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 알아서 자멸의 길을 걸을 사람 (90/123)


#90. 알아서 자멸의 길을 걸을 사람
2023.05.09.



“회장 해임안?”

“그렇습니다.”

“현양 건설이 내 건데 누가 누굴 해임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검찰 조사를 마친 대훈이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몰려드는 취재진을 피해 새벽의 도로로 나서자마자 김 실장이 오늘 오후에 열릴 주주 총회에 대한 소식을 알려 왔다.

과반은 아니어도, 그에 준하는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대훈은 코웃음 칠 일이었다. 몇몇이야 저들끼리 모여 회장을 해임하자느니 하는 헛소리를 한다 쳐도, 제게 약점 잡혀 제 등에 칼 꽂지 못할 임원이 몇이나 있다.


“내가 물러나면 저들은 어떻게 될 것 같아? 싹 다 거리에 나앉는 거야. 현양이 나고 내가 현양인데, 해임안은 무슨.”

만에 하나 돌아서는 것들이 있다고 해도, 사라진 5.8퍼센트의 주식을 찾아내지 못하는 이상 저와 제 일가의 보유 주식을 넘어서기는 힘들었다.

한때는 대훈 역시 눈이 벌게지도록 증발한 주식의 행방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끝끝내 찾지 못했다. 제가 찾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쉽게 찾을 리는 없으니, 대훈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내나 딸아이에게 넘겨 놓은 주식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검찰 조사를 받는 중인 아내가 제 뜻대로 주식을 처분하기는 힘들 터였다.

조유리는 주식이나 그쪽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욕심이 많은 성격이기에 가진 것을 함부로 내놓을 리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양평에 옮겨 놨나?”

압수 수색 영장을 받은 검찰이 어제 오후에 한바탕 집을 쓸고 갔을 것이다. 대훈은 제 금고에 들어 있던 것들을 김 실장이 양평 별장에 잘 옮겨 뒀으리라 믿었다.


“별장도 안전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다른 곳에 옮겨 두었습니다.”

“어디?”

“고향 집 근처입니다.”

“아, 아산이라고 했던가?”

대훈은 언젠가 김 실장이 보육원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와 둘이 살던 곳이라고 들었던 것을 떠올리고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오송입니다. 충북 청주에 속해 있는 작은 동네입니다. 지금 모실까요?”

“아니, 지금은 좀 피곤해. 쉬어야겠어. 빈손으로 돌아갔을 검찰 놈들도 나를 주시하고 있을 거고. 당분간 거기 그냥 두지.”

제아무리 검찰 놈들이 날고 긴다고 하더라도 수행 비서의 돌아가신 아버지 고향 집까지 뒤질 생각은 못 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대훈은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의자 깊숙하게 몸을 묻고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기댔다.


“이번 고비 넘기면 스위스에 다녀와야겠어.”

“예.”

“이번 일로 자네도 고생했을 테니 거기서 좀 쉬어야지.”

“……감사합니다.”

빼돌려 둔 비자금을 꺼내 한몫 떼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집을 잘 지킨 개에게 상을 주는 것은 중요했다. 대훈은 김 실장에게 적지 않게 챙겨 줄 생각이었다.


“그 아이는 어쩌고 있고? 아직도 강태서 그놈한테 잘 붙어 있나?”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유리 양은 어제 오전에 캐나다에 갔습니다.”

“아……. 애 외할아버지 별장이 거기에 있던가?”

“예.”

“음…….”

징징거리고 있을 게 분명한 철부지 조유리는 조대훈의 안중에 없었다. 대훈은 검찰 조사받는 내내 윤재인, 그 맹랑한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비교적 유순했던 때를 생각하고 협박하니 부러져도 좋다고 덤벼들던 아이였다.

제 엄마와 둘이 외롭게 살던 아이라는 것을 잊었다. 저에게 좋은 감정이라고는 없는 것 같으니, 데려다 좋은 패로 쓰기는 글렀다. 그렇다면…….


“쓸모없기는…….”

혀를 차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대훈이 고막을 긁는 바이올린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음악 꺼. 조용히 가고 싶으니.”

“예, 알겠습니다.”

몇 날 며칠에 걸친 강도 높은 조사에 쌓인 피로감이 컸다. 텅 빈 집으로 향하는 길, 늘 듣던 클래식 음악도 거슬린다고 느낀 대훈은 고요 속에 눈을 감았다.


 

* * *



“태서도 가게?”

“그러면, 그 좋은 구경을 너만 하게? 대주주는 너지만, 나도 참석 자격은 있어.”

고작 하룻밤 만에 피곤이 풀렸는지, 멀끔해진 태서가 정장을 갖춰 입고 나타났다. 붉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채 장 실장과 얘기 중이던 앰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서지 않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래서 나를 앞에 세워 현양 건설에 투자하게 한 거였잖아.}

{의미 없어. 어차피 그쪽에서는 이번 일에 내가 개입한 상황을 다 알고 있고. 거기다 나와 재인 씨에 관련된 소문이 지저분하게 도는 이상, 확실하게 해야지.}

{뭘 어떻게 할 건데?}

앰버의 질문에 태서가 비스듬히 웃으며 소매에 달린 커프스 버튼을 만지작거렸다.


“넥타이는 맬 줄 몰라서.”


“리본 매듯 매 줘도 하고 갈 겁니다.”


“아, 진짜. 바보 같아.”


“바보 같은 남자 별로라면서?”


“나 때문에 바보 같아지는 건 좀 괜찮은 것 같아요.”


“좀?”


“사실은 많이.”

 
태서의 티셔츠를 입은 채 웃으며 커프스 버튼을 채워 주던 재인에게서는 잠의 온기가 묻어났다. 태서는 당장이라도 재인의 몸에 얼굴을 묻고 침대 위로 쓰러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자다가 깨서 살짝 부은 눈매는 푸스스 웃을 때 못 견디게 귀엽고, 제가 입혀 놓은 티셔츠 바깥으로 드러난 팔다리는 잘근잘근 씹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잠에서 막 깬 윤재인이 유독 달다는 것을 태서는 알고 있었다. 잠이 묻은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더 따끈하고, 조금 더 말랑하고, 조금 더 부드러웠다. 아침마다 태서가 그녀를 못살게 구는 이유였다.


“왜 또 그렇게 봐요?”


“……나가기 싫어서.”

 
간지러움을 잘 느끼는 부위마다 코끝으로 내리그으면 터질 웃음소리가 귀에 선했다.

태서는 또다시 몸집을 키우며 고개 드는 욕심을 애써 무시했다. 대신 고운 뺨을 진득하게 매만지는 것으로, 그러다 도톰한 입술 몇 번 베어 무는 것으로 겨우 달랬다.


“태서 씨 가면 난 더 잘 거야.”


“밤새 푹 자라고 일부러 안 깨웠는데, 더 자겠다는 겁니까? 많이 피곤해요?”

 
공항 주차장에서부터 불안해하던 재인과 함께 집에 오자마자 반나절 넘도록 푹 잤다. 잠들었을 때는 분명히 태서가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깨어 보니 재인의 작은 품에 태서가 안긴 채였다.

요즘 들어 그렇게 깨는 날이 종종 있었다. 태서는 그게 싫지 않았다.

그래서 잠에서 깬 뒤에도 그녀의 품에 코를 묻고 오래도록 눈을 뜨지 않았다. 뒤늦게 일어난 재인이 그를 깨울 때까지. 그런 아침을 맞이하는 게 요즘 태서의 행복이었다.


“오늘 밤에 잘 거 당겨 자는 거예요.”


“음…….”


“밤에 안 자려고.”


“…….”


“태서 씨도 못 자요. 미안하지만. 내가 안 재울 거야.”

 
당돌한 예고를 날리는 유혹 어린 눈빛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얼빠진 그의 입매에 가벼운 키스를 남긴 재인이 빙긋 웃으며 그를 현관으로 내몰았다.


“그러니까 잘 다녀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집 밖으로 나와 찬 공기를 맞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장 실장과 앰버가 기다리는 근처의 사무실로 향하는 동안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샌 것은 물론이었다.


{깔끔하게 정리해야지.}

{깔끔하게?}

{나도는 소문을 보니 윤재인이 악녀 역할에 조연이던데. 비련의 여주인공은 조유리고.}

어제 공항에서부터 사진이 찍힌 것치고 언론은 잠잠했다.

연류동 본가 쪽에서 태서와 관련된 사진이나 기사가 나도는 것을 막고 있는 듯했다. 친부인 강신재가 이런 데 신경 쓸 일은 없으니 아마도 할머니 임홍진 관장이 힘쓰고 있는 것일 터다.


{그래서……?}

{윤재인이 조연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 내가 남자 주인공이면 여자 주인공은 윤재인이어야지. 넌 뭐 한다고 이제 들어와. 어디 갔었어?}

뒤늦게 들어오는 테드를 향해 태서가 고개 들었다.


{한국어, 한국어 수업 들으러요.}

{갑자기 한국어 수업……?}

{……좋은 선생님을 찾아서.}

태서가 미심쩍은 눈으로 보는 사이, 테드는 빠르게 2층으로 올라갔다. 옷을 갈아입고 내려올 모양이었다.


“그러면, 원래 계획대로 실행하는 건가요?”

“네, 대신 조유리에 대한 검찰 조사는 없을 겁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장 실장의 물음에 태서가 생각에 잠겼다. 어제, 태서는 귀국하자마자 김 실장을 만났다. 재인이 앰버와 앰버의 남자친구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동안 이루어진 짧은 만남이었다.

그 짧은 만남을 통해 태서는 조대훈 회장과 그의 아내, 지승희를 향하는 김 실장의 원한을 읽어냈다.


“30년을 개처럼 살았으니, 이제는 사람답게 살 생각입니다.”

 
그가 덤덤히 밝힌 이야기는 놀라웠다. 그리고 조건을 달지 않겠다던 그였지만,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부탁해 온 것은 뜻밖이었다.


“어제, 유리를 캐나다로 보냈습니다. 거기, 유리 외할아버지의 별장이 있습니다. 유리는 당분간은 거기서 조용히 지내게 될 겁니다.”


“…….”


“그러니……. 그 아이는 이번 일을 최대한 비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 실장은 유리에게 자신이 친부임을 밝힐 생각도 없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상태의 유리에게 더 큰 혼란만 줄 뿐이니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호자 역할을 해 주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거기까지만 하는 것이 친부가 아닌, 오래도록 알아 온 김 실장 아저씨의 몫이라 여긴 듯했다. 이에 태서는 김 실장에게 제 뜻을 분명히 밝혔다.


“좋습니다. 검찰 측에 조유리와 관련된 부분은 빼고 넘기겠습니다. 김 실장님께서 먼저 관련 자료를 제외하지 않고 전체를 다 넘겨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뜻입니다. 하지만.”


“…….”


“이와는 상관없이, 조유리가 윤재인과 관련해서 제가 신경 써야 할 일을 벌인다면.”

 
태서는 제가 유리를 지켜보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사실 태서는 어제 유리가 공항으로 간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 후 행적에 대해서 아직 보고를 못 들었을 뿐이다.

유리가 캐나다로 갔다는 김 실장의 말에 태서는 바로 해당 지역으로 사람을 보냈다. 조금이라도 불안한 요소는 없어야 했다.

그가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정재훈에 관한 보고를 받는 것처럼, 캐나다에 있을 조유리 역시 당분간은 태서의 눈 안에 있을 예정이었다.


“한국으로 오게 될 겁니다. 와서 제 눈이 머무는 곳에, 사람들의 비난과 멸시로부터 숨지 못하는 곳에 머물게 될 겁니다. 저는 조유리의 숨통을 틔울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김 실장과의 만남은 끝났다. 그리고 오늘, 태서는 주주 총회에 참석해서 조대훈을 회장 자리에서 끌어내릴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임시 CEO로 앰버가 앉게 될 것이다.


“이유라…….”

태서는 저를 바라보는 장 실장과 앰버,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내려온 테드를 둘러본 후 미소 지었다.


“조유리는 검찰 조사 같은 게 아니어도, 알아서 자멸의 길을 걸을 사람이라서.”

“…….”

“내가 사람을 좀 잘 봅니다.”

싱긋이 웃으며 일어서는 태서에게서 느껴지는 한기에 앰버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갑시다. 바쁩니다.”

빨리 끝내고 와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재인이 저를 기다리는 집으로 가서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것, 그게 지금 태서에게는 가장 큰 미션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