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 듣고 싶은 말 (97/123)


#97. 듣고 싶은 말
2023.06.02.


대훈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구속 수사 중이어서 그런지 기억 속에서 늘 깔끔하던 것과는 다르게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그녀가 자청해서 온 것이지만, 둘만 있으니 불편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재인의 시선이 잠시 뒤쪽의 문에 머물렀다. 문밖에 서 있을 태서를 생각한 것이다.


“아비 꼴 우습다고 비웃으러 온 게냐.”

갈라진 탁음에 재인의 시선이 다시 대훈을 향했다. 관리해 온 머리카락과는 다르게 염색하지 않은 수염이 희끗희끗하게 자라나 텁수룩했다.


“아버지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차분히 말하는 그녀를 향해 대훈이 시선을 들었다. 고개는 슬쩍 숙인 채였다.


“아무 이유 없이 여기까지 찾아왔을 리는 없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거듭되는 분노와 불안으로 인해 불면의 밤을 보냈는지, 대훈의 눈이 시뻘겠다.


“설마, 너와 네 엄마를 버린 것에 대해 사과라도 받고 싶은 거냐?”

“그럴 리가요.”

재인은 그의 사과를 바라지 않았다. 용서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엄마가 살아 계신다면 얘기가 달랐을 수는 있다. 저와는 다르게 엄마는 이 사람을 용서할 생각이 있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이제 세상에 없다. 재인은 저와는 악연이 분명한 대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차가우셨나요. 처음 만났을 때, 한 번만 제 앞에서 면목 없어 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때, 고아가 되었을 때 말뿐이라도 좋으니 미안하다 하시지 그러셨어요.

언젠가 머릿속을 채웠던 원망과 의문은 부질없었다.


“너, 이대로 내가 끝날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

“그 자식이라고 털어서 먼지 안 날 것 같으냐?”

“뭐가 그렇게 원망스러우세요?”

“뭐야?”

순간 날카로워진 눈빛에도 재인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탈세, 비자금 조성, 허위 계약, 횡령, 향응, 부실 공사 지시, 하도급 업체에 대한 갑질, 불공정 계약, 뇌물죄……. 심지어 청하 지역 리조트 개발 반대하던 주민 몇몇에 대해서는 살인 청부 혐의까지 있으시던데요. 그걸 누가 시켰나요?”

“…….”

“아니잖아요. 해선 안 될 짓을 하신 건 본인이시잖아요. 아, 들킨 게 억울하신 건가요?”

뚫어질 듯 재인을 노려보던 대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잘 자랐구나. 남자 마음 하나 잡지 못해 임신한 채 해외로 도망간 네 엄마보다 낫구나.”

태서를 이용하는 자신을 비난하는 동시에 홀로 저를 낳아 키운 엄마를 욕보이는 말이었다. 재인이 쓰게 웃으며 여기에 온 이유를 곱씹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했다.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해 밝히고 검찰 조사에 성실하게 응한다면 현양 재단 정도는 그에게, 혹은 그의 아내 지승희에게 남겨 주려 했다.

면죄, 혹은 사면의 의미가 아니었다. 애초에 재인이 바란 것은 조대훈이라는 인간이 쓴 가면을 벗기고 그의 무정함과 비열함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가 만들어 낸 단란한 가정의 가장, 나눔을 실천하는 깨어 있는 대표라는 이미지를 깨고 실체를 밝히면 사람들은 손가락을 모아 그를 욕할 터였다. 그것은 재인이 홀로 원망을 퍼붓는 것보다도 더 효과적인 벌이었다.


“제가 아니어도 벌줄 사람은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아오셨으니까.”

“너…….”

“저는 엄마와 사는 동안 행복했어요. 엄마도 마찬가지고요. 둘만으로도 부족함 없이 즐거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

“생각하시는 것과는 다르게, 엄마는 저를 낳고 후회하신 적이 없다고 했어요. 더불어, 저에게 아빠가 없는 걸 미안해하지도 않으셨어요. 아빠의 몫까지 엄마가 더 많이 안아 주겠다고 말씀하셨고, 실제로도 그러셨구요. 모르시는 듯해서 말씀드려요.”

대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재인은 오래도록 생각해 온 것들에 대한 답을 최근에 깨달았다. 그리고 그 답을 대훈에게 알려 줄 생각이었다.


 


“한때는 엄마에게 묻고 싶기도 했어요. 왜 나를 낳았는지,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나에게는 어떻게 그렇게 사랑을 퍼부어 줄 수 있었는지.”

“세나는 나를 사랑했어!”

갑작스럽게 소리치는 대훈으로 인해 살짝 문이 열렸다. 재인은 뒤돌아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다시 대훈을 응시했다.

태서를 만나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 뒤로 더욱더 엄마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그러면서 재인은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네. 그랬을 거예요. 회장님께서 엄마를 강제로 취하신 게 아니라면.”

“그게 무슨!”

덤벼들 듯 몸을 일으킨 대훈을 향해 재인이 말간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제 회장도 아닌 그를, 대신할 호칭이 없어 회장이라 부르는 그녀였다.


“그러니까, 엄마 성격에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아이를 갖지는 않으셨을 거라는 말이에요.”

재인의 말을 들은 대훈의 눈동자가 빛났다. 마치, 오랫동안 의심해 온 것에 대한 답을 듣기라도 한 표정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래, 그렇지. 세나는 나를 사랑했으니까 내 아이를 가진 거고, 아이를 지우라는 내 말을 듣지 않고…….”

“하지만, 그때뿐이었을 겁니다.”

“뭐……?”

“엄마가 저를 먼 타국 땅에서 홀로 낳고 기르며 제게 친부의 존재를 숨기고, 친부의 빈자리를 못 느끼도록 애써 가며 키워 주신 건.”

“…….”

“결국, 제 친부라는 인간이 별로였다는 거죠. 딸에게 숨기고 싶을 만큼. 아예 없는 사람으로 여길 만큼.”

잠시 희열에 차 있던 대훈의 눈동자가 탁하게 가라앉았다. 이내 눈 감은 그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젊은 시절, 윤세나와의 관계에서 애가 닳고 마음이 급한 것은 늘 그였다.

윤세나가 다른 남자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던 옆자리를 힘겹게 차지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자만했을 때, 윤세나는 떠나갔다.

늘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살며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던 그녀였다. 하지만 몇 번인가 기회를 주고, 결국에 끊어 낼 땐 한없이 냉정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대훈은 30년 만에 그토록 부정하고 외면했던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는 윤세나를 버리지 않았다. 윤세나가 그를 버렸다.


“후…….”

탄식하는 그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윤세나는 그 무엇보다도 본인이 우선인 남자에게 마음을 닫았고, 자격 없는 남자에게 아이의 탄생과 성장을 함께 축하하고 기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저는 앞으로도 엄마의 뜻대로 살아갈 겁니다. 처음부터 저에게 아빠는 없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요.”

“…….”

“그 말씀 드리려고 뵙자고 했어요.”

자리를 정리하려는 재인을 붙잡은 건 대훈의 눈빛이었다. 꽤 오랫동안 눈 감은 채 침묵하던 그는 좀처럼 재인을 바로 보지 못했다. 한풀 꺾인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재인의 뒤쪽에 살짝 열린 문틈이었다.


“나는, 나는 네가…….”

“아무 말씀도, 하지 마세요.”

힘겹게 입을 연 대훈에게 재인이 고개 저어 보이며 일어섰다.


“저는 듣고 싶은 말이 없습니다.”

“…….”

슬쩍 고개 숙인 그녀가 뒤돌았다. 미련이 가득한 눈빛이 그녀의 뒤통수를 끈질기게 따라왔지만, 재인은 끝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재인이 들어간 뒤 몇 번인가 큰 소리가 났다. 그녀를 걱정하던 태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접견실의 문을 열고 말았다.

벌컥, 열어젖히지는 않았다. 그저 가느다란 틈새로 자신이 여기에 있음을 상기시키고, 그녀가 괜찮은지만을 살핀 것이다. 그게 마지막으로 조대훈을 만나 오랜 감정을 마무리 지으려는 재인을 위한 태서의 배려였다.

문이 열리면 재인을 향해 웃어 주리라 다짐했다. 초조함에 두 손만 말아 쥐며 곁에 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태서는 웃는 연습을 했다. 그런데.

이윽고 문을 활짝 열고 나온 재인을 보는 순간, 태서는 웃지 못했다. 마주한 재인이 떨리는 입꼬리에 힘을 주고는 웃어 보이려 애쓰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태서가 다급하게 손을 뻗어 접견실의 문을 닫았다. 동시에 다른 손을 뻗어 재인을 품에 안았다.


“태서 씨.”

“응.”

“마음이 이상해요.”

“응.”

“후련해야 하는 거잖아. 내가 바란 대로 됐으니까.”

떨리는 목소리가 진정될 수 있도록, 태서는 그녀를 바투 끌어안았다.


“……울고 싶지 않아요.”

“응.”

“맛있는 거 사 줘요.”

“응.”

“재미난 영화도 보고 싶어.”

“그래.”

“아니, 집에 갈래. 우리 집에 가요.”

시큰거리는 눈을 꼭 감고 있을 재인의 머리카락을, 등허리를 쓸어내리며 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검찰은 언론 브리핑을 통해 조대훈 전 현양 건설 회장이 자신과 관련된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고 밝혔다.

집에 돌아와 맛있는 것을 먹고, 재미난 영화를 보던 재인이 태서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 * *

퍽, 어디선가 날아온 달걀이 승희의 어깨에 맞아 터졌다. 승희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코트 소매를 따라 비린내를 풍기며 흘러내리는 달걀을 내려다보았다.


“내 딸이 왜! 내 딸이 왜 죽어야 하는데!”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드는 중년의 여성을 경찰들이 막고 서 있었다. 늘어선 경찰 너머로 제게 적대심을 가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야차처럼 덤벼드는 것을 발견한 승희의 눈빛이 두려움에 흔들렸다.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와 함께 펑펑, 플래시가 터진다. 허리 시술을 핑계로 잠시 구속 수사를 중지하고 병원으로 향하려던 승희는 처음 겪는 상황에 제 곁의 검찰 관계자를 꽉 붙들었다.

지승희의 구속 수사가 결정된 후, 재단에서 후원한 아이가 재단 직원의 추행과 폭행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했다. 숨이 꺼지기 전에 가까스로 발견했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직원의 지속적인 학대와 추행, 폭행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해당 직원에게 후원 대상자 확정을 일임하신 게 맞습니까?”

“내부 규정을 따르지 않고, 직원 마음대로 후원자를 선정한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해당 사실을 밝힌 최지환 씨와 내연 관계라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

최지환. 일이 터지기 전에 잠적한 최 비서의 이름을 들은 승희의 눈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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