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당신과 함께라면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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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당신과 함께라면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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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당신과 함께라면 기꺼이
2023.05.26.
눈 부신 햇살에 뒤척이다 깨어났을 때, 태서는 눈도 뜨기 전에 제 허리를 두른 팔을 깨닫고는 미소 지었다.
정원에 내려앉은 새 소리, 새벽에 돌아와 제 방에서 무언가를 긁고 있는 고양이의 소리, 거기다 저를 꼭 안은 채 잠든 재인의 숨소리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아침이었다.
다만 문제는 이상하게 나른하고 무겁게 느껴지는 몸 상태였다. 거기다 목도 조금 부었는지, 침을 삼킬 때 절로 찡그려졌다.
태서는 뒤에서 저를 안은 재인의 팔이 주는 무게감을, 등에 와 닿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숨결이 주는 간지러움을 오래도록 만끽하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갑작스럽게 덮친 어지러움에 지그시 눈 감은 그의 귀에 달콤한 음성이 감겨들었다.
“으응…….”
재인의 작은 칭얼거림에 두통도 잊은 채 슬슬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풀었다. 가만히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니 오래 울어 퉁퉁 부은 눈과 얼굴이 뽀얗게 드러났다.
까만 밤이 푸른 새벽이 되도록, 태서는 재인에게 제 어린 날을 고백했다.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트라우마는 태서의 약점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누군가에게 꺼내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닿을 곳 없던 친모의 집착이 친부를 꼭 닮은 저를 향했던 것, 그러면서도 정작 어린 태서에게는 무관심해서 보살핌과 돌봄은 고용인들의 몫이었던 것도 밝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하게 이루어진 학대였다. 영국에서 친모와 함께 생활했던 경험은 태서를 메마르고 시들게 했다. 결국, 누구보다 밝고 총명하던 아이는 반짝임을 잃었다.
“멀쩡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고 남들이 하지 않는 부분까지 공부해야 했습니다. 미친놈이 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감정의 상호 작용을 책으로 배운 탓에 가끔은 어설픕니다. 이런 나인데, 괜찮습니까?”
“흐윽…….”
“미리 말하지 않은 것, 미안합니다. 멀쩡해 보였는데 속이 다 곯았다고, 속았다고 따져도 어쩔 수 없어요. 못 무릅니다.”
많은 것이 결핍된 채 자란 반쪽짜리 인간임을 사과하자 재인이 입술을 꼭 깨문 채 고개 저었다. 더 큰 울음을 터뜨리며 저를 향해 두 팔 벌리는 재인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지난밤, 재인은 계속해서 태서를 안아 주었다. 잠들어서도 그를 안은 팔을 풀지 않은 그녀의 다정한 집착이 황홀하게만 느껴졌다.
그를 대신하여 울면서도 말은 아끼던 그녀였다.
그 상냥하고도 조심스러운 위로에 용기를 얻은 태서는 태어나 한 번도 따뜻한 눈길을 준 적 없던 친부의 냉대를 털어놓았다. 태어난 것 자체로 증오의 대상이 된 제 처지를 건조하게 읊었다.
까만 밤을 물리며 밝아 오는 아침, 눈 감은 재인은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태서 씨.”
“응.”
“태서 씨도 잘 자랐어요.”
“…….”
“반쪽짜리 어른 아니야. 강태서는 좋은 사람이야. 내가 의지하고 기댈 수 있을 만큼.”
“……응.”
“……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응……?”
웅얼거림에 묻힌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 태서가 되물었다. 밀려온 졸음에 겨워 달싹이던 도톰한 입술이 한 번 더 열린 것은 기적이었다.
“사랑…….”
“…….”
“사랑해.”
태서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 남자의 세상을 뒤바꿀, 큰 파도를 일으킬 말을 속삭인 재인은 그대로 잠들어 버린 후였다.
환각처럼 남은 고백이 의심되어 수도 없이 곱씹었다. 저를 안은 재인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렇게 환희에 들떠 홀로 아침을 맞이했는데, 재인의 체온이 주는 안정감에 취해 어느새 스르륵 잠든 모양이었다.
세상 가장 귀한 것을 바라보듯, 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태서는 결국 일어섰다. 밖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진동을 느낀 것이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연락 부탁드립니다.>
거실로 나와 장 실장에게서 걸려 온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를 확인한 그가 주방을 향해 몸을 틀었다. 냉장고를 열어 차가운 생수를 꺼내어 머금은 채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 아…….”
―본부장님?
태서는 갈라져 나오는 제 목소리를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주 어릴 때 이후로 이런 적은 없었기에 낯선 상황이었다.
“흠, 미안합니다.”
―목소리가 안 좋으신데요.
“자다가 깼습니다.”
―지금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운동하는 사람이 점심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나 깼다는 말에 놀란 것은 당연했다. 병의 물을 모두 비워 낸 태서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말씀하세요.”
―임 관장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통 연락이 없다고, 서운하신 듯했습니다.
“아…….”
연애에 푹 빠져 있기도 했지만, 일이 바빠 한동안 연락을 드리지 않았다. 손자의 첫 연애가 궁금할 텐데 묻지도 못하고 참으셨을 터다.
저와 관련해서 퍼지는 소문과 온갖 기사를 잠재워 주는데도 연락이 없었으니, 기다리다 못해 전화가 온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조만간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세요. 오늘은 목 상태가 좋지 않아서 전화를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밴쿠버행 비행기의 탑승자 명단에 조유리는 있었지만, 탑승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
―현지에 보낸 사람을 통해서 확인한 결과, 조유리 외조부 소유의 별장에 관리인 외에는 드나든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욕이라도 뱉을 듯한 표정의 태서가 욱죄어 오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러면, 김 실장 말과는 다르게 조유리가 한국에 있다는 건데…….”
―김 실장은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캐나다 쪽에서도 조유리가 온다는 김 실장의 연락을 받고 준비한 상황에서 조유리가 나타나지 않아 당황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항에서 헤어졌다는 김 실장의 말을 토대로 짐작건대, 조유리는 공항에서 사라진 듯합니다.
“집으로 돌아간 건 아닙니까?”
―집에는 상주하는 관리인 두 명만 있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조유리가 사라졌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골칫거리는 시야 안에 둬야 했다.
“지금 즉시 조유리가 곧잘 만나거나 연락하던 사람들, 자주 드나들던 호텔을…….”
―아, 아! 본부장님. 조유리, 지금 정재훈과 함께 있다고 합니다.
“…….”
사라진 조유리의 행방을 찾게 된 건 다행이었지만, 두 쓰레기가 붙어 있다는 얘기에 태서의 턱이 툭 불거졌다. 정재훈의 곁에 붙여 놓은 비서에게서 막 보고가 올라온 모양이었다.
―혼자 찾아왔고, 정재훈과는 20분째 이야기 나누는 중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바로 사람 따라붙게 하세요. 절대로 감시망에서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있다면 당장이라도 움켜쥐어 비틀어 버리고 싶은 인간을 떠올린 태서의 눈빛이 시리게 가라앉았다. 시카고에 가기 전, 재인과 태서에 관한 소문을 흘린 사람이 정재훈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줬는데도, 재인이 직접 찾아가 경고했는데도 함부로 탐하는 꼴을 참아 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사업적인 부분만 압박한 것이 얼마나 친절한 배려였는지를 확실하게 알게 할 필요가 있었다.
역시, 쓰레기를 치우려면 어떻든 손을 더럽힐 수밖에 없나.
결정을 내린 태서가 짓씹듯 뇌까린 욕을 겨우 삼키며 빈 생수병을 우그러뜨렸다.
“주안 식품, 결국 정재훈 고모 손에 떨어졌다던데.”
―네, 그렇습니다.
“그 집 장녀가 망나니라죠.”
―네, 유약하고 신경질적인 정재훈과는 다르게 폭력적이고 포악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외조부의 지시로 주안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자리를 정재훈에게 넘기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 큰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싸움은 붙여야 제맛이죠.”
이윽고 지시를 내린 태서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어렸다. 통화를 끝낸 그가 현기증에 잠시 냉장고를 짚었을 때였다.
“언제 깼어요…….”
잠이 묻은 목소리가 등허리를 간지럽혔다. 스스럼없이 파고드는 손에 허리를 내어 준 태서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목이 말라서. 더 자지.”
“응……. 옆에 없어서…….”
눈도 못 뜬 상태로 제 등에 뺨을 비비적거리고 있을 재인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태서가 뒤돌아 그녀를 마주 안으려 했지만, 재인이 태서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버텼다.
“으응, 보지 말아요. 내 꼴 엉망인 거 알아.”
“엉망으로 예쁘던데?”
“그게 뭐야.”
태서의 너른 등에 대고 키득키득, 흘리던 재인의 웃음이 갑자기 멈췄다. 문득 서늘함을 느낀 태서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재인이 먼저 후다닥, 태서의 앞으로 나와 섰다.
“왜…….”
“태서 씨, 열 있는 것 같은데?”
“응……?”
손을 뻗어 태서의 이마를 짚고, 그러다 제 이마를 짚어 본 재인의 눈에 걱정이 한가득 담겼다. 다시 한번 이마를 짚고, 그거로 모자랐는지 두 뺨을 매만지고 목과 가슴에도 손을 얹은 재인의 표정에 속상함이 번졌다.
“불덩인데, 몰랐어요? 이제 보니까 목소리도 쉬었잖아. 세상에, 목 상태가 그런데 차가운 물 마신 거예요?”
“…….”
“아니 왜, 사람이 본인 아픈 것도 몰라요. 속상하게.”
“음…….”
“태서 씨, 오늘은 일 못 해. 핸드폰 이리 내놔요.”
태서는 제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가는 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걱정 가득한 꾸중을 듣는 것이 그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저를 잡아당기는 작은 손에 이끌려 거실을 가로지르는 태서는 조금 얼떨떨한 채였다.
“장 실장님께 연락드려야겠다. 일단 해열제부터 먹고, 열 내리면 같이 병원에 가요. 병원 다녀와서는 푹 자는 게 좋겠어요.”
“……나 자는 동안 재인 씨는 뭐 하고?”
“태서 씨가 일하는지 안 하는지, 꼭 붙어서 감시해야지. 오늘 하루는 침대 밖으로 나갈 생각도 하지 말아요.”
아, 당신과 함께라면 기꺼이.
종일 제 곁에 붙어 저를 지켜보겠다는, 침대 바깥으로 못 나가게 하겠다는 달콤한 협박에 열이 더 오르는 것만 같다. 어쩌면 지난밤 얌전히 끌어안고만 있느라 못한 것들이 생각나서 몸이 더 뜨거워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침실로 끌려가는 태서의 입꼬리가 느른하게 휘었다. 누워 쉴 생각은커녕, 다른 짓 할 생각뿐인 것을 보면 아직 덜 아픈 모양이었다.
* * *
“등신 같은 게, 진짜.”
구겨진 코트 자락을 탁탁, 털어 낸 유리가 방금 나온 주안 엔터테인먼트 건물을 올려다보며 눈을 치떴다.
“도와주겠다는데도 쫄아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몸을 사리는 정재훈이 우스웠다.
사무실 구석에 폐인 꼴로 처박혀 부들거리고 있던 모습을 비웃으며 유리가 발을 내디뎠다. 대로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몇 걸음 걷던 그녀는 곧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멈추어 섰다.
“아, 진짜! 짜증 나!”
아끼는 구두를 내려다보는 유리의 눈이 악에 받쳐 번들거렸다. 구두를 장식한 새하얀 동백꽃 이 며칠 전에 내렸던 눈에 젖어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