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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기대해 (101/123)


#101. 기대해
2023.06.16.



“왔어요?”

태서가 본채에 들어서자마자 조유리가 인사를 건네 왔다. 비교적 편한 옷차림의 유리가 제집인 양 맞이하는 모양새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뭡니까?”

“코트 줘요.”

“미쳤습니까?”

제 코트를 향해 손을 뻗는 유리를 피해 태서가 뒤로 몸을 물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짜증이 역력한 표정에 불쾌함이 잔뜩 묻어났다.

잠시 당황해하던 유리는 입술을 꾹 말아 물고는 기어코 태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굴이 붉어진 채였다.


“코트, 벗어서 주세요.”

“내 코트를 왜 조유리 씨한테 줍니까?”

“그거야…….”

태서는 코트를 벗어 제 손에 들고는 조유리를 미친 사람 보듯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돌려 거실을 훑었다. 평소라면 현관에 나와 있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집 전체를 총괄하는 정 실장도, 주방 살림을 맡은 황 여사님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정 실장님.”

그리 크지 않은 그의 부름에 주방 쪽에서 나이 지긋한 정 실장이 빠른 걸음으로 나타나 태서의 앞에 섰다.


“오셨, 오셨어요…….”

“네. 옷 좀 부탁드립니다.”

“아, 네.”

어딘가 경황이 없어 보이는 정 실장은 태서의 코트를 들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도 제가 아닌, 유리의 눈치를 살피는 게 태서의 눈에 보였다.


“하…….”

그제야 태서의 입술 새로 실소가 샜다. 조유리가 이 집에 머문 것은 고작 반나절이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집에서 30년 넘게 일한 사람들을 장악하고 쥐락펴락했을 조유리를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조유리 씨, 왜 여기에 있습니까?”

“밖에 많이 춥죠? 황 여사님, 얼른 저녁 차려 주세요.”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태서의 날 선 시선에 유리가 움찔움찔하며 손톱 끝을 매만졌다.


“조유리 씨는, 배알이 없나?”

“…….”

“자존심만큼은 어디 가서도 지지 않을 만큼 센 사람인 줄 알았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있습니까? 뭘 하려고?”

“태서 씨, 나는……. 나는 내 자리를 찾으려는 것뿐이에요. 세상 모두가 알고 있어요. 내가 태서 씨의 약혼…….”

“역겹네, 진짜.”

더는 마주하기도 싫다는 듯, 태서가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국 냄비 앞에 서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황 여사를 지나쳐 냉장고 문을 연 그가 생수를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도 사라지지 않은 구토감에 물을 몇 모금 더 마신 후에야 몸을 돌렸다. 주방까지 쫓아온 조유리를 마주하니 다시금 치미는 불쾌감은 어쩔 수 없었다.


“아버님께서 조금 늦으실 것 같다고, 우리 둘이 먼저 식사하라고…….”

“하, 아버님?”

강신재 회장을 가리켜 “아버님”이라 칭하는 유리의 뻔뻔함에 웃음이 터졌다. 서른이 넘도록 살면서 태서도 몇 번 불러 본 적 없는 “아버지”라는 호칭과 비슷했기에 더 우스웠다.


“징그럽다고 여기는 상대와 마주 앉아 밥을 먹기에는 내 비위가 약합니다.”

“징, 징그럽다구요……?”

“소름 끼칠 만큼.”

치욕적인 응대에 석상처럼 굳어 버린 조유리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서는 몸을 돌려 거실로 향했다.

더는 말도 섞기 싫었다. 제 뒤에서 유리가 커다란 눈을 치뜨고 저를 노려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아버님께서!”

뒤에서 달려와 제 팔을 붙든 유리의 손을 뿌리치듯 떼어 내는 태서의 눈빛이 사나웠다. 조유리가 조금만 덜 뻔뻔했다면 겁먹고 알아서 떨어져 나갈 기세였다.


“……아버님께서 인정해 주셨어요.”

“뭘 인정했다는 겁니까?”

“저를, 저를 태서 씨 결혼 상대로…….”

결국 이거였나.

제 아비란 자가 저를 위해 준비해 둔 상황이 그야말로 뭐 같아서 태서의 입술 사이로 짧은 욕 몇 마디가 절로 새어 나왔다.

그린 듯 잘난 얼굴로 씹어 뱉는 태서를, 유리가 둥근 눈을 홉뜨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마저도 황홀하다는 듯이.


“내가 너를 인정 안 하는데?”

“……윤재인 만나는 것, 이해할게요. 숨겨 두고 질릴 때까지 만나요.”

“숨겨 둬? 내가 왜. 세상이 다 아는 연애를 할 건데. 질려? 그럴 리가. 볼 때마다 새로운데.”

 

 


“아무리, 아무리 그래도 태서 씨랑 결혼하는 건 나…….”

“강선 그룹 며느리 자리가 그렇게도 탐이 나나? 그런 거라면 이참에 아예 강선 그룹 안주인이 되는 건 어때? 그런 투지라면 회장님 공략도 가능하겠어.”

“그, 그건…….”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기분이 더러운데. 내가, 너 따위랑, 뭘 해?”

금방이라도 앞에 놓인 사람을 찢어발길 듯한 눈빛이었다. 일갈하고 돌아선 태서의 뒤에서 분을 못 이겨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뭘 잘못했어?”

“……뭐?”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강태서의 약혼녀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 왔어. 내가 원해서? 아니! 네 할머니가! 내 부모님이! 사람들이! 다 나를 그렇게 부르고 대했어!”

악에 받친 조유리의 목소리가 꺽꺽 갈라졌다. 태서는 무감한 얼굴로 제 앞에서 떠들어 대는 조유리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이십 년 넘게 그렇게 믿고 살았어! 그동안 아무 말 안 했잖아! 싫다, 안 한다, 이런 말 없었잖아!”

“좋다, 한다, 내가 그런 말은 했나? 그 전에, 어른들끼리 웃으며 한 얘기를 상대 얼굴도 보지 않고 지키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 그건 당연히 돌아가신 분들의 유언처럼……!”

“내 약혼녀라고 떠들고 다녔던 게 정말 유언을 지키려는 순수한 의도였나? 강선 그룹 며느리 자리가 탐이 난 건 아니었고? 조부님들끼리의 약속이 약혼이 아닌, 회사 병합이었어도 그렇게 악착같이 응했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나?”

허를 찔린 유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코랄빛 립스틱이 곱게 발린 입술만 짓씹는 사이, 태서가 비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를 향한 비난을 이어 갔다.


“탐이 났던 거잖아. 그래서 떠들고 다닌 거였잖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거, 즐겼잖아. 그 덕 실컷 봤잖아. 아니라고 할 수 있나? 내 옆자리가 정말 네 자리라고 생각해?”

“……왜 이제 와서 내가 아니라는 건데? 처음 시작은 내가 아니었다지만, 강태서 약혼녀는 20년간 나였어. 아버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강태서의 약혼녀로 살아온 내 시간을 태서 씨도 인정해야 한다고.”

태서가 지끈하게 죄어 오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조유리는 태서의 약혼 상대가 제가 아닌 윤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패악을 부리며 고집부리는 딸에게 지승희가 털어놓은 모양이었다.

다 알고도 이러는 걸 보면 정말 갈 데까지 가겠다는 뜻이었다. 태서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조유리를 향해 얼굴을 기울였다.


“네가 원해서 그렇게 살아온 걸, 왜 내가 보상해야 하지?”

“그러면 나는? 나는 왜 이런 대우를 참아야 해?”

“참지 마. 나가. 나가서 네가 가진 능력으로 벌어 먹고살면 아무도 너한테 뭐라고 안 해.”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번진 아이라인 너머로 눈물이 시커먼 길을 내며 흘러내렸다. 시뻘게진 눈에는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가득했다.


“네 것이 아닌 것을 탐한 잘못.”

“…….”

“진작에 모든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던 부모를 둔 잘못.”

애초에 욕심에 눈이 어두워 진실을 함구했던 부모를 향해야 할 원망이었다. 그걸 왜 저에게 쏟아 내냐는 태서의 물음에 조유리가 입을 딱 다물었다.


“그리고 가장 큰 잘못은.”

더는 얼굴 보고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는 듯, 태서가 돌아섰다.


“감히 윤재인의 것을 빼앗으려 한 것.”

“…….”

태서가 말한 “윤재인의 것”은 저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 조유리는 재인의 재능과 아름다움을 질투했다.

재인을 향하던 선망 어린 시선을 시기하고 재인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던 친구들을 괴롭혀 끊어 냈다.

더없이 반짝이는 재인이 빛을 잃기를 바라며 몹쓸 짓을 수도 없이 벌였고, 정재훈을 부추겨 납치를 도모하기도 했다. 그 결과 하마터면 재인이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태서는 그 모든 것을 조유리의 가장 큰 잘못이라고 지적한 것이었다.


“정 실장님.”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한 유리를 외면한 태서가 현관 쪽으로 다가가며 정 실장을 불렀다.


“외투 주십시오.”

“회장님께서 곧…….”

“주십시오.”

단호한 태서의 말에 정 실장이 코트를 가지고 왔다. 외투를 챙겨 입은 태서가 현관을 나서기 전, 슬쩍 고개를 돌렸다.


“기대해. 네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확실히 깨닫게 해 줄 테니까.”

태서의 시선에 유리가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이 무서운 예고가 그녀를 향한다는 것은 듣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 * *



“출발 안 합니까?”

“…….”

“출발 안 하고 뭐…….”

“못됐다, 태서 씨.”

차에 타기 전, 외투를 벗어 대충 안쪽에 던지고 자리에 앉자마자 눈 감은 태서였다. 빨리 이 집을 벗어나고 싶은데 시동만 켜놓고 출발하지 않는 기사에게 한마디 하려던 참이었다.

끔찍한 두통에 구토감까지 겹쳐서 신경이 잔뜩 곤두선 상태였다. 조유리에게 어떤 나락을 안겨 줄지, 제 아버지란 인간에게 어떻게 응해 줘야 할지 고민하는 중에 문득 들려온 목소리가 꿈만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재인의 등장에 돌처럼 굳은 태서의 목이 삐걱삐걱 돌아갔다.


“기사님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

“하……?”

제 코트를 무릎에 얹고 가만히 제 손을 잡아 오는 재인은 환영이 아니었다. 뒤늦게 차 안에 가득한 그녀의 향기를 감지한 태서가 깊은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얼음장 같던 온몸에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손 차갑다. 집 안에 있다가 나온 사람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요.”

“…….”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요? 나, 태서 씨 나가고 거의 바로 온 건데. 하마터면 엇갈릴 뻔했어. 밥도 못 먹었죠?”

“…….”

“뭐 먹으러 갈래요? 아니면 우리 어디 가서 좀 걸을까? 일단 여기는 벗어나요. 기사님, 출발해 주세요.”

그제야 차가 미끄러지듯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서는 말을 잊은 채 제 옆의 재인만을 바라보았다.

연류동에 가기 싫어하는 저를 보내고 걱정이 되어 장 실장에게 전화했을 그녀가 그려졌다. 장 실장의 도움을 받아 왔으려나. 그의 차에 미리 타고 그를 기다리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으려나.

어떤 고통도, 고민도 잊게 만드는 마법 같았다. 재인이 여기까지 찾아와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태서는 오물 세례를 맞은 듯 끔찍하던 기분을 말끔히 털어 낼 수 있었다.


“아무리 그렇게 봐도 안 돼.”

“…….”

“안 된다니까요. 기사님도 계시는데.”

지금 제 표정이 키스를 조를 때의 얼굴과 비슷한 걸까. 앞좌석을 흘끔거리며 작게 소곤거리는 재인이 가슴에 사무치게 사랑스러워서, 태서의 입매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면 손에만. 손에만 해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쭉 뻗어 손을 내어 주는 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서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시선은 재인에게 고정한 채였다.


“기사님.”

“네.”

“퇴근하시죠. 지금.”

퇴근을 지시하며 재인이 허락한 손등에 입 맞추는 태서의 은근한 눈빛이 그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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