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102/123)


#102.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2023.06.20.



“어쩌자고 저 애를 집에 들인 게야!”

“제 며느리가 될 아이입니다. 호텔을 전전하게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게, 이게 무슨……!”

“갑작스럽게 상황이 악화하여 오갈 곳이 없다던데, 시가에서 품어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강 회장!”

“관장님께서 자리에 계시지 않아 제가 대신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본부장이 어릴 때 쓰던 방도 비어 있으니, 거기서 편히 지내면서 결혼 준비하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제주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임홍진 관장의 노기 어린 음성에도 강신재 회장의 목소리는 차분하기만 했다. 강신재의 서재 안,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을 사이에 두고 날 선 신경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본부장도 이제는 가정을 꾸려야죠. 자식이 다 컸으니 저도 아비 노릇을 하려는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자식……? 아비 노릇?”

강신재 회장이 강태서를 두고 절대로 쓰지 않던 말들이었다. 그랬기에 이런 상황에 굳이 그 단어를 사용하는 아들을 향하는 임홍진 관장의 분노가 더 컸다.


“제 아비 눈길 한번 받아 보려고 발버둥 치는 아이를 평생 외면해 놓고, 인제 와서 아비 노릇을 하겠다고? 그 아비 노릇이라는 게 고작 이딴 짓을 벌이는 게야?”

“손부 감이 눈에 차지 않으셔서 그러십니까? 현양 건설이 그 모양이 되어서? 이제 강선 그룹은 사업 확장을 위해 억지로 혼맥을 맺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태서는 저 살고 싶은 대로 살게 해 줘야지!”

“살고 싶은 대로……?”

느긋하게 찻잔의 모서리를 매만지던 신재가 고개를 들었다. 늘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눈동자가 한순간 맹렬한 분노로 번뜩였다.


“누구 마음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살게 합니까?”

“……아범아. 신재야.”

“연희가 제 앞에서 죽었습니다. 살면서 원했던 사람은 그 사람 하나였는데!”

“그게 어찌 태서 탓이야. 태서는…….”

“그 아이만, 그 아이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어느덧 환갑이 훌쩍 지난 아들은 아직도 삼십여 년 전에 머물러 사는 듯했다. 오랜 원망과 그리움에 고집이 더해져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 버렸다.

곱씹을수록 부질없는 후회만 쌓여 갔다. 오래전, 강신재는 강선 그룹을 물려받기 위해 부모가 정해 준 사람과 결혼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던 여자 서연희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3년만. 연희야, 3년만 기다려 줘.”


“당신이 내가 아닌 다른 여자랑 결혼한다는데 그걸 어떻게 기다려? 당신, 내가 우습니?”


“어른들 눈을 속이기 위한, 허울뿐인 결혼이야. 그 여자도 동의했어. 손끝 하나 스치는 일 없어. 방도 따로 쓸 거고. 어떻든 3년 안에 회사를 키울 거야. 그렇게 되면 내가…….”


“혹시 내가 불임인 것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래?”


“아니야! 나는 너만 있으면 돼. 아이는 바라지 않아.”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믿어 줘. 제발. 아이 따위 필요 없어. 맹세할게. 아이 때문에 내가 너 아닌 다른 여자를 안는 일은 없어. 연희야, 제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던 여자는 결국, 신재가 결혼한 날 자취를 감췄다. 그날부터 신재는 점차 폐인이 되었다. 일에 미쳐 있지 않으면 술에 취한 채였고, 꿈에서도 서연희를 찾았다.

그러다 독한 술에 진통제를 섞어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서재에서 잠들어 있던 그에게 담요를 들고 다가온 것은 남처럼 지내던 아내, 유정하였다. 그리고 신재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서재에서 잠이 깼을 때, 지난밤을 통째로 잊은 그의 품에는 흐트러진 유정하가 있었다. 꿈에서 서연희를 안았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자마자 숙취로 인한 두통과 함께 짙은 구토감이 그를 덮쳤다.


“신재 씨……?”


“잊어.”


“…….”


“없던 일이야.”

 
신재는 도망치듯 집에서 나와 호텔로 향했다. 다시 언급하지만 않으면 없던 일이 될 거라고, 그저 단 한 번의 실수였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그날 이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내의 임신 사실을 모르고 있던 그는 결국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홀로 지내고 있던 서연희를 찾아냈다. 그리고 엎드려 빌었다. 이제 2년만 더 기다려 달라고. 내게는 너뿐이라고. 나는 너 없이 살 수 없다고.

술에 취해 유정하를 서연희로 착각하고 안은 것이 너무나 끔찍한 나머지 기억 속에 묻어 버렸다. 그래서 그는 변치 않는 제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연희에게 더 간절히 매달렸다.


“연희야, 나는 아이 바라지 않아.”


“내가 원해. 나는 당신 닮은 아이를 갖고 싶어. 그러면 당신 부모님께서도 나를 인정해 주실 거야.”

 
아이를 원했던 그녀가 불임 클리닉에 다니기를 원했다.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었던 신재는 믿을 만한 부인과 의사에게 그녀의 진료를 맡겼다. 하지만 그 병원에 만삭의 아내가 정기적으로 진료받으러 다닌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신재가 널 찾아 다시 곁에 두었다는 건 들었다만, 여기서 보는구나.”


“……네.”


“내가 이렇게 부탁하마. 이제 곧 태어날 애한테는 아빠가 필요해.”

 
병원에서 만난 임 관장은 연희를 알아보고 제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 달라 부탁했다. 그때,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는 연희의 시선은 맞은편에 앉은 유정하의 배에 오래도록 고정되어 있었다.

예정일이 다 되어 간다고 했다. 여리여리한 이미지의 여자는 부른 배를 뽐내지 않았다. 오히려 부끄러운 듯, 또는 미안한 듯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숄로 배를 덮은 뒤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런다고 가려질 배가 아니었기에 연희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엎어져 울었다. 제게 거짓말을 하고 다른 여자에게서 아이를 본 남자가 미웠고, 그 여자가 곱고 아름다워서 서러웠다.

그리고 며칠 뒤, 출장을 다녀온 신재가 연희를 찾았을 때, 고통의 시간을 보내느라 수척해진 그녀는 이미 짐을 싼 뒤였다.


“연희야!”


“놔! 어떻게,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나밖에 없다며! 아이 따위 필요 없다며!”


“무슨 일인데 이래. 우리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차라리 그 여자가 내 머리채라도 잡았으면 내가 이렇게 우스워지지는 않았을 거야.”

 
영문을 모르는 신재가 악을 쓰듯 울며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연희를 겨우 잡았다. 하지만 연희는 신재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당신, 끝까지 모르는 척이네. 이럴 거면 당신한테 나 아닌 다른 여자는 없을 거라는 말이나 하지 말지 그랬어. 언제까지 속일 생각이니? 이제는 얼마나 더 참으라고 말할 건데? 아이가 다 클 때까지? 당신이 나한테 질릴 때까지?”


“뭐……?”


“곧 출산이라며. 어쩌면 벌써 낳았을지도 모르겠네. 설마 몰랐다고 할 거야?”


“그게 무슨…….”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당신이 너무나 미워. 사랑한다는 말이나 하지 말지! 아이 따윈 원하지 않는다는 그 말, 차라리 하지 말지!”


“아이……?”


“그래! 당신 아이! 나는 낳아 줄 수 없는, 당신 아이! 그 여자가 낳은 당신 아이!”


“연희야!”

 
강신재를 떠민 서연희가 뒤를 돌아 뛰어갔다. 뒤에서 저를 잡으려 쫓아오는 강신재를 의식한 그녀가 갑자기 차도에 뛰어든 탓에, 미처 멈추지 못한 차가 그녀를 덮쳤다.

뒤따라간 강신재와 눈빛 한번 교환하지 못한 즉사였다.

피 흘리는 그녀를 끌어안은 강신재가 구급대원들과 함께 병원으로 이동했고, 몇 시간 뒤 서연희의 빈소에 허망하게 서 있던 그는 제 핸드폰에 남은 음성 메시지를 확인했다.


―신재야, 아이가 태어났다. 너를 쏙 닮은 아들이구나.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오너라.

 

 
모친인 임 관장이 그에게 전화한 것은 공교롭게도 그가 구급차 안에 있을 때였다.

구급대원들이 연희를 심폐 소생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왔던 전화를 신재는 받지 않았고, 그렇게 남은 음성 메시지를 뒤늦게 확인한 것이었다.


“으허……. 허, 흐어, 어흐으……윽, 연희야, 연희야…….”

 
텅 빈 빈소에 엎드려 울부짖던 남자는 오래도록 일어서지 못했다. 처음에는 연희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고, 제가 사랑한 여자의 죽음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그녀를 죽게 만든 원인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되새겼다.

단 하룻밤뿐이라고 해도, 실수라고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자신을 탓하기엔 사랑하는 이를 눈앞에서 잃은 젊은 강신재의 슬픔이 너무도 컸다.

홀로 남아 혹독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제가 받게 된 벌이라 생각한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그 벌을 받기 위해 비난의 화살을 제가 아닌 다른 이에게 돌렸다.

저 몰래 아이를 임신하고 숨긴 채 지내다가 출산까지 한 유정하, 그리고 그런 유정하를 도와 서연희에게 아들을 떠날 것을 종용했을 부모,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저지른 부정의 증거가 된 아이. 그중에서,


“신재 씨, 나는……, 나는요.”


“유정하, 약속이 다르잖아. 우리 결혼은 3년만 유지하기로 했어. 남처럼 지내다가 이혼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것에 당신도 동의했고. 잊었나?”


“……그때는 그랬어요.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유정하가 첫 번째였다.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예전부터 그를 사랑하고 있었노라 고백했다. 그래서 이혼해 줄 수 없다며 버텼다. 따로 사랑하는 여자가 있던 신재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기억에 없는 하룻밤을 보낸 뒤 만난 적 없던 유정하가 아기를 안고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죽은 서연희의 사십구재를 지낸 날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서연희가 죽은 그날 태어난 강태서의 49일째 날이기도 했다.


“내가 잘할게요. 그러니까 신재 씨, 우리 아기를 봐서라도…….”


“내 눈에 띄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


“당신도. 당신의 그 아이도.”

 
임신한 것을 숨기고 친정에서 눈을 피해 있다가 아기를 안고 나타난 여자가 역겨웠다.

신재는 바라지도 않았던 아이를 안고 남편의 애정을 바라는 여자를 외면했다. 언뜻 보아도 저를 그대로 닮은 아이는 단 하룻밤의 실수로 인한 결과물이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 밤, 유정하를 안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유정하를 서연희로 착각하고 당겨 와 안게 만들었던 술을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서연희가 그에게서 도망쳐 숨지 못하도록, 그녀를 설득했으리라.

시체처럼 누워 죽은 사람의 사진만 안고 있던 그가 서연희의 사십구재를 기점으로 일어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자연스럽게 강선 그룹의 총수가 된 신재는 아내의 처가를 몰락시키고 그룹 내 임홍진 관장의 세력을 약화했다. 유정하는 철저하게 고립시키며 제 분노를 터뜨렸다.

서연희가 부러워했을 여자, 유정하와 서연희를 받아들이지 않은 모친, 임홍진 관장을 겨눈 복수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모진 냉대를 견디지 못한 여자는 죽었고, 어머니는 늙었다. 결국 모든 화살은 어린 태서를 향하게 되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아이가 무슨 죄란 말인가. 먼 기억을 더듬는 임 관장이 주름진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세상 몹쓸 아버지가 된 아들이 미련스러운 동시에 딱했다. 하지만 마음 한 곳 나누지 못하고 자란 태서만큼은 지켜 줘야 했다.

이 끔찍한 굴레를 끊어 내는 것이 마지막 사명인 양 되새기는 그녀가 아들의 눈을 바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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