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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우리에게 시간은 많으니까 (88/123)


#88. 우리에게 시간은 많으니까
2023.05.02.


잠에서 깬 태서가 슬쩍 고개 들었다. 품에 안고 있던 재인을 베개에 눕히는 손길이 마냥 조심스러웠다.


“응…….”

재인은 순순히 태서에게서 떨어져 돌아누웠다. 저를 감싸고 있던 온기가 사라지는 게 아쉬웠는지, 재인은 또다시 웅크리고 잠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서가 그녀의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었다.

시차에 적응할 새도 없이 종일토록 시카고 강풍에 떨며 고단했을 재인은 초저녁부터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야경이 멋있기로 유명한 호텔이었지만, 일어선 태서는 빛 하나 들지 않도록 커튼을 단속했다.

재인의 단잠을 방해하는 것 하나 없도록 살핀 후 침실을 나선 태서는 차가운 물을 마시며 나른함을 떨쳐 냈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후 통화 목록을 내려 통화를 시도한 그의 고개가 기울었다.


“……안 받아?”

잘 때 빼고는 무선 이어폰을 귀에 낀 채 생활하는 테드는 늘 신호음이 세 번 지나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전화를 안 받는다. 더군다나 지금 한국은 겨우 점심시간이 지났을 시각이다. 테드가 자거나 씻고 있을 때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두 번 더 통화를 시도한 태서가 결국 앰버에게 전화했다.


―네가 해 놓으란 거 하느라 바쁜데 왜 전화야? 재촉하지 마. 하고 있어. 하고 있다고.

{얼마나 했는데?}

―그런 거 묻지 마.

{테드는 왜 전화 안 받아?}

―……테드가 전화를 안 받아?

{응.}

잠깐의 침묵 후, 앰버는 다짜고짜 성질을 부렸다.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진짜 모르는 거 맞아?}

―사람이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있지! 테드가 전화 안 받는데 왜 나를 괴롭혀?

{내가 언제 너를 괴롭혔어?}

―네가 이렇게 전화해서 일은 얼마나 했냐고 묻는 게 괴롭히는 거야. 태서, 앞으로 할 말 있으면 재인 통해서 해!

냅다 끊긴 전화에 아랑곳하지 않은 태서가 다시 통화 목록을 살폈다.


―네, 본부장님.

“뭐라고 합니까?”

―여전히 요구 조건은 없다는 입장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필요 없는 자료라면 검찰 측에 바로 넘기겠다고 합니다. 오늘 안으로 답을 달라고 하는 걸 보니 조대훈 회장이 검찰청에서 나오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으려는 것 같습니다.

장 실장은 현재 태서를 대신해서 조대훈의 측근인 김 실장과 접촉 중이었다. 태서는 시카고에 오기 전, 이미 김 실장에 관해 보고받고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

‘조대훈의 개’라고 불리는 김 실장의 충성심은 유명했다. 그래서 그의 변절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본부장님, 저는 김 실장의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검찰 측에 바로 넘기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것도 나쁠 건 없다. 하지만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김 실장이 넘기려 하는 자료 중 일부는 검찰 측에 넘기고, 일부는 조대훈 일가를 압박하는 데 이용하면 더 좋을 것이었다.


―이것도 함정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김 실장이 조대훈 회장을 배신한 것도 그렇지만, 그 전에 조대훈 회장이 김 실장에게 모든 걸 맡겼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요.

“그럴 겁니다.”

―사실, 비서계에서는 좀 유명합니다. 조대훈 회장이 사람을 잘 못 믿어서 김 실장을 제외한 다른 비서진을 자주 교체해서요.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태서가 고개 들었다. 거실 창 너머 반짝이는 존 핸콕 타워의 불빛을 응시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조대훈 회장은 김 실장을 믿은 게 아닐 겁니다.”

―그러면…….

“돈을 믿은 거겠죠.”

조대훈은 무엇보다도 돈과 명예를 좇던 인간이었다. 그런 대훈을 30년 가까이 곁에서 보필한 김 실장은 자연스럽게 막대한 비자금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태서가 알아본바, 조대훈과 김 실장은 어느 순간부터 상사와 부하 직원의 사이를 넘어서 있었다.

어마어마한 비자금을 조성하고 해외로 빼돌리는 것을 지시한 이는 조대훈이었지만, 그 모든 일을 직접 실행한 사람은 김 실장이었다.

김 실장은 조대훈이 매달 그의 통장에 꽂아 주는 적지 않은 돈 따위는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큰돈을 매일 만지고 관리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대훈으로부터 돈세탁과 횡령의 권한을 넘겨받고, 나중에는 주도적으로 진행하기도 했을 것이다.

조대훈은 그것을 달갑게 여겼을지 모른다. 김 실장의 탐욕이 점점 커지는 상황을, 그래서 조대훈의 돈을 마치 제 돈처럼 관리하며 욕심내는 상황을 바라 왔을 것이다.


“비자금이나 횡령 관련해서 세무 조사가 들어갈 건 뻔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모아 둔 돈의 일부는 묶이고 일부는 벌금과 세금으로 다 토해 내게 될 텐데, 그건 김 실장의 입장에서도 아까울 테니.”

―아…….

“차라리 그 돈을 욕심내고 지킬 거라고 생각한 거겠죠.”

―그런데 왜 저희 쪽에 연락해 온 걸까요?

“어쩌면, 조대훈보다 김 실장이라는 사람이 더 무서운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돈에 대한 욕심보다 인간에 대한 원한이 크고 깊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 생각입니다.”

조대훈의 개로 살면서 별꼴 다 겪었으리라. 김 실장이 조대훈 회장을 배신한 상황이 갑작스러운 것인지, 예정되어 있던 것인지 태서는 알지 못했다.

진짜 배신하려는 것인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마당에 자세한 속내까지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다만 태서는 제게 연락해 온 김 실장에게서 익숙한 감정을 느꼈다.

미움. 저를 외면하는 친모와 친부에게서 항상 느껴지던 감정이었다. 오랜 세월 그 감정에 노출되어 있던 태서는 누가 누구를 미워하는 것인지, 그것만큼은 유독 잘 짚어 냈다.


“그렇게 미워할 거면 차라리 그냥 버리지.”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시카고에서 돌아가는 대로 김 실장 만나 보겠습니다. 그렇게 전해 주시고 약속 잡아 주세요.”

장 실장과의 통화를 끝낸 태서가 피식 웃으며 물 한 모금을 더 넘겼다. 제 부모를 떠올리며 시린 눈빛으로 겨울 찬 바람에 밝게 빛나는 마천루를 바라보던 그가 몸을 돌렸다.

아직 비행 시각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 그에게는 따뜻한 온기가 필요했다.

다시 재인에게 돌아가면 그녀가 팔 벌려 안아 줄 것이다. 그러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윤재인의 향기를 맡으며 행복하게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재인을 향하는 태서의 기대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의심 따위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 * *



“즐거웠어요.”

“음…….”

“표정이 왜 그래요? 태서 씨는 우리 첫 여행이 안 즐거웠어요?”

“즐거웠습니다. 너무 짧아서 아쉬울 뿐이지. 미안해요.”

“태서 씨가 뭐가 미안해요. 다음에는 우리 길게 여행해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재인이 싱긋 웃으며 벨트를 채웠다. 사실, 여행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우스웠다.

고작 사흘 동안의 일정에 호텔에 머문 건 겨우 다섯 시간이었다. 비행기와 공항에서 보낸 시간이 24시간을 넘겼으니, 고된 일정이었다.

공항에서 은행으로, 은행에서 카페로, 카페에서 다시 추모 공원으로, 그리고 호텔로. 빠듯하게 이어진 발길에 재인은 엄마를 만나 우느라 부은 눈으로 잠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금 전 새벽, 제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미소 지으며 깨어났다.

늘 남자가 먼저 일어나 말간 얼굴로 저를 깨우곤 했다. 그러니 이렇게 곤히 잠든 남자의 얼굴을 보는 건 흔치 않은 기회였다.

재인은 남자의 곧게 뻗은 콧대를, 짙은 눈썹을, 매끄러운 뺨을 매만지다 사르륵,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 어루만지는데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남자에게 재인은 남자가 저를 깨우던 것을 떠올리며 똑같이 보답해 주었다.


“으응…….”


“일어나요. 우리 비행기 타러 가야 해요.”

 
손 대신 긴 머리칼로 사락사락, 남자를 간질이고 웃음을 터뜨리는 남자의 얼굴 곳곳에 입 맞췄다.

그렇게 웃으며 장난치는 사이 재인은 남자의 품에 갇혀 그를 올려다보게 되고 말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진득한 눈빛이 달아 재인이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안 돼.”


“돼.”


“안 된다니까? 시간이…….”


“돼.”

 
결국 남자에게 붙들렸다. 그 덕에 샤워 타임 십 분이 삼십 분으로 늘어났다. 그마저도 남자가 배려해 준 탓이었다.

그걸 배려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진이 빠진 재인을 놓아주면서 태서가 봐준다는 듯 웃었으니 그의 딴에는 배려였을 것이다.

온종일 담백하게 굴던 남자가 순식간에 뜨거워지고 집요해지는 것은 아직도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윤재인 한정이라는 것을 재인은 알고 있었기에 은근히 기분 좋은 일이기도 했다.

추모 공원에서 태서는 재인의 엄마 사진을 향해 꾸벅, 인사한 뒤로는 말을 아꼈다. 그저 재인의 손을 감싸 꼭 쥔 채 반듯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재인이 나서서 그가 잡은 제 손을 들어 보였다. 엄마의 사진 앞에 그와 제 손을 흔들어 보이며 좋은 사람을 만났음을 엄마에게 알렸다.

이제는 외롭지 않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 딸은 혼자가 아니라고, 엄마 딸을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많다고 마음속으로 엄마에게 하고픈 말을 전했다.


“나, 엄마 많이 닮았죠?”


“엄마가 무척이나 미인이시던데.”


“누가 더 예뻐요?”


“음…….”

 
추모 공원에서 나오는 길, 뭐라고 대답해도 함정일 수 있는 질문에 난감해하는 태서를 보며 재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태서 씨.”

“응.”

“우리에게 시간은 많으니까. 두 번째 여행은 더 즐거울 거예요.”

바쁜 일정을 쪼개어 시카고까지 온 것은 사실 주식 때문이었다. 재인의 엄마가 은행에 남긴 주식을 확인하고 가지러 온 것이다. 하지만 재인도, 태서도 둘 다 이번 시카고행을 여행이라고 말했다.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아까 잠에서 깼을 때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재인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제 말을 기다리는 태서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강태서의 밤을, 새벽을, 아침을, 낮을, 저녁을 지켜보게 되었구나. 우리가 함께하게 되었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

“이제 강태서의 겨울은 알겠으니까, 봄, 여름, 가을도 궁금해져요.”

모든 계절의 강태서를 알아 가고 싶다는 고백 앞에 태서는 말이 없었다.


“그러고 나면 내년의 강태서도, 그다음 해의 강태서도 궁금해질 것 같아요.”

“…….”

“표정이 왜 또 그래요?”

마치 아이처럼, 웃는 것도 우는 것도 같은 표정의 남자를 두고 재인은 환하게 웃었다. 그의 앞에서 솔직해지는 자신이 좋았다. 지금처럼 이 남자를 행복하게 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 앞에서 저를 더 빛나게 해 준 사람, 엄마에게 자랑할 수 있는 사람.

고마운 마음을 가득 담아 재인이 태서의 뺨을 매만지자 이륙 중인 비행기의 벨트 시그널을 확인한 태서가 촉촉해진 눈을 살풋 찡그렸다.


“지금 안전벨트 풀면 안 돼요.”

어쩔 수 없이 재인의 어깨에 얌전히 고개를 기울인 남자가 쿡쿡,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 깊숙하게 코를 문질렀다. 자연스럽게 제 몸에 감겨드는 그를 느끼며 재인이 눈 감았다.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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