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그래도 찾아보면
(85/123)
85. 그래도 찾아보면
(85/123)
#85. 그래도 찾아보면
2023.04.21.
“아…….”
액자 뒤편에서 나온 것은 시카고에 있는 대형 은행의 개인 금고 번호가 적힌 종이였다.
금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쓰여 있지 않아도, 재인은 엄마가 그 안에 자신과 관련된 중요한 것을 넣어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이나 엄마의 글씨를 새기듯 눈에 담던 재인이 천천히 액자와 앨범을 그러쥐었다. 품에 꼭 안고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고 있는데 밖에서 톡톡,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는 밤 산책을 끝내고 들어와 방에서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놀란 마음에 문밖으로 빼꼼, 눈만 내놓고 살피니 2층 정원으로 난 창 앞에 태서가 서 있었다.
경호원들을 통해 상화를 만나러 나갔던 그녀가 갑작스럽게 집으로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태서는 일하다 급히 왔는지 외투도 챙겨 입지 않은 채였다.
재인의 젖은 눈과 뺨을 확인한 태서의 얼굴에 걱정이 어리는 것을 본 재인이 일어섰다.
참았던 울음이 터지기 전에 앨범과 액자를 내려놓고 달려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전을 확인하듯 저를 안아 품에 보듬는 남자에게서는 찬 겨울바람 냄새가 났다.
“무슨 일입니까. 왜…….”
“엄마가, 엄마가…….”
더는 말을 잇지 못한 재인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울면서 재인은 엄마가 남긴 수많은 쪽지 중 하나를 떠올렸다.
<모두가 내 편 같지 않은 날도 있어. 그런데 재인아, 그래도 찾아보면 내 편은 있어.>
엄마, 상화, 그리고 강태서, 당신.
세상에 엄마가 없을 땐 상화가 있어 주었고, 이제는 태서가 제 곁에 있다. 태서로 인해 알게 된 새로운 사람들 역시 재인의 든든한 편이 되어 주었다.
애써 찾지 않아도, 이렇게 찾아와 두 팔을 벌려 주는 그에게 재인은 얼굴을 묻고 한참이나 울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운 끝에 마침내 입을 열었다.
“태서 씨. 나랑 여행 가요.”
“응……?”
“여행 가요.”
“지금?”
“최대한 빨리. 당장 오늘이라도.”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일이 바쁜 사람이니 갑자기 여행 가자는 제 제안이 말도 안 되는 투정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태서는 지금은 안 된다거나, 바쁘니 다음에 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수많은 말을 뒤로하고 어디에 가고 싶냐고 묻는 그에게 재인이 눈물을 매단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속삭였다.
“시카고에 갈래요.”
“…….”
“같이 가 줘요.”
목 놓아 울다가 뜬금없이 여행을 제안하는 재인에게 놀란 눈을 하고 있던 태서의 고개가 느리게 기울었다.
보는 사람이 다 아프도록 슬프게 울다가 이내 맑게 웃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 고요히 눈을 맞추고 있던 태서가 이내 재인을 따라 슬며시 웃었다.
같이 가자고 해 줘서 고맙다는 양 고개 끄덕이며 그녀를 다시 안아 다독이는 태서의 어깨 너머로 겨울 한낮의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 * *
“저기, 저기 나온다!”
“저 차에 탄 사람이 누군데요?”
“알 게 뭐예요, 저 집 드나들면 말 다 한 거지. 불안해서! 못 살겠다!”
“못 살겠다! 못 살겠다!”
조합원장과 동대표의 선창을 따라 광순이 한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현양 건설 회장의 집 앞에서 열리는 시위에 오늘부터 참여한 그녀는 추위도 잊고 열성적으로 목청을 높였다.
처음엔 시위 현장 근처에 즐비한 경찰이 무서워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경찰은 조금 과격한 양상을 보이는 하청 업체 노조의 시위를 눈여겨보는 모양이었다. 상대적으로 재개발 지역 조합원과 거주민들의 시위는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 딱히 제재하지는 않았다.
처음엔 어색해서 삐죽거리던 광순도 차차 적응해 갔다. 뜻을 모은 사람들과 함께 입을 모으다 보니 용기도 솟았다.
“현양 건설은! 이주 보상! 조속히! 이행해라!”
“이행해라! 이행해라!”
“이 비싼 땅에 이렇게 큰 집에 살면서, 설마 돈 없다고 배 째라고 그러는 건 아니겠죠?”
“그러면 쨉시다! 못 쨀 거 있나!”
“아무리 현양 건설이 망한다고 해도 우리는 끝까지 받아 낼 거 받아 내야죠!”
“방법이 있을까요? 회사 망하면 총수 일가도 다 망하는 거 아닐까요?”
“그래도 찾아보면 숨겨 둔 재산이 수두룩할 거예요. 우리 아들이 법원에서 일하는 거, 알죠?”
송 여사가 눈짓하자 광순이 슬쩍 고개를 비틀어 곁에 선 다른 이들에게 못마땅하다는 듯 속삭였다.
“저 여편네는 입만 열면 아들 자랑이네요. 너무 저러는 것도 좀 꼴 보기 싫지 않나요? 좀 격이 떨어진달까?”
“그러게나 말이에요. 듣자니 공무원 시험 겨우 붙었다던데, 법원 어느 구석에서 일하는지 알 게 뭐예요?”
“누군 뭐 잘난 아들 없는 줄 아나. 남 여사님, 이참에 치과 원장님 아들 자랑 좀 해 보세요!”
“어, 그런데 그제 지나가다 보니까 거기 치과 간판이 바뀌…….”
“자, 자! 힘껏 외칩시다!”
원장에서 부원장으로 바뀐 아들 얘기가 나오자 시위를 독려하는 광순의 목소리가 커졌다. 시위에 나온 지 하루 만에 자연스럽게 입이 거칠어진 그녀였다.
강경하고 극렬한 성격의 몇몇 주민들로 구성된 시위대는 인원이 적은 만큼, 전문적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광순의 또래였고,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품위 지키며 살아온 자신을 길거리로 내몬 현양 건설을 욕하다 어느새 무심한 남편 욕, 아들 훔쳐 간 며느리 욕을 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결혼도 안 하고 아이 안 낳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들어 대는 젊은 세대도 욕했다.
점점 시위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외침이 많아졌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절로 목소리가 커졌다.
석동이 저지른 일 때문에 싸매고 있던 흰 끈 대신 투쟁을 뜻하는 붉은 끈을 이마에 두른 광순은 끓어오르는 흥분에 심취해 있었다.
“우리를 계속 무시하는데, 차를 막아 세웁시다!”
“……그래도 돼요?”
“설마 사람 치고 가기야 하겠어요?”
“아이, 그래두…….”
멀어져 가는 새카만 세단을 보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배짱을 부린 광순이 흥, 하고 코웃음 쳤다.
“치고 가기만 가 봐. 합의 안 해 줄 테니까.”
“남 여사님은 말씀을 참 재미있게 하셔!”
“여사님들! 여기 커피, 커피 드시고 하세요!”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싸구려 커피로 꽁꽁 언 몸을 달래며 광순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미가 이렇게 추운 곳에서 고생하는 건 다 자식 앞날을 위해서인데, 자식 놈은 요 며칠 새벽에 나가 밤늦게 들어오곤 했다.
그 꼴도 보기 싫어 내다보지도 않았는데, 오늘 새벽에는 평소보다도 더 오랫동안 거울 앞에 붙어 있는 뒷모습을 보고 빽, 소리를 내질렀었다.
“거울 앞에서 하루를 다 보낼 생각인 거야? 도대체 뭘 하는 거야!”
“어, 엄마! 깼어?”
놀라 잔뜩 경직된 어깨 너머로 흘끔 제 어미의 눈치를 보던 석동은 끝내 광순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인사한 후 부리나케 출근했다.
그 모습이 뭔가 평소랑은 조금 달라 보이기도 했다. 어딘가 머리카락이 붕 떠 있는 것도 같고, 뭔가 조금 부은 것도 같았다. 비유하자면 평소에 마른 표고버섯 밑동 같던 아들 머리가 물에 불린 표고버섯 밑동 같았달까.
생각해 보니 아들 얼굴 제대로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보고 있으면 화딱지가 나서 광순이 안 본 것도 있지만, 근래에는 뒷모습만 본 것 같다. 어쩐지 아들이 저를 피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뭔 일을 저지른 건 아니겠지……?”
“예? 뭐가요?”
“아니, 아니에요!”
“자, 다시 힘내십시다! 현양 건설! 사과하라!”
“사과하라! 사과하라!”
“약속 모두! 이행하라!”
“이행하라! 이행하라!”
행동하는 선구자. 광순이 새롭게 속한 모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 방구석에서 고상 떨며 늙어만 갈 것이 아니라, 철없는 다음 세대를 위해 직접 나서서 쟁취해 내야 한다고 했다.
그런 그들이 직접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파트 재건축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는 나설 일이 없을 거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료들과 함께 목이 터져라, 외치는 광순은 어느새 불안감을 잊은 채였다.
* * *
공항 라운지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초콜릿 하나를 입에 넣던 재인이 힘 빠지게 웃는 소리에 고개 들었다. 태서가 모바일 탑승권을 바라보며 피식거리고 있었다.
“왜 그래요?”
“예전에 시카고에 갔을 때 다짐한 게 있었습니다.”
“뭔데요?”
“내가 또다시 한겨울에 시카고에 가면, 성을 갈겠다고.”
진심이 담뿍 느껴지는 태서의 말에 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출장 때문에, 그리고 또 이렇게. 이번 겨울에만 두 번째네요.”
“그래서, 싫어요?”
“그럴 리가.”
재인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이자, 고향인 시카고에 함께 가는 게 싫으냐며 입술 빼죽거리려 했다. 하지만 태서는 그럴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아니라며 부정했다.
“그냥 우스워서요. 그때 시카고에서 우리가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가기 싫은 거 들켜서 말 돌리는 거죠?”
“우리 첫 여행 앞두고 설레서 잠 못 잔 거 보고도 그런 말을 합니까.”
재인이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엄마가 남겨 놓은 물건을 찾으러 시카고에 가는 걸 알면서도, 첫 여행이라고 기념하는 남자가 고마운 탓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잠을 못 잔 건 재인이었다. 그리고 재인을 잠 못 자게 한 건 강태서였다. 그러니 강태서는 잠을 못 잔 게 아니라 안 잔 거라고 말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말해 봤자 제 얼굴만 빨개질 거라는 것을 아는 터라 몇 시간 전을 곱씹으며 초콜릿 하나를 더 깠다.
“으응, 잠깐, 잠깐만요…….”
“그런 거, 후우……. 모릅니다.”
“그만, 그만요. 잘래요, 자고 흐, 싶, 어요.”
“비행기 안에서 푹 자요.”
겨우 사정한 끝에 해 뜨는 것을 보고 난 후에야 그의 품에 안겨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공항으로 와야 했다. 두 시간도 채 못 잔 것이다.
비몽사몽간에 씻고 양치하는 동안, 과하게 힘이 넘치는 남자를 노려볼 정신도 없이 졸기 바빴다. 한 번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며 따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유독 이 방면에서 뻔뻔한 남자 앞에서 본전도 못 찾았다.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너무 좋지.”
“……그게 아니라.”
“나만 좋았나.”
“아니, 나도 좋았는데.”
“그냥 좋은 게 아니고 엄청. 엄청 좋아하던데.”
“……그러니까요. 엄청 좋기는 좋았는데.”
“더 하자고?”
“……아니.”
그동안 너무하다고 여겼던 낮과 밤이 그 딴에는 배려한 거라고 하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 후로 재인은 그를 타박하는 대신 수치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의 품에서 늘어지고, 그의 손에 저를 맡기는 것에 익숙해지기로 한 것이다.
내려놓으니 편했다. 세심하고 꼼꼼한 손길에 졸다 깨면 머리카락 끝까지 보송보송 말라 있었고, 몸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팔만 들면 옷이 입혀졌고 때로는 그에게 안겨 이동하기도 했다.
“아기가 따로 없네.”
“그러게. 아기라고 불러 주면 좋겠습니까?”
“아니! 그런 말이 아니구요!”
혼잣말한 걸 두고 놀리는 태서에게 재인이 발끈하던 때였다. 가방에서 길게 울리는 진동에 재인이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고 태서에게 양해를 구했다.
“응, 상화야.”
―재인아, 너 지금 공항에 있는 거지?
“응. 이제 곧 비행기 타려고.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평소와는 다르게 다급하게 느껴지는 상화의 목소리에 재인이 불안함을 느끼고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 기울이던 태서의 핸드폰 역시 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