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 느긋하게, 원하는 만큼, 실컷 (99/123)


#99. 느긋하게, 원하는 만큼, 실컷
2023.06.09.


뜻밖에 맞닥뜨린 미소에 놀란 유리가 동그란 눈을 껌뻑이는 사이, 비서는 그녀를 회장실로 안내했다. 그 결과 지금 유리는 강선 전자에 있는 강선 그룹 회장실에서 강신재 회장과 독대하게 된 것이다.


“그럼,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평소라면 하지도 않을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마저 어색했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홍차를 들이켜려는 순간, 유리는 어디선가 풍겨 오는 옅은 술 냄새를 느꼈다.

잠시 찻잔을 내려다보았지만, 찻잔에 담긴 차는 향긋하기만 했다. 짙은 수색만큼이나 깊은 향을 가진 차였다.


“할 말이라는 게 뭐지?”

“그러니까 저는, 저는……. 저는 회장님을 직접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지금 저희 집에, 그러니까 저희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는 회사에 문제가 생기기는 했지만, 강신재 회장님께서 도와주신다면…….”

“계속해요. 듣고 있으니.”

“그, 그러니까……. 회장님께서는 제 시아버님이 되실 분이셨으니까요. 저는 태서 씨 말고는 그 누구와도 결혼하게 될 거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어요. 저는 정말, 평생 태서 씨만, 제가 강선 그룹의 사람이 될 거라고…….”

“흐음…….”

이렇게 떨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나 긴장해 본 적이 없었다. 유리는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연습한 것과는 다르게 두서없는 말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제가 태서 씨에 비하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서 씨가 오래도록 유지해 온 저와의 약혼을 부정하는 건 강선 그룹에도 좋지 않습,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어떤 면에서 좋지 않을까?”

“지금 태서 씨를 두고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를 아신다면 회장님께서도 놀라실 거예요. 이건 태서 씨 개인 문제가 아니라 강선 그룹의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줄 수 있고…….”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손을 쥐었다가 편 유리는 따뜻한 찻잔을 움켜쥐었다. 이거라도 들고 있어야 떨림이 진정될 듯했다.


“저는 오래도록 태서 씨의 약혼녀였고, 태서 씨와 결혼해서 아내로서 내조할 준비를 해 왔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잘해 낼 자신이 있어요.”

“뭘 잘할 수 있다는 건가?”

“뭐, 뭐든요. 뭐든 다 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상황 때문에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태서 씨의 결혼은 일반적인 결혼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점이 달라야 하지?”

“그게, 어…….”

말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현양 건설이 멀쩡하던 때라면 모를까, 지금 유리에게는 내세울 게 없었다.

회사가 다 넘어가고 부모 모두 구속 수사 중인 상황이었다. 강신재 회장의 눈에는 제가 하찮게 보일 게 분명했다.

이래서는 그렇게나 우습게 여기고 업신여기던 윤재인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점점 새하얘지는 머릿속과는 다르게 입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이제는 스스로 뭐라고 하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태서 씨는 특별하니까요. 장차 강선 그룹을 이어 나가야 하니까 태서 씨의 결혼 상대로는 준비된…….”

유리가 생각하기에도 엉망인 말들이 맥락 없이 이어졌다. 이게 아닌데.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정리하려다 꺼낸 말도 다 끝맺지 못하고 다시금 찻잔을 입 가까이 가져갔을 때였다.

피식, 웃는 소리에 놀란 유리가 고개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선을 들었을 때 강신재 회장의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없었다.


“당돌한 구석이 있네요.”

“……죄송합니다.”

역시, 기적은 여기까지였나. 찻잔을 내려 쥐고 고개를 푹 숙인 유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막막하게만 여겨지는 앞날을 생각하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을 때였다.


“그래서 마음에 들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유리가 눈을 홉떴다.


“그 아이도 결혼할 때가 되었지.”

“…….”

“강태서 결혼 상대로 유리 양이 좋겠다는 말이야.”

크게 뜬 눈에 담긴 건 사르르, 풀어지는 강신재의 얼굴이었다. 그 위로 자연스레 강태서의 웃는 얼굴이 겹친 탓에 유리의 두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 * *



“더, 더요.”

“후…….”

속삭이듯 귀에 감겨 오는 채근에 눅눅한 숨을 내쉰 태서가 이를 악물었다. 재인의 탄력 있는 아랫배를 쥔 태서의 손에 힘이 실린다.

그는 누운 채였다. 제 위에서 흔들리는 재인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짙었다.

고양이처럼 앙큼하게 눈을 내리뜬 재인의 도톰한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제게 몸을 맡긴 채 색색 숨을 내쉬는 모습에 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하……. 더?”

“응, 응.”

“욕심쟁이네, 윤재인.”

“그거야, 후우……. 태서 씨가 잘하니까…….”

팔뚝에 도드라진 힘줄이, 꼿꼿하게 선 기립근이, 불룩 솟은 턱이 그가 지금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를 말해 주었다. 이윽고 활처럼 휜 재인의 허리가 바들바들 떨려 온다.


“아……!”

가장 높이 올라갔을 때, 외치듯 내뱉은 비명과 함께 재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은 태서의 품에서 재인의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저를 바라보는 재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태서의 입가도 그린 듯 아름답게 휘어 있었다.


“다리라도 내리게 해 주지.”

“그걸 못 버텨요?”

“하……. 도통 만족을 모르시네.”

“태서 씨가 잘한다니까. 잘하니까 욕심나서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요가 초보한테 이 자세를 시키다니.”

태서가 제 곁에 놓인 프린트물을 눈짓했다.

남자가 누워 제 위에 엎드린 여자의 하복부를 잡아 팔 힘만으로 들어 올린 채 두 다리를 쭉 뻗어 발끝을 세우고 버티면, 들어 올려진 여자는 남자의 두 손에 몸을 맡기고 허리를 둥글게 휘어 팔을 뒤로 뻗어 발목을 잡는, 실로 고난도 자세였다.


“태서 씨는 유연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코어 힘이 좋으니까.”

“코어 힘 좋은 걸 이런 식으로 확인 안 해도 될 텐데.”

“확인하는 게 아니라, 요가원에 커플 요가 수강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요. 지금 우리가 한 걸 아크로 요가라고 하는데, 나도 아크로 요가는 다양하게 해 본 적 없거든요.”

“아, 나를 실습 대상으로 이용하시겠다?”

“응. 안 되나?”

“돼. 얼마든지.”

재인이 웃으며 팔을 내렸다. 플라이어의 아래에서 버티는 베이스로서 훌륭하게 역할을 해낸 그의 팔을 꼭꼭 주물러 뭉쳤을 근육을 풀어 주려 한 것이다.


“근육통 있을 거예요. 어제부터 안 쓰던 속 근육까지 다 깨웠으니까.”

어제 요가원에서 처음 요가를 배웠을 때, 태서는 유연한 재인의 몸에 놀라고, 뻣뻣한 제 몸에 또 한 번 놀랐다. 하지만 부족한 유연성을 힘으로 대신한 그에게 재인은 점차 어려운 자세를 요구해 왔다.


“호흡 그대로. 지금 자세 유지합니다. 열 세겠습니다. 하나, 둘, 셋…….”


“……빨리 세.”


“말하면 안 돼요.”


“……죽겠는데.”


“……넷, 다섯, 여섯…….”

 
재인은 요가할 때는 비교적 엄한 선생님이었다. 태서가 장난치거나 슬쩍 파고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한 거랑 다릅니다. 데이트하자며.”


“하고 있잖아요.”


“혼나기만 하는데?”


“그건 태서 씨가 자꾸만…….”


“알겠어요. 진지하게 할게. 대신 다음엔 실내 클라이밍 합시다.”


“해 본 적 없어요.”


“집에 기구 있으니까 집에서 먼저 몇 번 연습해 보고, 익숙해지면 클라이밍장에 같이 가요.”

 
그렇게 첫 요가 수업을 마쳤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눈 뜨자마자 재인에게 이끌려 요가 매트 위에 누워야 했다.

상화가 보내 준 커플 요가 자료를 들이밀며 한번 해 보자는 그녀의 열정에 태서는 아침부터 진땀을 뺐다.


“아프지는 않아요? 여기, 여기 안쪽이 많이 당길 건데?”

확실히 사용 빈도가 낮은 속 근육이 당기기는 했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태서에게 그 정도 근육통은 우스웠다.

재인이 제 몸 곳곳을 주무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태서가 그녀의 사심 없는 손이 허벅지 안쪽에 닿자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씻자.”

순식간에 그에게 끌어당겨져 선 재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냐는 질문에 재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태서는 제가 뻔뻔하게 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럴 때마다 웃는 그녀의 얼굴이 보기 좋아 멈출 수 없었다.


“아까 태서 씨 통화할 때 다 들었어요. 앰버가 태서 씨 빨리 출근 안 하면 죽일 거라고 하던데?”

“그러니까 씻자는 건데?”

“같이 씻자는 거잖아요.”

“응.”

당연하다는 듯 고개 끄덕인 태서가 재인을 안은 채로 욕실로 이끌었다.


“태서 씨, 이 집에 욕실이 자그마치 네 개야.”

“물 아껴야지.”

“무슨……!”

“시간도 아끼고.”

“말도 안 돼.”

같이 씻어서 물과 시간을 아낀 적이 없었다. 태서 말하는 ‘같이 씻는’ 행위는 각자 씻을 때보다 몇 배는 더 물과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아껴야 잘 살지. 윤재인도 아껴 주려는 건데, 왜. 같이 잘 살자는 건데, 왜.”

“앰버 지금 고생한다며!”

현양 건설의 임시 CEO를 맡아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닌 앰버는 연일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태서에게 속았다며, 이 정도일 거라는 얘기는 못 들었다며 길길이 날뛰는 앰버의 전화를, 태서는 가볍게 무시했다.


“고생한 만큼 돈 벌어 갈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앰버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까 그건 엄살이야. 하기 싫은 걸 참아 가며 하는 성격 아니니까.”

“그래도…….”

“아직도 앰버 걱정이 됩니까?”

어느새 등 뒤로 탁, 하고 닫힌 욕실 문을 깨달은 재인이 눈을 크게 떴다. 시선을 피하려는 듯 옆으로 돌아가는 고개를 태서가 그러쥐었다.


 


“지금은 본인을 걱정해야지.”

“음…….”

“천천히 숫자 세는 거 좋아하는 윤재인.”

“그건…….”

자세를 유지한 채 버티던 그의 앞에서 재인 역시 장난기가 발동했다는 걸 태서는 알고 있었다. 팔다리의 떨림이 강도를 더하는 동안 태서는 재인의 숫자 세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느긋하게, 원하는 만큼, 실컷 세요.”

“…….”

“몇까지 세게 해 줄까.”

“……숫자 셀 정신도 없게 만들 거면서.”

“잘 아네.”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은 태서의 입술이 재인의 눈가에 내려앉았다.

더. 더요. 조금 더.

요가할 때 저를 재촉하던 재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이제 태서가 재촉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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