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 아무도 우리를 떼어놓지 못하게 (100/123)


#100. 아무도 우리를 떼어놓지 못하게
2023.06.13.



“대체 조유리가 왜 연류동에 있다는 겁니까?”

재인과 꿀 같은 시간을 보낸 태서는 뒤늦게 장 실장에게 연락했다. 단잠에서 깨어나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잠든 재인을 두고 테드가 머무는 주택으로 넘어왔다.


“거기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요 며칠 강선 전자에 기웃거렸다는 보고는 들어 알고 있었다. 조유리가 강선 전자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태서는 일찍이 여러 가능성을 두고 고민했다.

강선 건설로 찾아가 봤자 강태서를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고 거기라도 찾아가 보자고 했을 수도 있다는 게 테드의 생각이었다. 차마 연류동 본가로는 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라는 앰버 역시 테드의 말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장 실장의 생각은 달랐다.


“궁지에 몰린 조유리가 강신재 회장님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려던 건 아닐까요?”

 
그 말에 태서는 물론, 강신재 회장의 성격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앰버와 테드마저 헛웃음을 터뜨렸다.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반응이었다.


“한국에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는 속담이 있다면서요. 조유리가 아무리 제멋대로 군다지만, 무턱대고 강선 그룹 회장을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하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조유리는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겁니다. 충분히 시도는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본부장님을 향한 집착도 여전한 것 같습니다만.”


“장 실장의 말이 맞는다면 오히려 잘 됐습니다.”


“네……?”


“강신재 회장님은 만나 달라고 해서 만나 주지도 않을뿐더러, 만나더라도 도와달라는 말에 눈도 깜빡이지 않을 사람이니까요.”

 
강신재는 타인에게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이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무감했다. 그러니 만약 조유리가 정말로 강신재를 만나 제 처지를 읍소하며 도움을 부탁했다면 그녀의 꼴만 우스워졌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 아침에 강선 전자 1층에서 난리를 친 조유리가 강신재와 함께 회장실로 갔다는 것인지. 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아는 강신재는 쓸데없이 소란을 일으키는 외부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을 사람이다.

회장의 성격을 아는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끌어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건, 강신재가 나서서 조유리를 회장실로 이끌었다는 뜻이었다.


 


“지금 임홍진 관장님께서 제주 아트 센터 관련 출장 중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은 집이 비었다는 건데…….”

“네, 임홍진 관장님께서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모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조유리는 홀로 강선 전자를 나서자마자 묵고 있던 호텔로 이동한 뒤 짐을 챙겨 체크아웃했다. 호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강선 전자 소속 법인 차량이었고, 조유리를 태운 차는 연류동 본가로 향했다.

그 후로 세 시간도 더 지났다. 조유리는 현재까지도 혼자서 연류동 본가에 머무는 것으로 확인됐다.


“태서, 이건 정말 만약인데. 혹시 조유리가 your step mother 되는 거 아니야?”

{앰버, 한국 드라마 그만 봐요.}

{아니,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들어 봐. 강신재 회장이 조유리한테 반한 거지. 내 취향은 아니지만 조유리 예쁘다고들 하잖아. 한국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랄까, 작고 귀여운 토끼처럼 생겨서.}

{무슨 토끼 성격이 그렇게 더러워요?}

{원래 토끼 성격 더러워. 물론 조유리는 그중에서도 탑이지.}

빠른 눈치와 특정 단어를 통해 앰버의 말을 이해한 테드와 앰버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태서는 관자놀이를 꾹꾹 짚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두통 또 심해진 거야? 신경성이라고 그랬나? 내가 볼 땐 그거 신경성 아니야. 네 두통의 원인은 하나뿐이야. 강신재 회장. 그 사람 아니면 태서가 머리 싸맬 일 없어.}

“…….”

“아무튼, 내 말 들었어? 만약 조유리가 진짜 your step mother……, 만약이라고 했잖아. 뭘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냐?”

“말 같아야 듣지.”

앰버의 엄청난 상상을 눈빛 하나로 일축한 태서가 탁자 위에 놓인 생수병을 향해 손을 뻗을 때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몇 개의 핸드폰 중 하나가 길게 진동했다.

태서의 업무용 핸드폰이었다. 그 가까이 있던 장 실장이 화면을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들어 태서에게 다급하게 건넸다.


“회장님입니다.”

두개골을 지끈지끈하게 욱죄어 오는 것 같은 고통에 찌푸린 태서가 메스꺼움을 참아 내며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는 세 사람을 보던 그가 소파 깊숙이 기대어 눈을 감았다.


“네, 회장님.”

저와 똑 닮은 얼굴로 차갑게 바라보던 강신재를 떠올린 태서의 미간이 좁아졌다.


-일 엉망으로 만든 거 반성하라고 했더니, 쓸데없는 짓만 잔뜩 벌이고 다녔더구나.

“…….”

-복귀해. 주어진 일만 해라. 또다시 되지도 않는 일을 벌여 강선 얼굴에 먹칠한다면 그때는 한국 떠날 생각, 해야 할 게다.

협박이 아니었다. 태서가 한국을 떠나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긴 말이었다. 어떻게든 태서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말에 태서의 입술 새로 피식, 웃음이 샜다.


“네, 알겠습니다.”

-저녁에 연류동에 들러라. 할 말이 있으니.

비서 시켜 전화해도 될 것을 굳이 직접 전화한 것은 제 반응이 궁금했던 걸까.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태서가 몸을 일으켰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조유리를 데려다 놓은 연류동으로 저를 불러서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일까.

오늘부터 한파가 닥친다고 했었나. 그래서 그런지 창밖의 풍경이 스산했다. 아침부터 줄곧 내리는 눈이 거센 바람을 타고 하늘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 * *

요가 매트 위에 앉아 눈을 감은 재인은 눈 뜨지 않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아늑하고 따뜻한 집에서 마음을 비워 내기만 하면 되는데, 자꾸만 재인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이럴 거예요?”

“…….”

“가만히 누워만 있을 거면 같이 하자니까?”

“…….”

“고양이도 아니고.”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아랫배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강태서였다. 재인은 잠시 테드와 앰버를 만난 뒤 집에 돌아와 그 후로 줄곧 제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재인이 요가 매트를 펼 때마다 그 위에 누워 요가를 방해하던 고양이는 집에 없었다. 지난번 태서의 집에 처음 방문했던 앰버가 방에서 야옹거리는 고양이를 발견하고 푹 빠진 것이다.


{세상에, 우아하고 아름다워. 품위가 느껴지잖아. 얘는 분명 고양이 계의 귀족이었을 거야. 거기다 봐, 얘도 날 좋아해.}


{귀찮아하는 것 같은데요?}


{아냐. 그러면서도 계속 내 근처에 와 있잖아. 태서 같은 몰인정한 집사보단 내가 훨씬 더 낫지. 그렇지, 아가야?}

 
그렇게 고양이를 데려간 앰버는 며칠만 데리고 있겠다고 전화해 왔다. 태서는 반가워하며 캣타워까지 싹 실어 보냈다. 그러더니 고양이처럼 재인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말해 봐요.”

“…….”

“무슨 일 있는 거죠?”

“…….”

“정말 고양이가 되기라도 한 거예요?”

아무 말도 없이 재인의 배에 얼굴을 묻고 있던 태서가 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떨어지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이제 준비해야죠.”

“가기 싫은데.”

“그래도 가야 하니까. 저녁 먹고 오는 거죠?”

“굶고 올 겁니다.”

저녁때 연류동 본가에 가야 한다고 말하던 태서는 마치 약 먹는 어린애 같은 표정이었다. 굶고 오겠다는 그의 말이 마음 아픈 동시에 이해가 되기도 했다.

강신재 회장과 마주 앉아 뭘 먹은들 소화나 제대로 될까. 태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인이 그의 손을 잡아끌고 냉장고로 향했다.


“이거라도 먹어요. 어차피 거기 가서 밥도 제대로 못 먹을 거, 배 든든히 하고 가면 좋겠어.”

우유와 함께 두 개 남은 레몬 마들렌을 꺼내어 내미는 재인의 이마에 입 맞춘 태서가 고개 저었다.


“그거 아껴 놓은 건데.”

“태서 씨 연류동 간 사이에 또 구워 놓을 테니까.”

“이번에도 구워서 나만 줄 겁니까?”

“응, 태서 씨만 줄게요.”

재인의 레몬 마들렌이라면 환장하는 상화에게는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이 남자의 응석을 받아 주고 싶었다. 트라우마를 털어놓은 이후로 가끔 이렇게 애처럼 구는 남자가 밉기는커녕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같이 먹어요.”

“아니, 난 태서 씨 먹는 거 볼래요.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서.”

“…….”

“왜 그렇게 봐요?”

듣기 좋은 소리 좀 했다고 금세 깊어지는 눈빛을 모르는 척하며 재인이 슬쩍 몸을 뺐다. 그녀의 뜻을 알아차린 태서가 웃음을 흘리다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기 싫어.”

재인은 강신재 회장이 연류동 본가로 태서를 호출했다는 것 외에는 듣지 못했다. 그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든, 좋은 소식은 아닐 거라는 건 누구나가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다녀와요. 다녀오면, 흡…….”

다녀오라는 말을 하자마자 또다시 태서의 품에 갇히고 말았다.


“다녀오면?”

“뭘 해 줄까? 태서 씨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해 줘야지.”

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목덜미 깊숙하게 코를 묻은 그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재인은 치과에 끌려가는 아이처럼 구는 태서가 이렇게라도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라며 손을 뻗어 그의 너른 등을 쓸었다.

창밖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새하얬다. 종일토록 내리는 눈을 가만히 눈에 담고 있던 재인은 문득 든 바보 같은 생각에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습니까.”

“눈이 많이 와서요.”

“음?”

“차라리 눈이 더 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집에 태서 씨랑 나, 둘만 고립되면 좋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어요. 외부와 연락도 끊겨서 아무도 우리를 못 부르게. 아무도 우리를 떼어놓지 못하게.”

“하…….”

재인의 상상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는 듯, 태서의 숨이 짙어졌다. 재인을 끌어안는 팔에 힘이 더해졌다.

급한 일만 다 정리되면 재인과 함께 어디로든 가서 그녀의 상상을 실행에 옮겨야겠다고 마음먹는 태서의 속은 모르는 채, 재인이 그를 토닥였다.

* * *

너른 정원을 지나 본가의 본채 앞에 선 태서가 잠시 눈을 감았다. 가만히 심장 아래쪽에 손을 대고는 불룩하게 만져지는 것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다.

재인이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준 것은 곰 인형이었다. 태서가 시카고에서 가지고 온 한 쌍의 인형 중에 태서의 몫이기도 한 인형이었다.


“정말 애인 줄 아나.”

몇 번 애처럼 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가기 싫어하는 제 손에 인형을 쥐여 줄 줄이야. 하지만 그게 또 싫지는 않았다. 어느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린 그가 마침내 눈을 떴다.

언제 와도 싫은 곳, 더욱이 할머님도 자리를 비워 저를 반기는 이 하나 없을 곳.

그리고 재인의 곁에 있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저를 기다리는 곳.


“뭘 생각하셨는지는 몰라도, 당해 드리지 않습니다.”

조금 전까지 재인을 생각하며 짓던 미소를 거짓말처럼 지워 낸 태서가 본채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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