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 침대로 가서 제대로 (96/123)


#96. 침대로 가서 제대로
2023.05.30.



 
공항까지 김 실장의 차를 타고 이동한 탓에 유리는 이동할 때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태어나 한 번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본 적이 없었기에 관련 호출 앱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차가 많이 다니는 대로변까지 나가 택시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이 덜 녹은 길을 조심스럽게 걷는 동안 일그러진 입술 새로 짜증 섞인 투덜거림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악!”

결국 다른 쪽 구두마저 더러워지고 말았다. 엉망이 된 구두를 내려다보는 유리의 눈앞에 며칠 동안 그녀를 잠 못 자게 한 얼굴이 떠올랐다. 핸드백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공항에서 손 꼭 잡고 웃으며 나오는 윤재인과 강태서를 보고 눈이 뒤집혔다.

어떻든 저를 캐나다로 보내려는 김 실장의 눈을 속이고 비행기에 타지 않았다. 집으로 가면 또 붙잡혀 캐나다로 가야 할 게 뻔했기에 지금 유리는 호텔을 전전하는 중이었다.


“가만 안 둬. 진짜, 가만 안 둬!”

제 꼴이 이렇게 된 건 모두 윤재인 때문이다. 강태서가 저를 무시한 것 또한 그 여우 같은 게 강태서 앞에서 싸게 굴며 꼬리 쳤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다 그랬다.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것도 시작은 윤재인이라는 존재 때문이었으니까. 모든 불행의 기원에 윤재인이 있었다.

제 엄마를 닮아 천박하게 구는 더러운 존재. 얼굴 좀 반반하다고 제게 쏟아져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감히 앗아 가는, 재수 없는 존재.

처음 봤을 때부터 거슬렸다. 잘난 거 하나 없는 주제에 고개 빳빳하게 들고 기죽지 않는 윤재인은 잘 꾸며진 정원에 함부로 자리 잡은 잡초였다. 그러니 짓밟고 뽑아 버려 마땅했다.


“제 엄마를 닮았으니 제 엄마처럼 평생 한국 땅에 발도 못 붙이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

입술을 잘근 깨문 유리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택시는 죄다 그녀를 지나쳐 갔다.


“다 구질구질해. 다 구질구질하다고!”

젖은 구두 안에서 꽁꽁 언 발을 동동 구르며 유리가 소리쳤다. 그녀의 뒤로 멀리 보이는 전광판에는 현양 건설 조대훈 전 회장에 이어 현양 재단 지승희 이사장에 대한 조사가 구속 수사로 전환된다는 뉴스가 떠 있었다.


 

* * *

태서가 아프다.

이게 웬일이야. 소식을 들은 앰버, 테드는 물론이고 상화까지 모두 그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첫 방문이었기에 아늑하게 꾸며진 집 내부를 보고 한참이나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기계는 고장이라도 나지. 강태서는 무적이야. 아픈 걸 본 적이 없다니까? 테드는 태서 아픈 거 본 적 있어?}

“아니.”

{너 그런데 왜 한국어로 해? 잘하지도 못하면서.}

테드가 슬쩍, 주방에 머무는 재인의 곁에 선 상화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요즘 한국어 공부에 매진 중이었고, 영어를 잘 못 하는 상화를 생각해서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조심하는 중이었다.


{아……? 그렇지, 말해 봐. 뭐래? 내가 알려 준 거 먹혔지? 안 먹혔어?}

{앰버…….}

{그게 안 되면 내가 웃통이라도 까라고, 젊은 몸이라도 어필하라고 그랬잖아. 어? 했어, 안 했어?}

상화에게 고백하고 싶다고 한국어를 알려 달라고 부탁하는 테드에게, 앰버는 한국어 몇 마디를 가르쳐 주고는 최후의 수단으로 강남 한복판에서 웃통을 까라고 지시했다.


{옷을 벗으라고요? 지금 밖에 영하 8도야.}


{그렇게라도 해야지. 네가 가진 게 뭐가 있어. 우리 자기처럼 스윗하기를 해, 아니면 태서처럼 돈 많고 몸이 좋기를 해?}


{태서만큼은 아니어도 내 몸도 꽤…….}


{아가, 근육을 더 붙여야지. 슬렌더가 좋다는 여자도 많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는 좀 더 찌워야 해.}


{그거야 앰버가 햇볕에 그을린 두꺼운 근육질의 몸을 좋아하니까…….}


{그래, 맞아. 잘 알고 있네. 넌 심지어 희멀겋기까지 해.}


{……태서도 하얗잖아요.}


{아가, 차이를 모르겠어? 태서는 뽀얀 거고, 너는 창백한 거야. 나는 네 이름이 Nerd White라고 해도 믿었을 거야.}

 
너드 화이트. 컴퓨터에 미친 백인 얼간이. 테드는 저를 지칭하는 앰버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상화를 만나 앰버가 가르쳐 준 대로 한국말을 했다. 제대로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떻든 상화의 화가 누그러졌고, 그날 이후 연락을 피하지 않으니 잘된 것 같았다.

연락만 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상화는 더 이상 테드의 손길을, 눈길을, 입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테드는 요즘 상화의 퇴근 시간만 기다렸다. 퇴근하는 그녀를 호텔로 데리고 가서 밤새 응석을 부리다가 새벽에 돌아와 쪽잠 자고 일어나는 것이 요즘 테드의 일과였다.

테드는 지금도 상화의 곁에 서 있고 싶었다. 그녀를 따라다니며 그녀의 냄새를 맡고, 그만 좀 하라며 찡그리는 미간에 입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체하지 말라는 그녀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화내는 상화는 무서우니까.

슬금슬금 상화만 좇던 테드의 시선이 테이블에 닿았다. 주방에 서 있던 재인이 쟁반 가득 들고 온 커피와 마들렌이 놓였다.


“오, 마들렌!”

“앰버, 우리 재인이가 마들렌은 진짜 잘 구워. 특히 레몬 마들렌이 예술이야. 어제 굽기 시작하는 것만 보고 가느라 맛을 못 봤는데, 그대로 있네? 야, 너 솔직히 말해. 어제 태서 씨랑 이거 안 먹고 뭐 했어?”

두 손 들어 반색하는 앰버의 곁에 앉던 상화가 재인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뭘 하긴…….”

“밤새 뭘 했기에 애가 푸석푸석…….”

“나, 푸석푸석해?”

많이 울어 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간 걸까. 재인이 얼굴을 매만지며 걱정스레 물었을 때였다.


“예쁩니다.”

털썩, 재인의 곁에 앉은 태서가 손을 뻗어 마들렌을 접시째 들더니 미소 지었다.

자연스레 제 쪽으로 그의 몸이 기우는 것을 본 재인이 상화 곁에 붙어 앉으려 했지만 태서가 더 빨랐다. 기어코 재인의 뺨에 입 맞춘 그는 다른 사람들 시선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마들렌을 한입 베어 물었다.


“와……. 진짠데, 이거.”

“좀 괜찮아요?”

병원에서 주사 맞은 후 열이 내리면서 푹 잠든 것을 보고 나왔는데, 소란에 잠이 깬 모양이었다. 조금 핼쑥한 얼굴로 마들렌을 먹는 태서를 보는 재인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응, 자고 났더니 개운해요.”

“좀 더 쉬지. 왜 일어났어요.”

“내 마들렌 지켜야 하니까.”

“응……?”

마들렌 접시를 든 태서가 일어섰다. 소파를 차지하고 앉은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을 쭉 훑은 그가 마들렌 접시를 들지 않은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자마자 휙, 잡아당겨진 재인은 그의 곁에 서야 했다.


“아픈 사람 혼자 두고 가는 게 어디 있어.”

“아니, 나는…….”

“계속 내 옆에 있겠다고 해 놓고. 눈 뜨니 없어서 서운했습니다.”

슥슥, 실내화 스치는 소리가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향했다. 재인은 하릴없이 태서의 손에 끌려가다가 뒤늦게 뒤를 돌아봤다. 얼빠진 표정의 앰버, 상화, 그리고 테드가 저와 테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서 씨, 손님이 왔잖아요.”

“아, 손님.”

잊고 있었다는 듯, 태서가 뒤돌았다.


“커피 마시고 가. 상화 씨도 오셨으니 커피는 마시고 가세요.”

“뭐……?”

“네……?”

“치우지 않아도 됩니다. 그건 이따가 내가 할 테니까 얼른 마시고. 갈 때는 저쪽 문으로.”

“허……?”

턱짓으로 현관문을 가리킨 태서가 까딱, 묵례하고는 다시 재인을 이끌고 침대로 향했다. 뒤쪽에서 앰버의 욕이 들려오든 말든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어이없어하는 세 명을 뒤로하고 태서가 재인에게 속삭였다.


“마들렌 나 주려고 구웠다면서, 왜 다른 사람을 줍니까?”

“그거야, 많아서…….”

“많아도 다 내 건데? 침대로 가서 제대로 먹어 봅시다.”

“침대에서 먹자구요? 마들렌을?”

“응. 미소와 포옹이 따라붙어야 진짜 윤재인표 마들렌 아닌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재인의 고개가 기우는 사이 침실 문이 닫혔다. 동시에 태서가 레몬 향 가득한 숨을 쏟아 내며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가볍던 입맞춤이 짙어지고 넘나드는 숨에 열기가 어리는 사이 태서는 협탁에 마들렌 접시를 내려놓았다. 더욱 욕심껏 재인을 탐하기 위해서였다.

의사는 태서의 병명을 피로 누적에 의한 몸살이라고 했다. 감기처럼 옮는 질병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한숨 자고 난 후 기운을 차린 그는 무엇보다도 윤재인이 절실했다.

그런데 그녀가 다른 사람을 향해 웃어 주고 있으니, 배알이 뒤틀린 것이었다. 하지만 태서의 속을 알 길 없는 재인이 정신없이 키스를 퍼붓는 그를 밀어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태서 씨 아프다니까 걱정돼서 와 준 사람들이잖아요.”

“나는 윤재인만 있으면 되는데?”

어떤 못난 꼴을 보여도 다 괜찮다고 안아 주는 재인은 하루 사이에 강태서의 버릇을 망쳐 놓았다.

태서는 응석받이로 자란 사람처럼 재인의 손에 제 뺨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재인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태서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신경 쓰이지만, 지금 상황을 이해 못 해 줄 사람들은 아니었다. 나중에 만나게 될 상황을 생각하면 조금 낯이 붉어졌지만, 재인은 유독 어린애처럼 구는 태서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난 좀 유치하게 연애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봐요. 이런 투정 부리는 태서 씨도 귀엽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더 해 봐요.”

“뭘요?”

“더, 더. 더 오냐오냐해 줘 봐요. 내가 무슨 떼를 쓰든, 내 말이 다 맞다고 해 줘요.”

나이 서른이 훌쩍 넘은 남자가 어색하게 부리는 어리광이 슬프게 다가오는 건, 늘 어른스러웠을 아이를 떠올려서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태서의 이마를 짚어 열이 없음을 확인한 재인이 그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구겨진 이불을 끌어 올려 그의 가슴께를 도닥이며 속삭였다.


“강태서 씨.”

“응.”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말해 봐요.”

“그러면?”

“일출 보러 서해에 가자고 할 거야.”

“음…….”

“지구가 편평하다고 말해 봐요.”

미소 짓는 태서를 향해 재인이 코를 찡긋거렸다.


“나는 태서 씨 손을 잡고 지구 끝에서 번지 점프를 할 테니까.”

“……정말?”

“정말.”

태서가 웃으며 재인을 안았다. 조금 전까지 심통 난 아이처럼 굴던 남자가 깊은숨을 내쉬며 그녀의 풍성한 머리칼에 코를 묻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태서가 이윽고 재인을 마주 보았다.


“오늘만 쉴 겁니다.”

“내일도 쉬면 좋을 텐데…….”

“아니, 오늘 하루 쉰 거로 충분합니다.”

어릴 때 이후로 아픈 것도 처음이었지만, 이렇게 마음 편히 쉰 것도 처음이었다. 친부로 인해 불안해하던 제 마음의 평온이 윤재인 덕분이라는 것을 아는 태서의 눈이 곧게 빛났다.


“지켜야 하는 게 있으니까 힘낼 겁니다.”

지킬 게 없을 때도 살아 냈는데. 덧붙일 생각 없는 말을 삼킨 태서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푸석푸석하기는커녕, 매끈하고 보드랍기만 한 재인의 뺨을 욕심껏 어루만지는 그에게 재인 역시 맑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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