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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밤낮 (93/123)


#93. 밤낮
2023.05.19.



“빨리 왔네요? 지금 막 아이싱 끝내고, 흡……!”

2층 주방에 있던 재인은 다급하게 저를 안는 태서의 기세에 놀라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듯 저를 보듬고 매만져 대는 남자의 품에서 채 물기를 닦지 못해 젖은 손을 어정쩡하게 든 채였다.


“태서 씨……?”

대답할 여유도 없이 어깨를 웅크려 재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남자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재인은 천천히 몸에 힘을 빼 그에게 저를 온전히 내주었다. 물에 젖은 손이었지만, 절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너른 등을 도닥여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만.”

“…….”

“조금만 이러고 있을게요.”

사실은 조금 걱정하던 참이었다. 주주 총회가 끝나자마자 강태서 혼자 내뺐다고 앰버가 연락해 왔다. 소식을 듣자마자 태서에게 전화했는데,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네, 재인 씨.”


“태서 씨, 앰버한테 연락받았어요. 총회는 잘 끝났다면서요? 바로 집으로 오는 거예요?”


“…….”


“태서 씨?”


“……아무 일, 없습니까?”


“무슨 일요?”


“…….”


“아, 상화랑 테드 걱정하는 거예요? 둘이 어색하기는 해도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런데 상화가 아직도 테드한테 화가 나 있는지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하네요. 조금 이상해요. 상화가 이렇게 오래도록 화를 내는 애가 아닌데…….”

 
태서는 주주 총회에 가기 전, 상화를 집으로 불렀다고 했다. 상화와 통화하는 것을 들은 테드 역시 자기 역시 재인과 함께 있겠다고 했다는데, 잠시 고민한 끝에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고 했다.

태서는 좀처럼 남의 일에 나서는 일 없는 테드가 재인의 곁을 지키겠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더불어 재인 외의 다른 사람이 제 집에 드나드는 것도 내켜 하지 않는 듯했다.

그가 상화와 테드를 재인의 곁에 머물게 한 것은 다 그녀를 위해서라는 걸, 재인은 알고 있었다. 피곤한 와중에도 잠 못 들고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를 태서가 몰랐을 리 없다.


“난 괜찮아요. 내 걱정 하지 말고 잘하고 와요.”


“정말? 정말 괜찮습니까?”

 
마음을 읽어 내듯 빤히 바라보는 태서의 눈동자는 한없이 제게 다정했던 지난밤을 닮아 있었다. 결국, 재인은 어지러운 속내를 털어놓았다.


“……아뇨. 사실은, 마음이 복잡해요.”


“이것 봐. 착한 윤재인.”


“착한 게 아니라…….”


“착한 겁니다. 그러니 내가 자꾸 괴롭혀도 결국엔 받아 주지.”

 
웃으며 뺨을 매만지는 남자의 능청스러움에 푸스스, 웃음이 새어 나갔다. 그제야 태서의 눈에 어려 있던 걱정이 옅어졌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랑 상관없이 살고 싶어요. 미워하고 싶지도 않아. 아예 그 사람을 모르고 살았다면 좋을 텐데요.”


“재인 씨가 죄책감 느낄 필요 없습니다. 조대훈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을 받는 겁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일이었어요. 우리는 그 시기를 앞당긴 것뿐입니다.”


“응, 그렇게 생각할게요.”


“30분 안으로 상화 씨가 올 겁니다.”


“상화가요? 이 시간에? 요가원은 어쩌고요?”


“알아서 하겠다고, 걱정하지 말라던데. 테드도 올 겁니다. 둘이 만나게 하는 게 잘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건 두 사람이 알아서 하겠죠.”


“음…….”


“혼자 두고 싶지 않아서 부른 건데, 괜한 짓을 했습니까?”

 
경호 인력이 집을 2중으로 지키고는 있었지만, 그건 물리적 경호였다. 친부를 회장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오늘, 재인에게 심리적 안정이 필요할 거라는 건 태서의 의견이었다.

재인은 수긍했다. 어떻든 친부를 끌어내리는 일이었다.

제가 지핀 복수의 불씨를 키우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지만, 자꾸만 생각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런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려면 혼자 있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 있는 것이 나을 터였다.

그래서 상화만 바라보는 테드, 테드의 눈을 피하는 상화와 함께 어색한 시간을 보내다가 앰버에게 연락받고 태서에게 전화했다.

그런데 일을 성공적으로 끝냈을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처음엔 재인도 못 알아챘지만, 분명히 평소와는 달랐다.


 


“무슨 일 있어요?”

“……없습니다. 앞으로도 아무 일 없을 거고.”

강태서는 재인의 기분을 최우선으로 살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성공적으로 주주 총회를 끝낸 사람 같지 않았다.

어딘가 겁에 질린 듯, 옷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손이 차가웠다. 늘 따뜻하게 감싸 주던 손이었는데. 재인으로서는 처음 보는 태서의 모습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처음은 아니었다. 함께 잠드는 날이 많아지면서 재인은 태서가 이따금 악몽에 시달린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날이면 꼭 두통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마다 태서는 평소보다 조금 더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를 안았다. 재인은 제 몸에 얼굴을 묻고 오래도록 숨을 고르는 그를 느끼고는 그를 마주 안곤 했다.

시간이 흐르고 비로소 서로의 체온이 비슷해졌을 때, 그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안정을 찾은 그에게 재인은 아무런 말 없이 마주 웃어 주었지만, 속으로는 늘 그를 걱정했다.


“나쁜 꿈을 꾸었어요?”


“……응.”


“절벽에서 떨어지기라도 했어요?”


“……비슷합니다.”


“음, 태서 씨 키가 더 크려나?”

 
힘겨워하는 그에게 농담을 건네며 손을 맞잡아 주었다. 겨우 그 정도였다. 잠꼬대하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애절해서,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기에 차마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정확하게 묻지 못한 것이다.

때로는 악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가 걱정되어 팔을 뻗었다. 그러면 태서는 잠결에도 맹목적으로 재인에게 안겨 들었다.

늘 너른 품으로 저를 보듬어 안아 주던 모습과는 달랐다. 재인은 그때만큼은 태서가 겁에 질린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태서가 집에 도착하기 전, 재인은 상화, 테드와 함께 뉴스를 보았다.

구속 수사에 응하는 조대훈 회장에 대한 소식이 속보로 전해졌다. 보는 내내 입 안이 썼다. 싫어한 사람이고, 미워한 사람이지만 그의 불행을 계획하고 성취해 낸 소감은 불편했다.

하지만 재인은 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제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 꽉 끌어안은 남자를 품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재인은 태서의 굳은 등이 서서히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떨림이 진정되고 온기가 도는 커다란 손을 확인했다. 품에 뛰어든 짐승 한 마리를 길들이듯, 그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재인의 손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


“레몬 마들렌 구웠어요. 태서 씨 오기 전에 막 아이싱 끝냈으니까 굳는 대로 같이 먹어요.”

“후……. 냄새 좋네요. 굳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레몬 마들렌 냄새가 좋다는 건지, 제 냄새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는 여전히 재인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채였다.


“음, 정원 테이블 위에 두면 금방 굳을 거예요. 날이 추우니까.”

“그냥 주방에 둡시다. 산책하러 나간 고양이가 먹으면 안 되니까.”

“고양이는 신맛 싫어하지 않아요? 밖에 둬도 안 먹을 것 같은데. 아까 거실에서 놀다가 레몬 향기 제대로 나기 시작하니까 나가 버렸거든요.”

“그래도 실내에 둡시다.”

“실내에서는 굳는 게 조금 더 오래 걸릴 거예요.”

이상하게 고집부리는 태서의 말에 재인이 의아해할 때였다.


“잘됐네.”

“응……?”

“굳을 때까지, 나랑 놀아 줘요.”

진득하게 귓가를 간질이는 말에 태서의 등을 쓸어내리던 작은 손이 멈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딘가 서러운 아이 같던 남자는 어느새 짓궂은 말을 속삭이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놀아 달라는 말을 이렇게나 야하게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윤재인.”

“응…….”

“놀아 줘.”

“낮부터……?”

“노는 데 밤낮이 어디 있어.”

귓가에 머물던 그의 입술이 목선을 따라 아래로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게 기울어져 오는 그를 감당하며 버티고 서 있던 재인 역시 한 발, 두 발, 태서가 움직이는 대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결국, 재인이 그의 손에 이끌려 앉은 곳은 아직 다 치우지 않은 조리대 위였다. 마들렌 틀에 덧가루로 뿌려 댄 밀가루가 눈처럼 내려앉은 조리대 위에 그녀를 올려 앉힌 태서의 눈빛이 절절 끓는 듯했다.

재인은 제 손바닥에 입 맞추며 가만히 저를 응시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애정을 갈구하는 남자의 눈동자가 뜨겁게 일렁였다.

그 안에 깊숙하게 도사린 불안감을 읽어 낸 재인이 천천히 조리대를 짚고 있던 다른 손을 들었다.

하나, 둘. 입고 있던 니트의 단추를 풀어내는 재인의 시선에 흔들림은 없었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들어찬 것은 오직 강태서였다.

점점 더 짙어지는 욕망을 거칠게 숨을 삼키며 참아 내던 남자가 서서히 몸을 숙인다. 그러더니.


“아……!”

이윽고 그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제게 얼굴을 묻은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으며, 재인은 눈을 감았다.

아까는 차갑던 그의 귀가 따뜻해져서, 떨리던 커다란 손이 뜨겁게 닿아 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불어난 감각의 홍수에 떠밀려 그를 끌어안으면서도, 재인은 그가 제 안에서 평온을 찾기를 바랐다.

* * *

태서는 허전함을 느끼고 깼다. 품에 있어야 할 재인이 없었다. 갑자기 찬바람에 내쫓긴 듯 정신이 들어 재인을 찾아 나선 태서는 정원의 돌담 위에 앉은 그녀를 발견하고 안도했다.

어느덧 밤이었다. 재인의 뒤로 멀리 서울의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었다. 태서는 야경을 감상 중인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저는 지금 이 풍경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 한 장의 사진처럼 가슴에 남을 그녀를, 그리고 이 밤을 오래도록 새기던 그가 이내 발걸음을 뗐다.


“깼어요?”

“응.”

“잘 자고 있어서, 태서 씨 자는 거 한참 보다가 조금 전에 나온 건데.”

재인이 태서가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는 담요를 여며 쥐며 돌아보았다. 태서가 웃으며 재인의 곁에 앉았다. 뺨을 매만지자 가만히 기대어 온다.

조금 전에 나왔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그녀의 두 뺨이 아직 따끈했다. 태서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뒤에서부터 끌어안고 작은 어깨에 턱을 슬쩍 괴었다.

둘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도시의 밤이 이상하게 따뜻하게 다가왔다.


“여기, 참 좋아요.”

“이 경치에 반해 여기에 집을 지었습니다.”

“어떡하죠. 나 한 달만 살 생각이었는데, 이 집에 정들겠어.”

“정들어서 계속 같이 살면, 나는 좋은데?”

진심이 가득 담긴 태서의 말에 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은 태서의 손에 힘이 실린다. 아예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겨 아예 무릎 위에 앉혀 안는 태서를, 재인은 나무라지 않았다.


“태서 씨.”

저를 부르고 침묵하는 재인을 향해 태서가 고개를 들었다. 재인은 말을 고르는 듯,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태서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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