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 Mr. 조 (91/123)


#91. Mr. 조
2023.05.12.


이를 악문 대훈의 턱이 잘게 흔들렸다. 확장된 동공 역시 방향을 잃고 지진이라도 난 모양새였다. 꽉 쥔 주먹이 테이블 아래에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니, 강건한 몸 전체가 크게 들썩였다.

과반이 넘는 주주들의 찬성으로 회장 해임안이 통과되었다. 제 자리를 잃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참석했던 대훈은 제 편에 설 거라 여겼던 임원 대부분이 돌아선 것을 확인했다.

솟구치는 분노에 치를 떨면서 대회의실을 채운 아는 얼굴들을 면면히 훑듯 노려보았다. 피곤함에 화가 겹친 탓에 두 눈은 핏발이 선 채였다. 그와 마주친 이들은 대부분 시선을 피했다.


“감히……. 감히……!”

노기 어린 대훈의 목소리에 현양 건설 임원들은 헛기침하며 종이를 팔랑거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들끼리 귓속말하고,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확인하는 척하기 바빴다.


“감히, 지금! 누가 누구를……!”

주체할 수 없는 화를 풀어낼 대상을 탐색하는 대훈의 귀에 힘이 실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덕적,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대표를 끌어내리는 건 당연한 겁니다!”

“진작에 스스로 물러났어야 합니다! 오너 리스크로 주가가 휴지 조각이에요!”

“회사는 살려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모두 같이 죽자는 겁니까?”

“진정으로 회사를 생각한다면 결정에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더는 현양 건설 관련해서 뉴스에 오르내리는 일을 만들지 맙시다!”

소액 주주들의 소신 있는 의견에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눈을 들어 그들을 살피던 대훈은 맞은편에 앉아 그린 듯 미소 짓고 있는 강태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는 사람들 틈에서 입을 꼭 다문 채 앉아 있는 태서가 천천히 자세를 반듯하게 세웠다.

그러자 너른 어깨와 가슴팍이 위압감을 키웠다.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기대앉으며 턱을 들어 저를 응시하는 모습이 나른한 맹수 같았다.


“…….”

대훈은 죽일 듯 노려보고, 태서는 삐딱하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지만, 대회의실 안에 있는 모두가 알아챌 만큼 팽팽한 기 싸움이었다. 누구 한 사람 양보하지 않는 눈싸움이었다.


“흠, 흠……. 그러면 다음 안건인 임시 CEO 선출 건에 대하여…….”

어떻든 주주 총회를 진행해야 하는 인사 팀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쾅, 소리와 함께 책상을 내려친 대훈이 일어서서 대회의실 전체를 싸늘한 시선으로 훑은 까닭이었다.

웬 너드 같은 금발의 안경잡이 외국인과 그 곁에 앉은 붉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앰버를 봤을 때 대훈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또다시 강태서였다.


 


“결국, 자네였군.”

태서와 나란히 앉은 E&K 대표와 비서진을 발견하고 뒤늦게 투자 역시 태서가 놓은 덫이었음을 깨달은 대훈이 탄식하듯 내뱉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태서를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몇몇은 강태서를 알아보고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한때는 혼담이 오가지 않았나.

강선 건설의 강태서가 왜 이 자리에 있나. 혹시 소문 도는 게 사실인가.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이 자리에 참석한 강태서를 힐끔거린 사람들이었다.


“사라진 5.8퍼센트의 주식, 애타게 찾으셨을 텐데.”

“…….”

“어디에 있었을 것 같습니까?”

태서는 가지고 있던 주식과 재인으로부터 양도받은 주식 5.8퍼센트를 더해 주주의 자격으로 총회에 참석했다. 그걸 몰랐던 조대훈의 눈이 커졌다.


“돌아가신 조성환 회장님께서는 혜안이 있으셨나 봅니다.”

태서의 입에서 평생 제 능력을 인정해 주지 않았던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조대훈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아들의 그릇이 얼마나 좁은지, 아들에게 회사를 넘기면 어떻게 될지, 다 알고 계셨나 보더라구요.”

“너, 너 이…….”

“그러니 주식 중 일부를 몰래 숨기신 겁니다. 그것도, 아들이 절대 찾지 않을 곳에.”

절대 찾지 않을 곳을 말하며 비스듬히 웃는 태서를 보는 순간, 대훈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윤세나의 미소였다.

임신 사실을 밝히며 아이를 지울 생각이 없다고, 홀로 키울 거라 말하던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대훈은 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제 아이를 가진 윤세나를 미련 없이 버렸다. 사실 버렸다고 말하긴 어폐가 있었다. 그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제가 윤세나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세나는 딸아이의 아버지로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억지로 몸을 취하고 품어 제 아이를 갖게 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 여자는 아이를 가진 채 미국으로 날아가 버렸다.

대훈은 두고두고 생각했다. 만약 그때 제가 자만심과 욕심을 내려놓고 자신을 바로 볼 줄 알았더라면 달라졌을까.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윤세나를 따라갔더라면, 살면서 오직 그녀 하나만을 향했던 뜨거운 마음을 고백했더라면, 그래서 아이의 아버지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더라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만약’의 굴레에 갇혀 괴로운 것은 그 한 사람뿐이었다.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했던 대훈은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후회가 짙어질수록 윤세나를 원망했고, 그리움이 커질수록 윤세나를 미워했다.

선은 네가 그은 게 아니라 내가 그었다고. 네가 날 버린 게 아니라 내가 널 버린 거라고. 그러니 다시 찾는 일은 없다고. 그렇게 되뇌며 살아온 세월이 자그마치 30년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주식 일부가 윤세나 손에 있었던 건가. 대훈이 짙어지는 의심을 확인하려 입을 열었다.


“자네, 지금…….”

“그런데, 지금 이럴 때가 아니실 텐데요.”

잘려 나간 말허리에 조대훈의 눈썹 사이에 짙은 세로줄이 그어졌다. 태서가 여유로운 손동작으로 핸드폰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조그맣게 웅웅거리는 소리에 조대훈이 슬쩍 고개를 기울이고 사람들의 시선 역시 태서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을 향했다.


“아, 소리가 너무 작죠.”

태서가 친절하게도 볼륨을 높여 주자 소리가 조금 더 분명하게 들려왔다.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오늘 오전, 검찰이 ‘증거 인멸 및 도망의 우려’를 근거로 조대훈 회장의 구속 영장을 신청했는데. 이에 법원이 빠르게 손을 들어 준 것입니다. 검찰은 어제 1차 조사를 마친 조대훈 회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재소환하여……>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속보에 순식간에 대회의실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대훈을 이미 회장 자리에서 끌어내린 후라고는 해도, 회사 가치나 평판에 영향이 없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구속 수사한다는 거 아니야?”

“검찰 쪽에 제대로 된 증거가 있다는 얘기네.”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보던 조대훈의 턱이 툭 불거졌다. 태서를 노려보다 급히 몸을 틀어 문을 박차고 대회의실을 나섰다.


“김 실장!”

뉴스 속보가 뜰 정도면 진작 연락이 왔었어야 했다. 호통을 치며 회장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걷던 그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급한 소식을 전해 주었어야 할 김 실장이 총회 중간부터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딜 간 거야!”

물론 급한 일이 있으면 자리를 비울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 그런 걸 참작할 수 있을 리 없다. 거칠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대훈의 눈에 뒤쪽에서 느긋하게 다가오는 인영이 보였다.

곧고 길게 뻗은 몸은 선이 굵고도 짙었다. 거만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걸음걸이에 자연스러운 품위가 묻어났다. 대훈은 또다시 제 부아를 돋우려 나타났을 게 분명한 태서를 향해 이를 갈았다.


“자네가 뭐라도 된 것 같나?”

“네.”

가까이 다가온 태서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슬쩍 고개 숙여 속삭이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윤재인의 연인이 된 후로 줄곧 뭐라도 된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고.”

그 어떤 영광보다도 더한 자리라는 듯, 젊은 놈은 제가 윤재인의 연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우습군.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고작, 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바로 정정해 주는 팔불출스러움에 조대훈이 실소했다. 여자 치마폭에 쌓인 인간치고 끝이 제대로인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나를 적으로 돌린 것, 후회할 걸세.”

“먼저 회장님께서 윤재인을 적으로 돌린 것을 후회하셔야죠.”

오류를 바로잡아 주는 말에 대훈이 입술을 짓씹는데 태서가 슬핏 미간을 찌푸렸다.


“아, 이제는 회장님이 아니시죠.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

“Mr. 조.”

영국식 악센트가 강한 영어로 저를 부르는 호칭에 대훈이 불쾌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강태서는 산뜻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외국 생활을 오래 해서. 마땅한 호칭이 이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김 실장!”

대훈이 다시 김 실장을 부르며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태서가 긴 팔을 뻗어 대훈이 눌렀던 버튼을 다시 눌렀다. 엘리베이터 호출을 취소한 것이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건가!”

“회장실로 가실 필요 없을 겁니다. 이젠 거기, 다른 사람이 써야 할 테니까. 그보다는 서두르셔야겠습니다.”

예의를 갖춰 말하는 부드러운 음성이 귀에 거슬렸다. 대훈은 지금 강태서를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잡티 하나 없는 얼굴로 상큼하게 웃어 보인 태서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고개는 숙인 채, 천천히 눈만 들어 마주하는 시선이 사뭇 불량스러웠다. 그러고 속삭이는 모습이 속을 긁어 놓으려 작정했는지, 기막히게 잘난 얼굴이었다.


 


“이번 조사는 좀 더 길어질 듯하니, 댁에 가셔서 짐이라도 좀 싸시려면.”

“김 실장!”

김 실장을 부르짖는 대훈을 두고 태서가 돌아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금 대회의실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분노에 찬 대훈은 돌아보지 못했다.

* * *

연락되지 않는 김 실장을 두고 대훈은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경찰이 해산을 명령한 탓에 집 앞을 지키고 있던 시위대는 사라진 후였고, 과천댁 혼자 지키고 있는 집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제 곧 검찰에서 들이닥칠 테다. 끌려 나가느니 제 발로 나가는 게 더 나았다. 대훈은 길고 긴 심문이 이어질 것을 앞두고 마지막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이미 다 빼돌려 놨는데, 도대체 검찰에서 무엇을 근거로…….

차가 다 식도록 눈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대훈이 갑작스럽게 눈을 떠서 주시한 곳은 금고였다.

불길한 예감에 금고를 여는 손이 빨랐다. 자료는 모두 김 실장이 오송 어딘가로 빼돌려서 이미 텅 비어 있을 거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현금 다발을 묶었던 종이 끈 몇 개와 빈 봉투 같은 종잇조각들이 나뒹구는 금고 안을 목격한 대훈은 뻐근해지는 심장 부근을 눌렀다.

사람이라면 욕심이 없을 수 없다. 김 실장의 눈앞에 먹이를 흔들 듯 큰돈을 흔들어 댄 게 수십 년이었다.

굶주린 채 군침을 질질 흘리며 기다리고 있던 개가 그 커다란 유혹을 외면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럴 리 없는데, 자꾸만 불안함이 몸집을 키웠다.


“찾으셨습니까.”

“어딜 갔다가 이제 와!”

뒤쪽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대훈이 화부터 내며 돌아섰다. 서재의 문 앞에 반듯하게 선 것은 그가 그토록 찾던 김 실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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