기 나누며 웃는 둘을 두고 조심스레 말이 오갈 것이다.

강태서가 연애 중이라고, 오랜만에 복귀하여 바쁠 와중에도 애인을 구내식당까지 불러내어 데이트를 즐긴다는 소문이 반나절도 안 되어 강선 그룹 전체에 퍼질 것이다.

바라는 바였다.

오늘부터 태서와 재인은 집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기로 했다. 업무 시간이 아니라면 최대한 같이 어디든 쏘다니기로 한 것이다. 영화관과 공연장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찾는 데이트 코스라면 다 가 볼 작정이었다.

재벌가와 증권가에 쉬쉬하며 퍼진 소문을 바로잡아 키울 필요가 있었다. 그의 부친이 조유리를 집에다 데려다 놓은 것은 그와 조유리의 결혼을 공식화하겠다는 의미였고, 태서는 그에 대척해야 했기 때문이다.

강신재 회장과 맞서게 될 것을 대비하여 수많은 플랜을 짰다.

그러면서 태서는 일단 제게 멀쩡한 연인이 있음을 분명하게 알리기로 했다. 재인이 그의 생각에 동의했고, 그 결과 태서는 그토록 바라던, ‘세상이 다 아는 연애를’ 하게 된 것이다.


“입에 맞습니까?”

“전문점 못지않은데요?”

국물을 떠 마시며 흡족하다는 듯 웃는 재인을 향해 태서가 손을 뻗었다. 제 지저분한 막장에 끌려 들어온 연인이 고마우면서도 안쓰러웠다.


“국물 한 숟가락 떠먹었을 뿐인데 뭐가 묻었어요?”

“아니, 그냥 윤재인 만지작거리고 싶어서.”

“…….”

“밥 먹은 후에는 위에 올라갔다 갈 거죠?”

“아뇨.”

“왜?”

같이 사무실에 올라가자는 제안을 당당히 거절한 재인이 슬쩍 눈을 흘기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저를 짐승 보듯 하며 국물에 밥을 마는 재인을, 태서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 *



“이게 뭐야!”

핸드폰을 확인한 유리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집이 기울면서 친구라고 여겼던 것들로부터 손절당한 그녀였기에 연락이 올 곳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연류동 강신재의 집에서 특별히 할 일이라고는 없었기에 핸드폰만 보며 시간을 죽이던 그녀였다.

그러다 재벌가 혹은 연예가의 뒷얘기를 전해 주는 채널이 뜨끈뜨끈한 소식이라며 올린 게시물을 보고 말았다.

< K그룹 후계자로 알려진 K 건설의 K, 수려한 외모의 일반인 여자 친구와 공개 연애 >

게시자는 이런 게시글에 익숙했는지, 관련 사진은 싣지 않았다. 다만 K 건설에 다니는 제보자로부터 K가 엄청난 미모의 여자 친구와 함께 구내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시간을 아껴 데이트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게시글은 뮤지컬 공연장과 카페, 유명한 맛집에도 나타난 두 사람의 꿀 떨어지는 모습을 소개하며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손길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음을 덧붙였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공개 연애의 행보가 재벌치고는 일반적이지 않아 놀라우면서도, 그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반응이 주였다.

누가 봐도 강태서와 윤재인에 관한 게시글이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유리가 핸드폰을 부술 듯 노려보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관장님께서 건너오라고 하십니다.”

“…….”

“별관 서재에 계십니다. 그럼.”

할 말을 전한 고용인이 사라지자 유리가 불만이 가득한 입술을 씰룩였다.


“늙은이, 귀찮게 오라 가라야?”

제 편이 아닌 게 분명한 임 관장의 부름이 달가울 리 없다. 임 관장이 머무는 별관으로 가기 전, 화장대 거울을 보며 제 모습을 점검한 유리가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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