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드라마보다도 더한 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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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드라마보다도 더한 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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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드라마보다도 더한 막장
2023.04.25.
“하…….”
다시 생각해도 우스워서 입술 새로 실소가 샜다. 그러자 제 손을 힘주어 잡아 오는 크고 따스한 손에 재인이 고개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부드럽게 미소 짓는 태서가 있었다. 재인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속삭였다.
“조대훈이 손을 쓴 걸 거예요. 어떻게든 태서 씨한테 흠집을 내려고.”
새벽 사이, 재인과 태서에 관한 소문이 SNS와 메신저 앱을 타고 번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소문이 다 그렇듯, 자극적이고 추했으며 이름과는 상관없는 이니셜로 지칭했어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특정되어 있었다.
< A 건설사 본부장이자 A그룹의 차기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B 씨는 베일에 가려진 인물. 그런데 최근 대놓고 연애 중인 상대 C 씨가 알고 보니 전 약혼녀의 이복 언니라고.
B 씨 측에서는 약혼한 적이 없다지만, 전 약혼녀인 D 씨는 오랜 세월 B 씨의 약혼녀라고 말하고 다녀서 재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정도.
드라마보다도 더한 막장에 항간에서는 B 씨가 부도 위기를 겪고 있는 D 씨의 집안을 쓸모없다고 여겨 약혼을 깬 거라고 수군거리는 중. >
요약한 것만 놓고 보면 마지막 문장을 빼놓고 크게 틀린 부분은 없었다. 하지만 요약하지 않은 전체를 보면 기가 찼다.
B라고 지칭한 태서는 자매를 번갈아 만나는 농락을 일삼는 쓰레기였고, C라 일컬어진 재인은 남자란 남자는 다 후리고 다니다 못해 이복동생의 약혼남을 몸으로 유혹한 요부였다.
악의 가득한 소문을 접한 사람들 대부분이 도덕적으로 비틀린 연애를 하는 B와 C를 욕했고, D라고 지목된 조유리를 딱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녀의 본성을 겪었거나 들어 아는 일부 사람들은 불쌍하다기보다는 고소하다는 반응이었다.
시카고로 향하는 비행기에 타기 전, 상화가 이를 확인하고 재인에게 전화한 것이었다. 앰버 역시 기가 막혀 분개하는 중이었고, 장 실장은 보고 후 소문의 진원을 찾는 중이었다.
“검찰 조사 중이라 쉽지 않았을 겁니다.”
“충견처럼 뭐든 다 하는 측근이 있어요. 김 실장이라고.”
“그 사람 존재는 알고 있습니다만, 그 사람은 아닐 겁니다.”
아닐 거라고 말하는 태서의 표정이 묘하게 확신에 차 있어서 재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충견이라기엔, 주인을 물어뜯을 준비를 오랫동안 해 왔더라고.”
“네……?”
“어젯밤에 연락이 왔습니다.”
“연락이, 왔다고요……? 뭐라던가요?”
“조건 없이 현양 총수 일가가 저지른 비리와 부정의 증거를 넘기겠다던데.”
재인이 놀란 눈을 깜빡였다. 몸을 크게 일으켜 그녀의 뒤로 손을 뻗은 태서가 재인이 앉은 좌석 쪽의 슬라이드 문을 닫아 옆 좌석 쪽에서 쨍하게 들어오는 햇빛을 가렸다.
그러느라 훅, 가까워진 남자는 제 볼일을 마치고도 재인의 귓가에 둔 입술을 옮기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진짜 해 봅시다.”
“……뭘요?”
“요란한 연애. 나 윤재인이랑 그거 하고 싶다고 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은근하게 속삭이는 남자의 유혹에 넘어갈 뻔한 재인의 시선이 뾰족해졌다.
“……말 돌리지 말구요. 나는 김 실장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어떤 면에서는 조대훈보다도 더 냉정한 인간이에요. 믿을 수 없어요.”
“그래서 아직 확답하지 않았습니다. 여행 끝나고 천천히 생각해 봐도 될 일이어서.”
“조대훈이 아니라면, 어쩌면 정재훈이 그랬는지도 몰라요. 태서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하지만, 정재훈이 이렇게까지 가만히 있을 인간이……. 그쪽 문은 왜 닫아요?”
긴 비행에 나선 태서는 당연하다는 듯 재인과 함께 1등석에 올라탔다. 비행기 한가운데 마련된 2인석은 어지간한 침대만큼이나 넓었고, 그 양옆으로 1인석이 있어 한 줄에 총 네 개의 좌석이 있는 구조였다.
태서는 지금 햇빛을 가리겠다며 재인 쪽의 슬라이드 문을 닫고, 이어 햇빛과는 전혀 상관없는 제 쪽의 슬라이드 문마저 닫아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방을 만든 것이었다.
승무원이 볼 수는 있겠지만, 굳이 슬라이드 문을 닫아 놓은 좌석을 자세히 살피지는 않을 터. 재인은 야릇하게 웃는 남자가 좌석을 눕히고 편안히 기대어 눕는 것을 보며 몸을 뒤로 물렸다.
“안 잡아먹습니다. 공공장소에서 그러고 싶지는 않으니.”
“……언제는 또 밖이라고는 못 할 줄 아냐고 그랬잖아요.”
“나도 선은 지킵니다. 그리고, 그런 윤재인은 나만 보고 들을 거라서.”
‘그런 윤재인’이 어떤 윤재인인지, 재인은 묻지 않았다. 속뜻을 알면 누구나 깜짝 놀랄 만한 말을 내뱉고도 태연하게 웃는 남자를 향해 눈을 흘기며 붉어진 얼굴을 감쌀 뿐이었다.
“이리 와요.”
“……그리 오라구요?”
“피곤해 보이는데, 재워 줄게요.”
“……피곤한 게 누구 때문인데. 혼자 잘 수 있어요.”
“내가 혼자 못 자서 그럽니다.”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며 두 팔 벌린 남자를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던 재인이 결국 몸을 일으켰다. 너른 좌석 두고 굳이 1인석에 몸을 끼워 넣은 그녀가 익숙한 듯 태서의 품에 제 몸을 묻었다.
정수리에 가벼이 입 맞추고 싱긋 웃은 태서가 팔에 힘을 줘 재인을 바짝 끌어안았다. 자리가 좁다는 핑계로 빈틈없이 재인을 안아 제 몸에 겹치고는 만족의 한숨을 흘렸다.
“우리 첫 여행인데, 다른 남자 생각은 그만해요. 질투 납니다.”
“다른 남자가 아니라……!”
“김 실장도, 조대훈도, 정재훈도 다 남잔데?”
“……태서 씨 가끔 되게 억지 부리는 거, 본인도 알죠?”
불리한 상황에 대답하지 않고 웃음으로 넘긴 태서가 보듬듯 재인의 뺨을 감싸 쓰다듬었다.
“재인.”
“응.”
말간 눈을 들자 이마에 그의 매끈한 턱이 스쳤다. 재인이 스스럼없이 그를 바라보자 태서의 눈매가 사르륵, 예쁘게 접혔다.
“나랑 요란하게 연애해 줄 겁니까?”
“……정말 그러고 싶어요?”
“저딴 식으로 뒤에서 떠들어 댈 필요 없도록, 온 세상이 다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누구랑 연애하는지.”
“하지만 그러면 태서 씨는…….”
추문 없는 재벌 3세가 몇이나 될까마는, 이 남자만큼은 근거 없는 추문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랐다. 더욱이 그게 저 때문이라면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재인은 전부 다 거짓이라고는 할 수 없는 소문이 난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이 와중에 태서가 저와의 연애를 공식적으로 밝히게 된다면 그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비난받게 될 것이 뻔했다.
“나는……?”
“태서 씨는, 나쁜 남자가 되는 거잖아요.”
“윤재인은 나쁜 남자를 거머쥔 치명적인 여자가 되는 거고.”
“…….”
“괜찮은데?”
정말 괜찮다는 듯이 씩, 웃어 보이는 남자를 보니 허탈하게도 재인의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나 원래 나쁜 남잡니다.”
“태서 씨가요……?”
“윤재인에게만 다정해서 그렇지. 앰버랑 테드가 틈만 나면 내 욕 하는 거 봤잖아요.”
“…….”
“딱, 윤재인 이상형이네.”
나에게만 나쁜 남자가 좋다던 재인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태서 때문에 재인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시카고로 향하는 비행기 안, 어느새 머리 아픈 상황을 잊은 재인이었다.
* * *
“누나! 잠칸, 잠칸만.”
근처 식당에서 점심 먹은 상화는 요가원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테드와 맞닥뜨리고는 빠르게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테드는 그사이 어디서 배워 왔는지 어눌한 한국말을 구사하며 상화의 뒤를 쫓았다.
“누나!”
키가 훌쩍 큰 외국인이 어설픈 발음으로 몇 번이나 누나를 불러 대니 흘끔거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요가원 앞에 선 상화가 더는 안 되겠다는 듯 뒤돌아섰다.
“그래, 내가 네 누나다!”
“누나…….”
“얘가 왜 이래. 왜 이렇게 절절하게 누나를 불러?”
“누나, we have to talk about it. Don’t walk away from me!”
“내가 언제 너를 피했다고……? 나는 그냥 내 갈 길 가는 거거든?”
상화가 허리에 두 손을 짚은 채 미간을 구겼다. 결 좋은 금발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긴 테드가 짙은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So sorry about…….”
“미안하다고 하기만 해 봐.”
상화는 테드가 그날 밤의 일에 대해 사과하려는 거라고 생각하고 서둘러 테드의 말을 끊어 냈다.
전화를 안 받는다는 건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인데, 그걸 모를 리 없을 거다. 그런데도 굳이 찾아와 사과하고 관계를 확실히 하려는 테드를 보고 있으니 자존심이 상했다.
뻗어 버린 날 호텔에 그냥 두고 새벽녘에 혼자 도망간 주제에. 그럴 거면 세상 다정하게 씻기기는 왜 씻겨 놨어?
새치름한 눈을 든 상화가 테드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서며 언성을 높였다.
“없던 일로 하자는 거잖아! 야, 나도 그럴 생각이거든? 너만 쿨한 줄 알아? 나도 쿨하거든?”
없던 일로 하려는 건 상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상화가 술에 취해 있기는 했어도, 기억은 멀쩡했다. 그 밤은 두 사람의 합의하에 이뤄진 밤이었다.
“누나, Let’s come to the point, and get this over with.”
“……뭐라는 거야. 나는 네 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모르겠다구!”
강남 한복판에서 영어와 한국어로 싸우는 두 사람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많아졌지만 다혈질 상화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거울을 통해 저 새끼가 물고 빨아 놓은 흔적을 마주했다.
배 여사에게 들킬까 봐 요즘은 집에서도 얇은 목 티를 입곤 했다. 가슴 쪽이 조금 팬 상의라거나, 배와 팔다리를 드러내는 요가복은 꿈도 못 꿨다.
본의 아니게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고 목감기에 걸린 척하는 그녀에게 배 여사는 배 도라지 즙과 레몬 생강차를 끊임없이 들이밀었고, 그 결과 상화는 지금도 제 입에서 올라오는 배 도라지 향을 느낄 수 있었다.
빨리 요가원에 올라가서 이 수런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명상을 해야 할 텐데. 상화는 속도 모르고 귀찮게 따라붙는 테드가 야속했다.
쏘 프리티라더니. 제 몸 곳곳에 입 맞추면서 어썸, 스윗, 어도러블 어쩌고 온갖 미사여구를 ‘누나’ 앞에 다 가져다 붙일 땐 언제고.
그렇게 상화의 혼을 쏙 빼놓았던 테드는 새벽에 사라져서 그날 늦게까지 연락이 없었다. 뜻하는 바는 뻔했다.
“너 그렇게 간 거 볼일 끝이라는 거 아니었어? 야, 나도 너한테 볼일 없거든?”
“누나…….”
“누나고 나발이고, 내가 너랑 무슨 말을 더 해! 이렇게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니까? 너 내가 너보다 여덟 살 많다고 지금 내가 너한테 질척거릴까 봐 걱정하는 모양…….”
“누나, 나를 먹고 버렸습니까?”
쉴 틈 없이 쏘아붙이는 상화의 앞에 선 테드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채였다. 그런 테드의 입에서 나온 한국어에 상화가 제 귀를 의심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