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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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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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2023.04.28.
지켜보던 사람들이 테드의 말을 알아듣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게 꽂히는 테드의 원망 어린 시선에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화는 입만 벙끗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멍하니 선 상화를 내려다보던 테드가 손을 들어 굵은 눈물을 훔쳐 냈다. 그러고는 번역기를 돌려 연습했을 게 확실한 말을 더듬거리며 내뱉기 시작했다.
“누나, 나를 먹고 버렸습니까? 당신은 성적 욘, 욘만……”
“……욕망?”
“용망으로! 당신은 성적 용망으로 가득 차서! 나를, 하루, 하루, 뺌……?”
“하룻밤……?”
“하루빰! 하루빰 노리로 생강했……, 생강, 캤니?”
“……생강을 캐?”
누가 보면 순진한 외국인 노동자 꼬셔서 하룻밤 놀다 버린 줄 알겠다. 상화는 문득 저를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실제로 지금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뤼다고 놀리지 마라요! 어……, 소주……? 소주 벗어! 말도 못 타……?”
“……돌겠네.”
저 오래된 노래 가사는 또 어디서 배운 것일까. 점점 산으로 가는 테드의 말에 상화가 마른세수하고 있을 때였다.
“누나, 왜 안 바다, 전화? 내가 그러케, 조……,”
“조……?”
“조팝……?”
“야!”
듣다 못한 상화가 달려들어 테드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테드가 얼씨구나, 하고 제게 달려든 상화를 꽉 끌어안았다.
“너, 너! 그 말은 어디서 배웠어? 후! 후 티치 유 코리안! 후!”
“Ah! Amber!”
상화가 하, 하고 짧게 헛웃음을 짓는데 순간 테드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누나.”
“……왜.”
“나 가지고 노랏써? Really?”
“노! 아니거든? ……너 그리고 말 다시 배워. Study Korean again!”
“Okay, you teach me then.”
“뭐래. 나 바빠. 암 쏘 비지!”
“You taught me how to kiss, you taught me how to se…….”
“우와아아아아아악!”
남사스러운 말이 이어지기 전에 상화가 소리 지르며 고개를 젓자 테드가 번쩍, 그녀를 안아 들었다.
“어……?”
테드의 키가 태서보다 큰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서에 비하면 조금 마른 편이어서 이렇게나 힘이 셀 줄은 몰랐다. 테드는 키 175cm의 상화를 그야말로 번쩍, 안아 올린 것이다.
“So, you have to teach me how to be a good man.”
“…….”
“나, 버리지 마. 키워 조.”
“…….”
“내가 자랄게. 잘, 할게……? 잘할게!”
자라겠다는 건지, 잘하겠다는 건지. 앰버가 필살기라며 가르쳤을 게 분명한 한국말을 무사히 해낸 테드가 상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헤죽, 웃었다. 그 모습이 마냥 뿌듯해 보여 상화도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누나, 나 한국말 잘해써?”
“…….”
대형견처럼 제 목덜미에 파고드는 테드의 부드러운 금발을 손가락 사이에 쥐며 상화는 눈을 감았다. 어쩐지 삐이, 이명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어지러움을 느낀 상황에 절로 탄식이 샜다.
테드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날 새벽에 사라진 테드에게 제가 오해한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해야 할 얘기가 많은 듯했다.
확실한 건, 서상화는 오늘부로 애를 키우게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 * *
“태서 씨…….”
은행 앞에서 기다리던 태서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나온 재인에게 성큼성큼, 빠르게 걸었다.
망설임 없이 가까이 가던 그는 열 걸음쯤 앞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듯, 그렁그렁한 한 재인의 눈을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엄마가……. 엄마가요.”
“…….”
“엄마가…….”
말을 다 잇지 못하는 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서가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입술을 꼭 깨문 재인이 주저하지 않고 그의 품으로 달려와 안겼다.
“흐, 엄마가…….”
“응.”
태서는 이윽고 울음을 터뜨리는 재인의 작은 몸을 으스러질 듯 안았다. 떨리는 어깨와 등을 도닥이며 쓸어내리는 손길은 다정했다.
태서는 재인을 꼭 안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흐리던 하늘에서 펄펄,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행여 그 눈송이마저 무거울까 봐, 재인을 품는 그의 손에 힘이 실렸다.
* * *
“엄마가 갑자기 쓰러지고, 제대로 된 대화 한번 나누지 못했어요.”
빨개진 코를 훌쩍이는 재인은 핫 초콜릿이 담긴 머그를 쥔 채였다.
“저런 돈이, 주식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한국에 가지 않았을 거예요. 어떻게든 처분해서 엄마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좋은 병원에 모셨을 거예요. 엄마는 왜 저 돈을 쓰지 않았던 걸까요.”
재인은 맞은편에서 손을 뻗는 태서에게 가만히 눈을 감고 뺨을 내어 주었다.
부은 눈가를 쓸 듯 매만지는 손이 상냥하고 따뜻했다. 말없이 그녀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이 주는 편안함에 재인은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주식 양수 증서와 함께 나온 것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돈이 담긴 계좌 번호였다. 엄마 윤세나는 재인에게 편지도 남겨 놓았다.
<재인아, 너의 할아버지께서 널 무척 보고 싶어 하셨어. 네가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너를 만나는 걸 기대하셨어.
그런데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우리 재인이가 얼마나 예쁜지 보지 못하셨어. 이건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너에게 주는 귀한 선물이야. 그러니까 이 돈은 모두 재인이 네가 쓰고 싶은 곳에 쓰면 좋겠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엄마의 편지는 이미 몇 번이나 읽은 후였다. 모르고 있던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감상은 남달랐다.
이미 돌아가셨다고는 해도, 세상에 엄마와 저밖에 없다고 여겼던 그녀의 어린 시절을 따스한 마음으로 기다렸을 누군가가 있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곤히 잠든 네 뺨에 몇 번이나 입 맞추다 쓰는 편지야. 우리 재인이, 치카치카 제대로 한 거 맞아? 아직도 재인이한테서 레몬 마들렌 냄새가 폴폴 나는데? 레몬 마들렌이 그렇게나 좋을까. 으이그.>
어릴 적, 재인은 엄마가 만들어 주는 레몬 마들렌을 좋아했다. 엄마와 함께 녹인 버터에 설탕을 넣어 휘젓던 그녀가 엄마의 비법을 고스란히 배워 만들게 된 것은 당연했다.
<이 돈을 찾으러 온 우리 재인이는 어떤 표정일까. 혼자일까? 좋은 사람과 함께일까?
이 돈을 찾은 뒤 엄마에게 뭐라고 말해 줄까? 우리 딸 성인이 되면 짠, 하고 줘야지. 어른이 된 너를 상상하며 이벤트를 준비하는 엄마는 지금 무척이나 설레.>
엄마의 설렘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편지를 떠올린 재인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흐르기도 전에 눈물을 닦아 거두는 남자의 손에서는 요즘 재인이 제일 좋아하는 향기가 났다.
“돈은 전부 기부할래요.”
“응.”
“그래도 될까요?”
“당연히 됩니다.”
“돈이 필요한 거 아니었어요?”
“저 주식이면 다 해결될 것 같습니다.”
사라진 현양 건설 주식 5.8 퍼센트의 주인이 재인인 이상, 태서의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었다. 재인은 제 뜻을 존중해 주는 태서를 향해 옅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멉니까?”
“응?”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으니까.”
“아, 그때 말했던 핏제리아요? 아뇨,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아요.”
“아니, 윤재인 씨 어머니 계신 곳.”
“…….”
“재인 씨, 엄마 보고 싶잖아요.”
순간 시큰해져 오는 미간을 들켰나 보다. 뺨을 감싸고 있던 커다란 손이 재인의 미간을 꾹꾹 눌러 문질렀다.
“우리 엄마, 만나 줄 거예요?”
“어머니께 날 소개해 준다면, 내가 영광입니다.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이 날씨에도 코트 입고 왔는데요.”
인제 보니, 재인에게는 거의 발끝까지 내려오는 패딩을 입게 한 남자는 멋들어진 코트를 입은 채였다. 시카고의 한겨울 추위가 얼마나 매서운지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가요.”
“아, 떨리는데.”
“거짓말.”
“진짭니다. 지금 긴장되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재인이 일어섰다. 엄살 피우는 남자의 손을 잡아 이끌고 카페 입구로 향했다. 음료가 담긴 잔을 정리한 태서가 다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응……?”
“손 계속 잡아 줘요.”
태서의 부탁에 저를 향해 뻗은 커다란 손을 내려다본 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을 잡고 카페를 나서는 재인의 입가에 어느새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대훈이 피식 웃으며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결국 아내 지승희 역시 오늘 아침에 검찰청 포토 라인에 섰다. 평소처럼 단장했을 게 분명한데도, 마음고생으로 인해 며칠 새 확 늙은 몰골은 가려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우스웠다. 정신없을 게 분명한 상황에도 헤어와 메이크업은 챙긴 그녀의 성격은 타고난 것이었다. 나이 환갑이 다 되도록 공주처럼 살던 여자가 저렇게 되는 날이 오다니.
그래도 한집에 살았다. 한때는 한 침대를 공유하던 사이였다. 대훈은 지승희가 조금 딱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고집부려 봤자, 일만 어렵게 될 뿐입니다.”
“자네, 나이가 몇이라고?”
“관계없는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강태서겠지? 검찰 쪽에 나에 관한 강도 높은 수사를 요청한 사람.”
수척해진 얼굴을 들어 제 담당 검사를 노려보는 대훈의 눈에는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다는 의지가 실려 있었다.
“인정하시죠.”
제 질문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무시하는 젊은 검사를 향해 조대훈이 조소했다.
“강태서가 맞나 보군.”
“……검찰은 누구 한 사람의 부탁이나 요구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 계신 건 비리와 횡령, 배임, 청탁, 뇌물 수수 및 부실 공사 지시 혐의에 관해서 조사받기 위해서입니다.”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나왔는지. 그동안 검찰 쪽에 먹인 돈이 얼만데, 이놈은 저와는 하등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자택 압수 수색 영장 심사 결과, 내일이면 나올 겁니다.”
강강한 기질을 대변하듯, 짧게 자른 머리를 한 검사는 웃음이라고는 전혀 묻어 나오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대훈은 느긋했다. 이미 김 실장에게 비상시에는 집안 금고에 있는 것들을 외부로 싹 치우라고 지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쯤 금고 안에는 약간의 달러만 들어 있을 것이다. 제가 저지른 일의 모든 증거가 담긴 자료들은 김 실장이 안전한 곳에 옮겨 놓았을 거다.
지승희가 낳은 딸의 친부가 김 실장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식이 대수인가. 매달 적지 않은 돈을 누가 주는데.
“자잘한 것들은 인정하지만, 그건 다 회사 꾸려 나가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건 누구나가 알 거고.”
“…….”
“털어도 나올 게 없을 텐데. 헛수고하는군.”
대훈은 제게 없는 부성애를, 김 실장이라고 해서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한때 사랑하는 여자에게 이용당한 뒤 부려지고, 딸아이에게 은근히 무시받아 왔을 김 실장에 대해 대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승희에게 제 존재를 부정당한 뒤 단 한 번도 제 앞에서 애틋한 눈으로 지승희를, 그리고 조유리를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저를 기만한 죄를 묻지 않았다.
이용당하고 버려진 채, 제게 죄책감 가진 인간을 충성도 높은 개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훈은 밖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개를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