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그 밤
(94/123)
94. 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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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그 밤
2023.05.23.
“나, 태서 씨한테 참 고마워요.”
서 씨는 내게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에요. 태서 씨를 만난 뒤로 불안하지 않아요. 외롭지 않아요.
나, 요즘 좀 뻔뻔해진 거 있죠.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요. 상화 말로는 태서 씨 만난 뒤로 내 표정이 훨씬 밝아졌다는데, 알고 있었어요?
그런 말들을 늘어놓는 재인의 시선은 여전히 먼 불빛을 향한 채였다.
마주 보기 쑥스러운 걸까. 어떻든 제 존재가 그녀를 웃게 만든다는 건 무척이나 기분 좋은 말이었다. 태서는 미소를 머금은 채 이어질 재인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요, 태서 씨.”
“응.”
“나도 태서 씨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가만히 속마음을 전한 재인의 고개가 비로소 태서를 향했다.
“아직 부족할까요?”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는 재인에게 태서는 바로 대답해 주지 못했다. 그녀가 제게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강태서에게 윤재인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 주는 존재였다. 벅찬 감정이 차오른 탓에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재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끔요. 태서 씨 목소리에 깨곤 해요.”
“응……?”
“엄마를 부르면서 울기도 해요. 태서 씨가…….”
“아…….”
그래서였나. 그래서 가끔 윤재인의 품에서 눈을 뜬 거였나.
분명히 잠들 때까지만 해도 태서는 옭아매듯 재인을 품에 안은 채였다.
체온을 나눌 인형 하나 허락받지 못하던 유년기를 지낸 탓에 이렇듯 재인에게 집착하는 거냐고 스스로를 조소하면서도 그녀를 제 품에서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따금 태서는 아기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재인의 품에 안겨 아침을 맞이하곤 했다. 그게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하지만 어쩌다 자세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저나 윤재인 둘 다 자면서 크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을, 다른 누구도 아닌 윤재인에게 들켰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난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럽게 풀어져 있던 태서의 얼굴에서 빠르게 표정이 사라져 갔다.
“재인 씨, 그건…….”
문장을 끝맺지 못한 태서가 막막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성인 남자가 아이처럼 덜덜 떨면서 엄마를 부르며 우는, 등신 같은 꼴을 변명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바위처럼 굳어 버린 태서는 오래전 그날을 떠올렸다. 재인을 가까이 끌어당겨 안은 팔에 힘이 더해진 것은 의식하지 못한 채였다.
“엄마, 문 열어 주세요. 추워요. 나도 들어갈래요…….”
“엄마, 거기 있는 거죠? 무서워요. 엄마, 엄마…….”
“말 잘 들을게요. 우유 안 남길게요. 엄마랑 같이 자고 싶다고 고집부리지 않을게요.”
“엄마, 잘못했어요. 거짓말했어요. 사실은 로션 혼자 바를 수 있어요. 앞으로는 혼자 바를게요. 발라 달라고 하지 않을게요.”
고작 열 살이었다. 그 어린 애가 추위와 공포에 떠밀려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잘못을 빌고 빌었다. 잠깐이라도 엄마의 손길이 닿는 것이 좋아서 얼굴에 로션 발라 달라고 했던 것까지 빌어야 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반성이 이어진 밤이었다. 그리고 그 밤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태서는 꿈에서 그날 밤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또다시 빌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희게 질린 채 서럽게 울며 차가워진 손발을 모아 빌었다.
태서가 침묵하는 사이, 재인은 옥죄어 오는 그의 팔을 슬쩍 밀어내고는 완전히 태서를 향해 돌아앉았다. 저를 들여다보는 재인의 까만 눈동자를 피해 태서의 시선이 절로 아래를 향했다.
“태서 씨.”
“…….”
“이리 와요.”
태서의 시야에 저를 향해 내민 재인의 두 팔이 보였다. 뻣뻣하게 굳은 태서는 차마 고개 들지 못했다.
“내가 안아 주게. 응?”
차마 미동도 할 수 없는 남자를 바라보던 재인이 움직였다. 조금 전에 태서가 제 어깨에 둘러 주었던 담요를 들어 태서의 어깨에 둘러 준 재인이 몸을 기울였다. 머뭇거림은 없었다.
“이러고 있어도 좋아요. 내가 태서 씨에게 안기는 것도 좋지만, 내가 태서 씨를 안을 수 있어서 좋아. 이거, 아무나 못 하는 거잖아요. 나만 할 수 있는 거잖아.”
다정하게 덮어 오는 온기, 등과 어깨를 보듬고 매만지는 손길에 천천히 그의 감각이 깨어났다. 태서가 삐걱거리며 고개를 들자 흩날리는 재인의 머리카락 사이로 도시의 불빛이 반짝였다.
바람에 실린 그녀의 향기가 폐부를 가득 채운다. 한참이나 저를 안은 재인의 체온과 향기를 느끼던 태서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기울었다.
마법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맑아진다. 제 트라우마로 인한 공황에서 벗어난 그가 재인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비벼 대다가 입 맞추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보드랍고 따스한 존재가 저를 향해 진심으로 웃어 주는 기적. 태서는 제 생에 처음 알게 된 소중한 사람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허리를 편 태서가 저를 올려다보는 재인을 찬찬히 살폈다. 아로새기듯 그녀를 담은 밤빛 눈동자는 경지에 들어 신을 찬양하는 사람처럼 황홀하게 빛났다.
“나는 질투심이 많은가 봐요. 태서 씨가 꿈에서도 나만 보면 좋겠어.”
나쁜 꿈 꾸지 말라는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할 수도 있다. 태서가 손을 들어 재인의 고운 뺨을 어루만졌다.
나도 그러고 싶다고, 눈 돌리는 모든 곳에 당신이 있으면 좋겠다고 마음으로 전하는 태서에게 재인은 부끄러운 듯 웃어 보였다.
“언제든 괜찮아요. 태서 씨가 말하고 싶을 때.”
착하디착해서 보챌 줄도 모른다. 그저 기다리겠다며, 저를 안아 주는 여자에게 태서는 생애 첫 숨을 터뜨리듯, 제 생에 가장 많이 울었던 날을 고백했다.
“엄마가 손목을 그었습니다.”
태서는 저를 안은 재인의 손에 힘이 실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태서는 의외로 제가 담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걱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슬쩍, 입꼬리를 올려 보여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윤재인이 부린 마법인가. 태서는 그녀에게 몸을 기울여 가까이 끌어안았다. 후우, 오래 묵힌 숨이 겨울밤 습한 공기 중에 흩어졌다. 조금씩 용기가 솟았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그날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태서는 오래도록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돌덩이들을 하나씩 들어내 보자고 생각했다. 그동안은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일이었다.
“나는 매일, 엄마가 건넨 우유를 마시고 잠들곤 했습니다. 우유에는 수면제가 들어 있었고.”
“…….”
“그날은 수면제 양이 평소보다 많았고, 깨어났을 때는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습니다. 집은 조용했습니다. 물이 흐르는 소리만 났을 뿐, 인기척은 없었습니다.”
털어놓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재인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마치 저와는 상관없는, 잔혹한 동화를 읽어 주는 것처럼.
“엄마는 욕실 문을 잠그고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까만 밤이 지나고 푸른 새벽빛이 환하게 밝아 오도록, 나는 욕실 앞 러그에서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
“서 있다가 다리가 아파 앉았고, 그러다가 무릎을 꿇기도 했습니다. 용기를 내어 욕실 문을 두드려 보기도 했고, 문고리를 돌려 보기도 했습니다. 문 아래쪽에서 실선 같은 불빛과 함께 냉기가 흘러나왔는데, 나중에는 거기에 얼굴을 박은 채 엎드려 있기도 했습니다.”
태서는 그 밤을 그려 냈다. 눈 감아도 선연하게 떠오르는 장면은 그만큼 생생했다. 그 밤의 온도, 습도, 밝기와 냄새가 순식간에 그의 오감을 장악했다.
“춥고, 딱딱하고, 어둡고, 무서웠습니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는데 참았던 것 같아요. 그 앞을 벗어나면 안 될 것 같았거든. 나는 그렇게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
“문이 열리기를, 날 향해 웃어 주지 않아도,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아도……. 내가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기를 바랐습니다.”
꿈에서는 그렇게나 울었는데, 정작 말을 꺼낸 지금은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태서는 처음 느껴 보는 헛헛함에 그녀를 고쳐 안았다. 그러다 그 헛헛함이 해방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뜨거우면서도 차가웠다. 시리도록 아픈 동시에 신음이 새어 나올 만큼 감당하기 힘든 희열이었다. 심장이 울컥, 깊은 바닷물을 토해 내는 기이한 느낌.
시커멓고 질척대던 것들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새살이 돋아나듯 간지럽게 채워지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주어 저를 안은 여자를 향하는 감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재인이 울고 있음을 알았다. 소리 죽여 우는 그녀의 뺨이, 그녀의 눈물이 흘러내린 제 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고운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숨을 고른 태서가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 저를 대신해서 울어 주는 여자를 위해 기꺼이 두 무릎을 꿇고 싶어졌다.
* * *
“너나 나나 꼴이 말이 아니다. 할 말만 하고 가.”
“돈 좀 있어?”
“……있겠냐?”
정재훈이 핏발 든 눈을 들어 테이블 너머에 앉은 유리를 쏘아보았다. 한밤중에 저를 찾아온 꼴이 엉망이었다. 저만큼이나 돈에 쫓기고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소속 아티스트의 행실과 발언이 문제가 되어 수많은 계약이 해지되었다. 계약금의 몇 배가 넘는 돈을 물어 주고, 연락되지 않는 아티스트들을 찾아 나서야 했다.
소송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가 건 소송도 있었고, 상대가 건 소송도 있었다.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지만, 사실상 파산이나 다름없었다. 면도는커녕,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한 채 정신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무실 직원은 다 그만두었는데, 어째서인지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비서만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너, 이대로 윤재인 포기할 거야?”
“……가라.”
“포기할 거냐고 묻잖아! 다 잃은 마당에, 윤재인이라도 가져야 하지 않겠어?”
“무슨 수로!”
가뜩이나 힘든데 찾아와 긁어 대는 유리에게 재훈이 버럭, 소리 질렀다. 저라고 이러고 싶어 이러고 있겠는가. 눈만 감으면 강태서와 함께 있던 윤재인이 떠올랐다.
“젠장…….”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그녀의 뺨에, 입술에 입 맞추는 강태서를 상상하면 죽을 것만 같았다.
윤재인을 상대로 들불처럼 번지는 상상은 더럽고 추잡했다. 모두 정재훈이 바라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제가 아닌 강태서가 그럴 것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야, 네가 사업 좀 하더니 잊었나 본데, 너 원래 미친놈이야. 고상한 척하지 마. 너는 윤재인 납치해서 같이 죽으려던 놈이라고!”
“……꺼져.”
재훈이 눈을 찡그리며 욱신거리는 턱의 상처를 가린 채 문을 가리켰다. 하지만 유리는 굴하지 않았다.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서 뭐 해? 이럴 바에는 그냥 윤재인이랑 같이 죽으란 말이야!”
“뭐……?”
“내가 도와줄게. 이번에는 제대로.”
“…….”
“너도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윤재인 가져 봐야지.”
악마처럼 속삭이는 조유리의 커다란 눈이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