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 그야말로 개막장 (103/123)


#103. 그야말로 개막장
2023.06.23.



“어떡하지……?”

유리는 방문 앞에서 서성이는 중이었다. 하도 물어뜯어 피 마를 날이 없는 손톱을 또 질겅거리는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쩌다 보니 강선 그룹 회장의 본가, 강태서가 어릴 때 지내던 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저녁에 강태서가 다녀간 이후로 불안감이 더 커졌다. 거기다 달라진 환경에서 쉽게 잠이 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유리는 조금 전, 따뜻한 우유라도 한 잔 데워 달라고 할 생각으로 1층에 내려갔다. 제주도 출장 중에 소식을 듣고 밤늦게 귀가한 임홍진 관장과 맞닥뜨린 것은 뜻밖이었다.


“안, 안녕……하세요.”


“……자네와는 나중에 얘기하지.”

 
불쾌한 것을 본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린 임홍진 관장이 옷도 갈아입지 않고 안쪽 서재로 발을 옮겼다. 두려움에 굳어 버린 유리는 계단 앞에 선 채로 임홍진 관장과 강신재 회장이 언성 높여 싸우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연희가 제 앞에서 죽었습니다. 살면서 원했던 사람은 그 사람 하나였는데!”


“그게 어찌 태서 탓이야. 태서는…….”


“그 아이만, 그 아이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사람이 어찌 그리 못났나. 지나간 세월이 몇 년인데! 아직도 누구든 미워하지 않고는 안 되겠나? 자네 살자고 기어코 아무 죄 없는 자식 행복을 망치려는 게야? 그래야 성이 풀리겠어?”


“네, 그렇게 할 겁니다.”


“……해 보게. 나는 최선을 다해서 태서가 저 좋은 대로 살게 할 테니. 아비가 이 모양인데 할미라도 그 애 편이 되어 줘야지.”

 
어느 집이나 사연이 있다지만, 강신재 회장이 제 아들인 강태서를 그렇게나 끔찍하게 여기는 줄은 몰랐다. 강신재 회장의 말만 들어 보면 강태서가 당장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대충 듣기만 해서는 누군가의 죽음을 두고 강태서를 탓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임 관장의 반응으로 봤을 때 강태서로서는 억울한 상황인 듯했다.


“아, 뭐야. 황태자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개털이었어?”

입술을 씰룩이며 손톱을 짓씹는 유리의 안중에 친부에게 미움받는 강태서에 대한 걱정이나 동정 따위는 없었다. 어차피 강태서가 가진 것들을 동경하고 그 잘난 외모에 끌렸을 뿐이다.

국내 시가 총액 1위 기업의 안주인이 되는 날을 바라며 호화로운 삶을 꿈꿨다. 강신재 회장의 유일한 법정 상속인인 강태서가 무리 없이 강선 그룹을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처음 강선 전자 사옥에 찾아갔을 때, 유리는 제가 뭘 바라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강신재 회장의 눈에 들어 뭐라도 하나 건질 수 있기만을 노릴 뿐이었다.

그런데 강신재 회장이 제 편을 들어 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거머쥔 유리는 환상에 젖었다. 이젠 다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오래도록 바라 왔던 꿈이 현실로 이어지는 지름길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강신재는 강태서에게 강선 그룹을 물려주고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들이 불행하기를 바라는 마당에 부와 권력을 쥐여 줄 리 만무했다.


“잘난 척은 그렇게 하더니, 별것 아니었잖아? 음……. 그렇다고 놓치기는 아까운데…….”

강태서는 그야말로 연예인 뺨을 후려치고도 남을 외모와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남자로는 재벌가에서 그가 유일했다.

강태서를 만난 이후로 그의 너른 어깨에 손을 얹고 매끈한 뺨을 어루만지고 탄탄한 가슴에 기대는 제 모습을 상상하며 몸이 달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강선 그룹에서 내쳐져 빈털터리가 된 강태서에게도 설렐 것은 당연했다.


“일단, 할머님은 태서 씨 편인 거 같으니까.”

지금이라도 발을 뺄까 고민하던 유리는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빛나는 남자를 윤재인에게 주기에는 너무나 아까웠기 때문이다.

강태서와 눈을 맞추고 그의 손에 뺨을 비비는 윤재인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그의 품에 안겨 쏟아지는 입맞춤에 웃음을 터뜨리며 그와 살을 맞대는 윤재인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유리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뿌드득, 이를 가는 그녀가 분노에 휩싸여 커다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 자리에 제가 있어야 한다. 강태서의 애정 담뿍 담긴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것은 윤재인 따위가 아니라 저여야 마땅하다.


“내가 윤재인 걸 탐낸 게 아니야. 윤재인이 내 걸 탐낸 거야. 주제도 모르고. 더러운 게.”

사실이 어떻든, 제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합리화를 마친 조유리의 시선이 장식장 안에 놓인 액자를 진득하게 핥듯이 바라보았다.

태서가 영국에서 프리스쿨을 졸업할 때 찍은 사진이었는데, 방의 주인을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기도 했다.

강태서가 지내던 방이라고 하지만, 생활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태서는 아주 어릴 때 이 집을 떠나 영국으로 떠났다. 그 후 이 집에 머문 날을 양손으로 꼽을 수도 있었기에 사실 태서는 이 방을 제 방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만약 태서가 강태서의 방을 차지했다고 우쭐거리는 조유리를 봤다면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유리에게 태서의 의중 따위는 상관없었다.


“강태서는 내 거야.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강태서가 저를 원하든 말든, 그것도 상관없다. 그를 제 곁에 데려다 놓는 것은 강태서보다 더 막강한 힘과 부를 가진 강선 그룹의 회장 강신재라고, 조유리는 결론지었다.

그러니 기다릴 것이다. 언젠가 강태서가 내쳐지더라도 그 탐나는 남자를 한 번쯤은 제 손에 쥐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황태자가 아닌 강태서도 잠깐 상대하기에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두고 봐. 강태서가 개털이라고 해도 윤재인한테는 안 버려.”

강신재 회장은 유리에게 이 방을 신방으로 꾸미라고 했다. 시아버지, 시할머니와 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상대가 강태서라면 참을 수 있다.

조유리가 입술을 늘어뜨리며 침대에 누웠다. 태서는 한 번도 덮어 본 적 없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그의 향기에 취한 듯 웃던 그녀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저와 강태서의 결혼식이 화려하게 열리는 호텔 앞, 초대받지 못한 윤재인이 바닥에 엎어져 우는 모습을 상상하는 유리의 의식이 수마에 잠겼다. 비틀린 입매가 한껏 휘어진 채였다.


 

* * *



“그래도 괜찮겠어요?”

“내가 묻고 싶은데. 재인 씨야말로 이런 나, 괜찮겠습니까?”

차에서 짙은 키스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퇴근을 지시받은 기사가 내리자마자 몸을 숙인 태서가 다급하게 입술을 겹쳐 왔고, 꽤 오래도록 재인의 입술을 탐하던 남자는 그녀와 함께 앞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굳이 손을 끌어다 제 허벅지에 올려놓은 채 운전하는 그가 아슬아슬해 보여서 재인이 입술을 달싹여도 봤지만, 목울대를 크게 오르내리며 인내하는 게 보이는 남자에게 뭐라 붙일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가 차고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그가 덮치듯 달려들었다.

처음부터 짙었던 입맞춤은 쉴 새 없이 이어졌고, 그의 손에 이끌린 재인은 차고에서 현관으로, 현관에서 복도로, 복도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침실로, 그리고 다시 욕실로, 또다시 침실로 밀려나듯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평소보다 성급하고, 여느 때와는 다르게 조금은 거칠기도 했다. 하지만 갈급한 그의 부름에 재인은 착실하게 응했고, 그녀가 밀어내지 않고 무리해서라도 다 받아 준다는 것을 깨달은 태서의 몸놀림이 뒤늦게 느긋해졌다.

배려가 부족했다는 것을 인지한 그가 미안함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며 재인의 코끝에 입 맞췄을 때, 재인은 평소의 강태서로 돌아온 그를 반기며 태서의 코끝을 깨물었다.

몇 번 더 입맞춤이 이어진 후, 가까스로 열기를 가라앉힌 그는 가만히 연류동에 갔었던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래서 대비해야겠습니다. 아니, 대비라기보다는 선수를 쳐야 할 겁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를 거라서 나도 준비를 많이 해야 할 텐데, 그 과정에서 재인 씨를 서운하게 할지도 모르겠고. 아무래도 더 바빠질 거라서.”


“…….”


“왜 말이 없어요. ……미안. 미안해. 서운하고 불안하게 만들어서.”


“그게 아니라…….”

 
가만히 태서의 뺨을 매만지던 재인이 입을 다물었다.

재인은 세상에 많고 많은 좋은 아버지들을 두고, 왜 제 아버지라는 작자는 저 모양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가 사랑하는 남자의 아버지라는 사람도 조대훈 못지않았다.

두 사람 다 자식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같았다. 하지만 조대훈은 끝에 가서 유리를 이용해 먹을 생각이라도 했다.

그녀의 가치를 높게 본 것이다. 반면에 강신재 회장은 태서를 무시했다. 그가 얼마나 빛나건 말건 찍어 누를 생각인 것이다.

한참이나 태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인은 스르륵, 그에게 안겼다. 그러고는 그의 허리에 팔을 둘러 힘주어 끌어당겼다.


“불안하지 않아요. 서운하지도 않고.”


“…….”


“그냥, 태서 씨가 괜찮으면 좋겠어.”

 
그가 뭘 어떻게 하든 최대한 그의 편에 서서 그를 돕겠다는 뜻을 밝히는 재인을, 태서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대비책을 두서없이 쏟아 내기 시작했다.


“강신재 회장은 업무적으로는 약점을 만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말 조금 그렇지만, 현양 건설과는 규모가 달라. 내가 감히 덤벼들 수 없을 만큼.”

“응.”

“부자간에 물고 뜯는, 그야말로 개막장을 보게 될 텐데. 나한테 정 안 떨어질 자신 있습니까?”

“그 개막장, 내가 먼저 찍은걸요.”

“…….”

“말했잖아. 나는 태서 씨만 괜찮으면 돼요.”

흔들리지 않는 재인의 답변에 태서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재인은 오늘 하루 고단했을 그의 마음을 조금 더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그리고 태서 씨가 시간이 된다면.”

“응.”

“조유리, 내 앞에 데려 놔 줘요.”

“……응?”

“화나잖아. 내 건데. 강태서.”

“…….”

“걔는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하는 짓이 유치해서 놔뒀는데, 태서 씨 탐내는 건 못 참아. 머리채 잡고 싸워도 돼요? 태서 씨야말로 나한테 정 안 떨어질 자신 있어요?”

마치 엄청난 고백이라도 받은 남자처럼 설레는 얼굴을 한 태서를 보고 재인이 웃음을 터뜨리려던 때였다. 태서가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이 떨어지다니? 지금 그 말에 또다시 반했는데. 머리채 마음껏 잡아요. 제일 비싼 가발을 맞춰 놓고 응원할 테니까.”

“난 안 질 건데? 가발은 조유리가 써야 할 거예요.”

재인이 지더라도 그녀를 이긴 인간을 찾아가 싹 밟아 주고도 남을 사람이 태서였다. 하지만 태서는 그런 제 속내를 드러내는 대신 지금 이 순간 저를 위해 두 팔 걷고 나서겠다는 재인을 감동 어린 시선으로 찬양했다.


“음, 클라이밍 연습해야겠어요. 태서 씨가 봐줘요.”

“……조유리 머리채 잡을 악력 키우게?”

“응.”

“그 말에 나 또 설레는데.”

지구를 구해 낼 여전사 대하듯 저를 바라보는 태서의 눈빛에 재인이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전사의 손끝마다 입술을 내리며 또다시 짙어질 입맞춤을, 격정으로 치달을 밤을 예고하는 남자를 향해 그녀가 스스럼없이 팔을 벌렸다.

서로를 위해 더 용기 내기로 한 밤, 부드러운 달빛이 하나인 듯 겹쳐진 두 사람을 포근히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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