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꿀호랑이도 제 말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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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꿀호랑이도 제 말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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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꿀호랑이도 제 말 하면
2023.06.06.
하지만 승희는 그 기자를 노려보지도 못했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 차로 향하는 내내 사람들에게 떠밀리기 바빴다.
잠적한 줄 알았던 최지환은 최근에 작은 신문사와 인터뷰했다. 두 시간에 걸친 통화를 통해 지환은 그가 아는 모든 것을 밝혔고 신문사에서는 제대로 특종을 터뜨렸다.
누군가가 뒤를 봐주지 않은 이상 그 소심한 인간이 이런 식으로 제 뒤통수를 칠 리 없다. 승희는 그 배후를 두고 고민하지도 않았다. 강태서 말고는 없다.
처음엔 감히 배신할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하지만 불륜의 증거를 들이미는 강태서의 앞에서 간이 콩알만 한 최 비서는 덜덜 떨어 댔을 게 분명했다.
결국, 제안을 수락하고 지방 어딘가에서 은신하다가 때맞춰 인터뷰에 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사실, 승희는 특정 직원의 비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말이 이사장이지, 실무는 죄다 아랫사람들이 해 왔다. 그러니 그녀가 제 눈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졌을 리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떳떳할 수는 없었다. 몰랐다고 한들 제 무능력을 과시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분이신 전 현양 건설 조대훈 회장이 지난밤 모든 혐의를 인정했습니다!”
“한 말씀 해 주시죠!”
남편, 조대훈. 생각만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 승희가 이를 악물며 버텼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인간이 이 사달의 시작이었다. 아니, 아니다. 겨우 그따위 걸 탐냈던 제가 문제였다.
재벌가 외동딸로 태어나 수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부모님이 골라 준 길만 가도 꽃길이었다. 승희는 최악을 선택한 제 지난날을 곱씹다가 문득 죽었다는 윤세나를 떠올렸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 두려울 게 없던 승희를 세상 초라하게 만들었던 아이. 당당하게 말하고 환하게 웃으며 모두에게 사랑받던 여자.
일과 사랑, 그 모든 면에서 지승희가 바라던 곳마다 윤세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인생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이를 선택했다. 한때는 그 선택을 얼마나 비웃었던가.
하지만 이제는 안다. 윤세나는 살아 있는 동안 아이와 행복했을 거라는 것을.
“밀지 마십시오!”
“피해자들에게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이동하겠습니다!”
“당신이 책임자잖아! 몰랐다는 게 말이 돼?”
“협조 부탁드립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할퀴고 멱살을 움켜도 이상하지 않을 소란 속에서 그녀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직원이 후원을 권력 삼아 희롱한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피해자는 계속해서 나왔고, 그 모든 원망의 화살은 해당 직원을 믿고 일을 맡긴 지승희를 향했다.
“내 딸 살려 내! 내 딸 살려 내란 말이야!”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생을 이어 가는 딸을 병실에 두고 나온 여성의 절규가 이어졌다.
애끊는 모정은 경찰의 저지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머리채를 잡히고 만 승희는 사람들과 함께 길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두려움 가득하던 눈빛이 초점을 잃었다. 지쳐 쓰러져 우는 중년 여성의 곁에서 승희 역시 눈을 감았다.
달걀 세례에 엉망이 된 채 전 국민 앞에서 그녀는 무너졌다. 야윈 두 뺨이 젖어 들어가는 것을 카메라가 고스란히 담았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환갑의 그녀였다. 이제 와 후회하고 반성한다고 해서 용서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쓰레기도 저런 쓰레기가 없어. 끝까지 더럽다, 진짜. 어, 왔어?”
보고 있던 핸드폰을 다급하게 내려놓은 상화가 일어섰다. 재인이 웃으며 탈의실로 향했다. 이틀을 내리 앓고 난 뒤 몸이 찌뿌둥하다는 그녀에게 태서가 같이 요가원에 가자고 제안했다.
“곧 있으면 상화 퇴근할 시간인데요? 요가원 문 닫을 시간 다 됐어요.”
“문이야 열면 되는 거고.”
“응……?”
“진짜 원장이 요가원 좀 쓰겠다는데, 뭐가 문젭니까.”
뻔뻔한 태서의 말에 재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요가원에 걸음한 게 꽤 오래전 일처럼 여겨져서 궁금하기도 했던 그녀였기에, 내심 반가운 제안이기도 했다.
재인은 잠깐 밖에서 통화하는 태서를 두고 먼저 요가원에 들어온 참이었다. 요가복으로 갈아입던 그녀는 조금 전에 들었던 상화의 혼잣말을 떠올리고는 쓰게 웃었다.
상화가 뭘 보고 욕했던 것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전 현양 건설 조대훈 회장과 현양 재단 지승희 이사장 부부의 진흙탕 싸움으로 시끄러웠다.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법의 심판을 받겠다던 조대훈은 그의 아내 지승희가 검찰 조사에서 자신은 공범이 아닌, 남편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밝히자 그것만큼은 부인했다.
그 후로 둘은 서로의 비리를 밝혀 가며 물어뜯기 바빴다.
일각에서는 저런 부모 아래에서 자랐을 조유리가 제대로일 리 없다며 그 부모에 그 자식을 운운하며 혀를 차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달이 났는데도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는 조유리를 궁금해하고 동정하는 여론도 있었다.
“요가원에는 진짜 오랜만이네. 너 찾는 수강생들 많았어.”
“미안……. 같이 하기로 해 놓고 너만 고생한다.”
“야, 내가 원장인데 그럼. 내 요가원인데 내가 고생해야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재인에게 상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생긋 웃으며 요가원 입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강태서 씨는?”
“올라올 거야. 테드랑 통화하나 보더라구.”
“테드랑……? 테드는 지금 일한대?”
“그런가 봐. 왜?”
“아, 아니. 그냥, 뭐. 지금이 몇 시인데. 테드는 퇴근 시간도 따로 없나 보더라. 가만히 보면 강태서 씨 악덕 고용주야.”
“어……?”
갑자기? 재인이 동그란 눈으로 상화를 바라보았다.
“물론 테드가 원해서 그렇게 일한다는 건 알겠어. 사람이 그래도 해 뜰 때 일하고 해 질 땐 쉬어야 하는 법인데, 강태서 씨가 나서서 그런 업무 환경을 만들어 주면…….”
힘있게 말을 이어 가던 상화가 어느 순간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슬쩍 재인의 눈치를 보던 그녀가 다급하게 말을 돌렸다.
“강태서 씨는 어때? 다 나았어?”
“응. 신기하게도 딱 반나절 앓더라.”
“낫자마자 너 간호했겠다.”
“응, 그렇지 뭐.”
“커플이라고 아픈 것도 연달아 아프네.”
싱거운 농담에 재인이 푸스스 웃어 보이자 상화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내가 너 얼마나 걱정했는데.”
“알아.”
“세 보여도 또 은근히 여린 우리 재인이가 속 끓이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괜히 미안한 마음 느끼면서 후회라도 하고 있을까 봐. 재인아, 절대 아니야. 너 잘했어. 벌 받아 마땅한 인간들이야.”
“응…….”
“야, 저들이 똑바로 잘 살았어 봐라. 아무리 흔들어 댄들 이 지경까지 왔겠냐구. 죽고 나면 나쁜 놈들이 지옥에 가고 연옥에 간다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내가 못 보는데. 어휴, 난 사이다 들이켠 것처럼 속이 다 시원하다.”
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미소 짓자 상화의 눈매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래도 강태서 씨 있으니까 괜찮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시름 놨다가도 질투가 나는 거야.”
“질투?”
“우리 재인이 안아 줘야 하는 건 난데. 문득 빼앗긴 기분이 들잖아? 내 품에도 쏙 들어오는 너인데, 강태서 씨는 얼마나 신나서 안겠어. 품에서 안 내려놓겠지. 물고 빨고 핥고, 아주 장난 아닐 거야. 그치?”
“음…….”
“야, 널 보는 강태서 씨 눈빛부터가 그래.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호랑이 같다가도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져. 꿀호랑이 양반이야, 아주.”
“꿀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납니다.”
“엄마야!”
뒤에서 들려온 태서의 저음에 놀라 상화가 소리치며 뒤돌아보았다. 재인이 웃음을 터뜨리며 태서를 맞이했다.
“통화는 다 끝냈어요?”
“응. 이제 오늘은 귀찮게 안 할 겁니다.”
“옷 갈아입고 나와요. 요가 수업 시간 동안에 핸드폰은 꺼 둬야 해요.”
얌전히 고개 끄덕인 태서가 옷이 든 가방을 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태서 씨도 하게?”
“배워 보고 싶대.”
“흐음……. 문 닫은 요가원에서 커플 요가라……. 정신 수양이 되겠어?”
“왜?”
“아냐. 난 이제 퇴근할게. 둘이 즐거운 시간 보내!”
“……나 태서 씨 요가 가르치려고 왔다니까?”
“그러니까. 제자랑 즐겁게 수업하시라구요.”
다 안다는 듯 손을 내젓는 상화의 앞에서 재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정말 태서에게 요가를 가르쳐 주려고 왔다.
더불어 오랜만에 맨손이 아닌 기구를 이용해서 몸을 풀어 볼 생각이었는데, 저를 보는 상화의 눈빛이 짓궂었다.
뭐, 아무렴 어때.
재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상화를 배웅하고 출입구를 잠갔다. 집에 단둘이 있을 때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긴장감이 어색했다. 이제 곧 옷을 갈아입고 나올 태서가 기다려졌다.
* * *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리가 긴장감으로 차가워진 손끝을 모아쥐었다. 유리는 며칠을 강선 전자 본사 앞을 기웃거린 끝에 발악하는 심정으로 강신재 회장을 찾았다. 늘 아쉬울 게 없던 그녀로서는 엄청난 용기를 낸 것이었다.
하지만 물러설 곳 없는 그녀였기에 이런 짓도 가능했다.
예전에 임홍진 관장을 만나러 아트 센터에 갔다가 쫓겨나듯 내쳐졌던 것을 떠올린 유리의 시선이 회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를 향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커피만큼이나 수색이 짙은 차였다.
“들어요. 홍차 안 좋아하나?”
“아, 아뇨. 좋아합니다.”
유리가 신재의 눈치를 살피며 찻잔을 손에 들었다. 유리가 강신재 회장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함부로 말도 못 붙일 만큼 기백이 엄청났다.
사실 무섭기로 따지면 임홍진 관장보다 강신재 회장이 더 무서웠다. 재계에서 인간미 없기로 소문난 아버지는 그래도 언론 매체와 인터뷰하거나 틈틈이 봉사하며 대중에게 부드러움을 어필하려 했다.
하지만 강신재 회장은 기업 경영과 관계없는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매체에 찍힌 사진 속 그는 늘 무표정했고, 그 밑바탕에는 서늘함이 서려 있었다.
강신재 회장을 만나겠다고 했을 때, 유리는 회사 입구에서 거절당할 것을 예상하기는 했다.
만나 보실 수 없다고 버티던 직원에게 너 내가 누군지 알고 까부냐고 소리 지르던 차에 회사로 들어오는 강신재 회장을 만난 건 기적에 가까웠다.
“누구지?”
“저, 저는 조유리입니다. 현양 건설의…….”
“아.”
말까지 더듬으며 드릴 말씀이 있다고 얘기하는 유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강신재는 거짓말처럼 입꼬리를 휘며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