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 설마 (89/123)


#89. 설마
2023.05.05.



“오늘 중으로 출국해야 해. 유리야, 어서.”

“나 안 가요. 할 일이 있다니까요?”

어서 짐을 싸라고 캐리어를 들이미는 김 실장에게 유리가 짜증 부렸다.

아버지뻘인 김 실장은 그녀가 태어난 이후로 줄곧 아버지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집에 드나드는 게 누구보다도 자연스러운 사람이었고, 유리에게는 늘 무뚝뚝한 삼촌 같은 느낌이었다.

오래 보아 왔기에 익숙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적 친밀감은 없었다. 아빠에게 부탁할 것이 있을 때 김 실장을 통해 연락하곤 했지만, 그건 그가 아빠의 수행 비서였기 때문이다.

간혹 김 실장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때가 있기는 했다. 출장 간 아빠가 제가 바라는 명품 가방을 잊지 않고 사 오실 수 있도록 채근해야 할 때가 그랬다.


“아빠가 잊지 않으시도록 아저씨가 계속 얘기해 주세요. 그거 한국에서는 못 구한단 말이에요.”


―그래, 말씀드릴게.


“모델명이랑 제품 사진 아저씨한테 보내 놨어요. 아빠는 바쁘실 테니까 아저씨가 매장에 미리 사람 보내 놔 주세요.”

 
평소에는 김 실장님이라고 불렀고, 무언가를 부탁할 때는 아저씨라고 부르곤 했다.

그렇게 김 실장에게 수시로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해서 닦달해 대고 나면, 아빠가 귀국한 후 유리의 방에는 그녀가 기다리던 쇼핑백이 놓여 있곤 했다.

아빠나 엄마가 알려 주지 않는 소소한 정보를 물어볼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김 실장은 적정한 선에서 알려 줬다. 대부분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정도였다. 정재훈에게 흘리기 위해 윤재인의 주소를 알아낸 것도 김 실장을 통해서였다.


“아저씨, 아저씨는 알고 있잖아요.”


―유리야, 그 일에 관해서는 회장님과 이사장님께 맡기고…….


“내가 뭘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니까, 주소만 알려 줘요. 걔, 지금 어디 있어요?”


―재인 양 일에 관해서는…….


“재인 양은 무슨, 걔 주소나 빨리 알려 달라구요! 내가 찾아가려는 거 아니니까!”

 
이런 식으로 몇 번, 김 실장의 도움을 받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제까짓 게 뭐라고 함부로 드레스 룸을 뒤져 캐리어를 꺼내 들이민단 말인가.

고작해야 고용인 주제에. 불쾌하기 그지없는 행동에 유리의 눈매가 절로 뾰족해졌다.


“……도대체 할 일이 뭔데 그러니?”

윤재인을 잡아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끌어다 놓고 제 주제를 알도록, 정신 차리게 만들겠다는 그녀의 계획을 김 실장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유리가 입을 꾹 다물자 김 실장의 한숨이 짙어졌다.

유리가 눈을 치떴다. 저 거슬리는 태도로 보건대, 김 실장은 저를 한심하게 여기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유리는 지금 공식적으로 할 일이 없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할 일이 있다며 말을 듣지 않고 있으니 괜한 고집이나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뭐라 할 말은 없었다. 누가 봐도 지금 유리는 할 일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할 일이 있을 때도 제대로 출근하지 않아 사람들 눈 밖에 난 그녀였기에, 지금 상황에서 제가 할 일이 있음을 강조해 봤자 제 꼴만 우스워질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 필요 없잖아요. 제 일에 참견할 생각 말고 아빠가 시키는 일이나 똑바로 하세요.”

“…….”

눈살을 찌푸려 못마땅함을 드러내자 김 실장이 입을 다물었다. 유리가 입술을 씰룩이며 그를 지나쳤다.


“그런데 아빠 왜 이렇게 못 나와요?”

“늦어도 내일 새벽에는 나오시지, 싶다.”

“엄마는요? 엄마도 며칠 걸려요?”

“엄마는 회장님처럼 길게 조사받지는 않으실 거야.”

“별일 없는 거죠? 엄마랑 아빠, 무혐의로 풀려 나오는 거죠? 우리가 망할 거라고 소문났다면서, 그거 말도 안 되는 얘기잖아요. 그렇죠? 설마, 아니죠?”

“…….”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이게 뭐냐구.”

검찰청에 조사받기 위해 들어간 아빠는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 엄마까지 불려 들어갔다. 전 국민의 눈과 귀가 현양 건설과 현양 재단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걱정과 불안감에 질투와 원망이 더해졌다. 술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상황에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을 누를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뻘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윤재인에게 사람을 붙이느라 갖고 있던 돈을 거의 다 써 간다. 붙잡아 데리고 있다는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소식이 전혀 없다.


“짜증 나.”

며칠 사이 입에 붙은 말을 중얼거리며 남아나지 않은 손톱을 입 주변에 가져가 질겅거리는데 드르륵, 눈앞에 캐리어가 들이밀어졌다.


“아, 안 간다잖아요!”

“이사장님 지시야.”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요?”

“그래, 그러니까 여권 챙겨.”

“최 비서 아저씨는 어딜 가고 김 실장님이 엄마 얘기를 전해요?”

“글쎄, 모르겠구나. 나한테 부탁하시던걸. 제시간에 공항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해. 한 시간 내로 짐 싸서 내려오거라.”

“무슨 짐을 한 시간 내로 싸라고! 나, 거기 가기 싫다구요. 거기는 쇼핑할 곳도 없는데! 그렇지 않아도 추운데 왜 하필 거기냐구요! 거기 가느니 차라리 집에 있을래요. 어차피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잖아요!”

엄마가 유리에게 가 있으라고 한 곳은 캐나다였다. 캐나다의 한적한 시골에 있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오래된 별장에 가 있으라는 지시를 따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사람들 눈 피하기에는 거기만 한 곳이 없다고 여기신 게 아닐까? 그래도 거기 가면 산책도 할 수 있을 거야. 유리야, 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은요? 엄마 차에 대고 달걀도 던졌다면서요!”

“공항 도착할 때까지 차에서 내리는 일은 없을 테니 괜찮을 거다.”

“……짜증 나, 진짜.”

애꿎은 김 실장을 노려보던 유리가 결국 일어섰다. 낚아채듯 캐리어를 잡아채 끌고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거칠었다.


 

* * *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나한테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어요.

{사생활 따위 없다고, 그런 거 안 챙길 테니 돈 많이 달라고 말한 건 테드 너야.}

―……이제 사생활 좀 챙기려고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젖은 공간에 울리듯 들려왔다. 화장실인가. 태서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한참 만에 연락이 닿은 테드를 향해 잔소리를 퍼부을 준비를 마쳤다.


{최근에 새로운 게임 출시된 게 있나? 아무리 그래도 너, 할 일은 하고 해.}

―게임하는 거 아니에요.

{너한테 게임 말고 다른 사생활이 어디 있어?}

―태서, 제발 좀 끊어요. 옆에 재인 없어요?

{어, 없어. 네가 왜 재인을 찾아? 찾지 마.}

―태서는 재인이랑 붙어 있어요. 한 시도 떨어지지 마요. 그나마 재인이랑 같이 있을 때가 사람 같으니까.

길어지는 잔소리가 싫었는지, 투덜거리는 테드가 통화를 끝낼 각을 재는 게 느껴졌다.

태서가 피식 웃으며 재인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잠시 거울 보고 오겠다고 한 재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자마자 확인할 거야. 일 다 해 놨는지.}

―……안 피곤해요? 좀 쉬면서 시차에 적응도 하고 그래요.

{가서 일 안 되어 있으면……, 아, 끊어. 아무튼 다 해 놔. 오후에는 갈 거니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태서가 가까이 다가온 재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테드, 연락됐어요?”

“게임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 게임. 난 또.”

“왜?”

“상화도 연락이 안 되어서요. 혹시나 하고.”

“……설마 둘이 또 같이 있었을까 봐 걱정했습니까?”

재인이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룻밤의 실수였다고, 테드와의 일은 없던 일로 치겠다던 상화였으니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음 쓰던 차였다.

안 하던 짓을 한 친구가 걱정되지 않을 리 없다. 재인은 작은 캐리어 두 개를 실은 카트에 기대어 선 태서가 한쪽 팔을 내밀자 잠깐 주변을 둘러보고는 스스럼없이 그 팔을 잡았다.

그러자 태서가 마음에 든다는 듯 자연스럽게 재인의 정수리로 입술을 내렸다.


“그런데, 이래도 돼요?”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동안은 집이나 동네에서 소소하게 데이트를 즐기던 둘이었다.

해외에서야 그렇다 쳐도,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소문으로 돌기 시작한 후 이렇게 국내 공공장소에서 관계를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안 될 거 있나?”

“우리, 소문났다면서.”

“소문나는 거 싫습니까?”

재인이 고개를 저어 보이자 태서가 윙크하듯 눈을 접어 웃었다. 이왕 연애할 거 세상이 다 알게 하자던 남자는 정말 그럴 생각인 모양이었다. 아예 재인을 제 품에 가두듯 하고는 카트를 밀기 시작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욕하는 거, 신경 안 써요.”

“현명하기도 하지.”

“태서 씨만 괜찮다면, 나는 좋아요.”

“배려심도 많고.”

추임새를 넣듯 장단 맞춰 칭찬하는 말에 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출국 게이트를 지나 공항 출구를 향해 걸음을 떼던 태서가 멈춘 것은 그때였다.


“……태서 씨, 왜요?”

“……아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몇몇 곳을 응시하는 태서의 시선을 따라 재인 역시 커다란 눈을 들어 살폈다.


“가요. 신경 쓰지 말고. 어차피 예상했던 거잖아.”

귀국하자마자 기자들이 따라붙을지도 모른다는 건 예상한 바였다. 공항에는 언제나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고, 기자 중에 재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태서를 못 알아볼 리 없으니까.


“피곤하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운전, 내가 할까요?”

“아니. 운전하고 싶은 거라면 다음에. 오늘은 그냥 편히 쉬어요.”

공항으로 기사를 보내겠다는 장 실장을 만류한 것은 태서였다. 둘만의 여행으로 인한 설레는 기분을 좀 더 연장하고 싶은 마음이 역력한 그의 결정에 재인이 웃어 보였다.

태서 역시 재인처럼 빠듯한 일정과 오랜 비행으로 피곤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깊어 가는 감정에 물든 둘에게는 조금 더 둘만의 세상이 필요하다는 걸, 재인은 알고 있었다.


“집에 가면 한숨 잡시다.”

“비행기 안에서 자서 괜찮아요. 태서 씨 일하러 가 봐야 하잖아요. 곁에 있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럽니다.”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 끄덕인 재인이 가만히 그의 팔에 얼굴을 기댔다. 한겨울 바람이 쨍하니 코끝을 때렸지만, 그의 팔짱을 끼고 있는 지금, 더없이 든든했다.

그와 집에 가자마자 뭘 할지, 앰버에게 맡겨 두었던 고양이는 언제 데려올지를 얘기하며 태서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하던 재인이 멈칫했다.


“응?”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재인을 내려다보는 태서의 고개가 기울었다. 초조한 듯 뒤쪽을 돌아보는 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서가 팔을 들어 그녀를 제 품으로 가까이 끌어안았다.


“괜찮습니다.”

“응…….”

재인이 멈춰 선 것은 선득한 시선을 느낀 탓이었다. 기자라든가 경호원의 시선이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저를 노려보는 차갑고도 끈질긴 눈빛이 있었다. 저를 푹푹 찔러 대는 날 선 시선 때문에 오한이 들 지경이었다.


“불편하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태서 씨가 왜 미안해요. 난 괜찮아요. 그냥, 뭔가……. 기분 탓인가 봐요.”

“음…….”

집 밖으로 나가자마자 경호원이 붙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카고에서도 따라붙었던 경호원이 국내에서는 더 예의 주시할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재인은 이상하게 불쾌하게 여겨지는 시선에 몸을 떨었다.


“빨리 가요.”

재인은 제 어깨를 꼭 잡아당겨 안은 태서의 커다란 보폭에 맞춰 걸음을 빠르게 했다.

그리고 잠시 뒤, 이륙하는 캐나다 밴쿠버행 비행기 안에 조유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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