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나의 지옥보다 너희의 지옥이 길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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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나의 지옥보다 너희의 지옥이 길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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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나의 지옥보다 너희의 지옥이 길 테지
2023.05.16.
주주 총회 중간부터 보이지 않던 김 실장이 나타나니 불안하던 마음이 진정됐다. 마음이 놓이는 것과는 별개로 오래 자리를 비워 둔 것에 대해서는 짜증 났다.
분명히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그랬겠지만, 아까 같은 상황에서 늘 자신의 곁에 붙어 보필하던 사람이 없다는 건 화나는 일이었다. 다른 비서진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30년 넘게 제 곁을 지켜 온 개를 대신할 순 없었다.
“왜 대답이 없어?”
보는 눈이 있으니 굳이 빼돌린 문서나 자료 가까이에 다녀오지는 않았을 거다. 말도 없이 이렇게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지 않았던 것은 처음이기에 질책하는 목소리가 컸다.
“김 실장,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여기까지입니다.”
“……뭐?”
감히 제 말 허리를 자르고 엉뚱한 소리나 해 대는 김 실장을 향해 조대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제가 김 실장으로 일하는 것은 여기까지라는 뜻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스멀스멀 번지는 불쾌함에 대훈의 눈썹 사이가 한껏 좁아졌다. 늘 대훈의 어깨쯤에 시선을 맞추고 공손하게 고개 숙이던 개가 빳빳하게 고개 들고 저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양 건설 총수가 될 사람이다. 그가 회장 자리에 있는 동안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도움 주는 사람이 되어라.”
“…….”
“지태광 이사장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반듯하게 걸어와 책상 위로 올려 둔 것은 사직서였다. 대훈이 입을 꽉 다문 채 매서운 눈빛으로 문 앞에 선 김 실장을 쏘아보았다.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셨으니.”
거기까지 말한 김 실장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키우던 개의 불손함을 확인한 대훈의 맞다물린 턱이 불룩해졌다.
“아니, 끌려 내려오셨으니……. 제가 할 일은 끝난 겁니다.”
충성스러운 개라 여겼던 김 실장의 배신을 깨달은 순간, 대훈은 또 하나의 진실을 마주했다. 눈앞에 선 남자는 한 번도 제 개였던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걸로 고아가 된 저를 거둬 주신 지태광 이사장님께 빚은 다 갚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제가 아닌, 죽은 지태광 이사장에게 충성을 다했던 것이다.
“김 실장, 너 이 새끼…….”
“김형주.”
오래도록 김 실장이라고 불러만 왔기에 이름을 잊었다. 늘 제 앞에 납작 엎드리고 있던 존재가 몸을 일으켜 몸집을 불리며 서는 듯한 환시에 대훈이 낮게 침음했다.
“탐이 났나? 지승희의 남편 자리, 조유리의 아빠 자리. 그래서 나를 끌어내리는 데 동참했어?”
“젊은 날에는.”
쓰게 웃는 형주의 고개가 슬며시 기울었다.
“네가 가진 것들을 탐내기도 했었지. 너의 아내, 너의 딸. 다른 건 몰라도 그 둘은 내 것이어야 했으니까.”
대훈은 저를 내려다보는 초로의 남성을 생소하게 바라보았다.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갖지 못해 고통스러웠지. 곁에 두고도 체념하는 법을 가르쳐 준 건 시간이었어.”
“……그래서.”
대훈이 천천히 일어섰다. 책상 위에 반듯하게 놓인 사직서를 향해 조소를 날린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라도 되찾으려는 건가? 이런 식으로 나를 기만하고?”
대단한 순정이라고 손뼉이라도 쳐 줘야 하나. 조대훈이 비아냥거릴 생각으로 입을 열 때였다.
“가진 적이 없으니 되찾을 것도 없지 않겠나? 승희는 여전히 조대훈의 아내고, 유리는 앞으로도 조대훈의 딸일 테지. 네가 쓸모없다고 버리지만 않는다면.”
“…….”
“버린다고 하더라도 내 것으로 삼을 생각은 없어. 30년이라는 세월은 그들과 나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기에 넉넉한 시간이야.”
지극한 첫사랑을 잊지 못해 평생 혼자 산다고 생각했다. 함부로 주인의 것을 탐할 수 없어 욕심을 억누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대훈이 거칠어지는 호흡을 다잡으려 애쓰며 이를 악물었다.
“그동안 손과 발이 되어 개처럼 일했으니 네 것을 탐했다는 것에 대한 사과는 충분했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금고 안에 있던 것들을 검찰에 넘겼나?”
대훈이 형주를 향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뱉는 말 한 자 한 자에 독을 바른 듯 형형한 눈빛이었다.
“아니, 검찰에 넘긴 건 내가 아니야. 필요에 맞게 잘 쓸 사람에게 넘겼을 뿐이지.”
“하……. 강태서겠군. 그 대가로 뭘 받았지?”
“나를 인간이 아닌, 개처럼 부린 사람들의 몰락을 지켜볼 수 있는 즐거움.”
천천히 읊조린 형주의 말에 대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개처럼 부린 사람들이라는 건 지승희와 조대훈을 싸잡아 비난하는 말이었다. 그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이용만 한 두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대훈은 지난 30년간 온갖 더러운 일을 형주에게 시켰다. 부릴 손과 발이 있는데 뭐 하러 직접 손에 먼지를 묻히고 구정물에 발을 담근단 말인가.
때로는 저 대신 진창에서 뒹굴도록 일부러 내몰고 즐기기도 했다.
그가 필요해서 한 결혼이었고 아내에 대한 애정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전자 검사 결과를 조작하여 저를 속인 지승희와 그것을 도운 형주는 괘씸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의 아내 승희는 형주를 대훈과 결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순정을 이용해서 유혹하고, 그를 통해 아이를 가져 대훈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순정이 사라졌다면,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증오일 테다.
“배 속의 아이가 내 아이인 걸 알면서도 돈이 탐나 결혼한 건 너였어. 그래 놓고는 유리에게 한낱 고용인일 뿐인 나를 무시하는 법을 가르쳤어. 즐거웠나?”
대훈이 눈을 감았다. 재인을 향한 유리의 괴롭힘이 심했을 때, 보다 못한 김 실장이 막아선 적이 있었다.
그때 유리는 주제넘게 굴지 말라고 패악을 부려 댔다. 제 딸에게 수모를 당하는 김 실장을, 대훈은 거실 소파에 앉아 비웃었다.
“……이 피바람이 부는 상황에서 혼자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나?”
“아니. 검찰 측에서 이번에는 나 역시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할 거라고 하던데. 나는 더하고 빼는 것 없이 검찰 측에 협조할 생각이고. 피해 갈 생각은 없어. 나 역시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겠지. 다만.”
갑자기 서재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과천댁이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니 검찰 측에서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더불어 해산 명령에도 다시 모여든 시위대가 목청 높여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리가 웅웅, 세찬 겨울바람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배신감과 분노에 휩싸여 씨근덕대는 대훈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대훈은 김형주가 가졌을 탐욕을 믿어 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채워지지 않는 허무를 돈으로, 권력으로, 명예로 덧바르려 하니까 그라고 다르지 않을 거라 여긴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나. 그를 버티게 한 것은 탐욕이 아니라 복수심이었나.
“나의 지옥보다 너희의 지옥이 길 테지.”
즐거움이 잔뜩 배인 음산한 목소리에 실린 기대를 느낀 대훈이 눈을 떴다. 이윽고 마주한 것은 30년 동안 본 적 없는 미소를 지은 낯선 얼굴이었다.
* * *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 거야!
어지간한 스캔들은 다 연류동 쪽에서 막아 주고 있었지만, 현양 건설의 조대훈 회장이 끌어내려지고 젊은 미국 여성이 임시 CEO직을 맡았다는 것은 큰 화제가 되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강태서에게 몰린 스포트라이트는 당연했다. 현양 건설의 총수 일가가 망하는 데 태서가 한몫했다는 소문에 힘을 실어 주기 충분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친부가 직접 전화해 온 것은 의외였다. 주주 총회를 마치고 현양 건설을 나선 태서는 장 실장이 건넨 핸드폰을 손에 든 채 무감한 시선으로 차창 밖을 응시했다.
―그딴 쓸데없는 짓이나 하라고 정직 처분 내린 게 아니다.
“원하시던 강남 재개발 및 화미 아파트 재건축 사업, 어떤 식으로든 따서 드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친부는 애초에 건설 쪽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태서는 제게 내린 지시를 따를 뿐이라는 듯 굴었다.
―얌전히, 죽은 듯이 살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 놨더니.
“…….”
―거기서 몰래 돈을 모으고 남의 이름을 빌려 회사를 차렸다고. 음침한 게 네 엄마 같구나.
“……무정한 아비를 닮아 돈만 보고 좇았을 뿐입니다.”
차 안에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에는 온몸을 깊숙하게 찔러 대는 바늘이 숨은 것 같았다. 태서는 심해지는 두통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제가 뭘 하든 신경 쓰시지 않는 분 아니셨습니까?”
―푹 빠져 지내는 여자가 있다지.
“…….”
―그래, 어느덧 나이가 그렇게 되었어. 변치 않을 행복을 꿈꿀 때지.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을 약속하고 안온한 미래를 그리고.
말끝에 느껴지는 조소에 태서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쥔 채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친부와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네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하기엔.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너의 행복을 나만큼 기다린 사람이 없을 거다.
제 행복을 기다려 왔다는 친부의 말이 태서의 가슴에 얼음송곳처럼 박혔다. 시리게 후벼 파고들어 오는 것은 날카롭게 벼려진 증오심이었다.
통화하는 목소리에도 시커멓게 덩어리진 미움이 이렇게나 선연한데, 함께 바라고 원하며 행복을 기다렸다는 말일 리 없다. 태서는 질식할 듯 목을 죄어 오는 불안감에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내가 주지 않은 것을 가질 생각 하지 마라.
“…….”
―너는 어떻든 나처럼 살게 될 거다.
저처럼 행복을 모르고 원망에 사로잡혀 살게 될 거라는 저주는 질퍽하고도 끈적거렸다. 귀에 들러붙어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지독하게 일관되는 냉대에 숨이 막힌 태서는 손톱으로 손끝을 꾹꾹 눌러 댄 끝에 가까스로 숨을 들이켤 수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 힘주어 내뱉는 목소리는 다행히도 떨리지 않았다.
“그렇게 살지, 않을 겁니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지. 네가 나를 닮았다는데.
“…….”
―기대하마.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커다란 손이 덜덜 떨렸다. 이명이 울리기 시작한 귀를 막은 채 눈 감고 버티던 태서는 심장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괜찮으십니까?”
정장 재킷의 안주머니에 넣어 둔 개인 휴대폰의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태서는 그제야 조수석에서 계속해서 저를 부른 장 실장의 걱정 어린 시선을 알아차렸다.
“후……. 괜찮, 습니다.”
물 밖에 나온 사람처럼 숨을 몰아쉰 그가 떨리는 손을 들어 핸드폰을 꺼냈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화면을 밝히는 윤재인, 세 글자였다.
쿵쿵, 귓가에 떨어진 심장이 묵직하게 울렸다. 반가운 마음이 들기 전에 먼저 순식간에 몸집을 키운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지금 재인은 상화, 테드와 함께 있어야 했다. 정륜동에서 저를 기다리며 레몬 마들렌을 구워 놓겠다고 했다.
설마, 아니겠지. 친부가 예고한 불행이 그녀를 덮친 것은 아니겠지.
부디 그녀이기를.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로 저를 불러 주기를. 집으로 돌아가면 온통 달콤하고 상큼한 레몬 향을 묻힌 그녀가 두 팔 벌려 저를 맞이해 주기를.
제발. 그녀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이 기대가 유리처럼 깨지지 않기를. 이 바람이 마른 화초처럼 바스러지지 않기를.
꼴깍꼴깍, 숨을 앗아 갈 듯 차오르는 불안이 그를 잠식해 갔다. 떨리는 손으로 통화에 응한 태서가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네, 재인 씨.”
눈 꼭 감은 채 저를 살게 할 유일한 존재의 이름을 부르는 태서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창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