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 너무 귀하고 소중해서 (84/123)


#84. 너무 귀하고 소중해서
2023.04.18.



“조대훈한테 개처럼 충성하더니, 진짜 개가 되기라도 했어?”

악에 받친 지승희가 김 실장을 올려다보며 차갑게 조소했다. 하지만 인상을 굳힌 채 석상처럼 굳어 버린 김 실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설 나와 공장 들어가야 하는 거, 거둬서 공부시켜 준 게 누구야?”

“……돌아가신 지태광 이사장님이십니다.”

“그래. 김 실장 번듯하게 입히고 제대로 먹이고 따뜻한 곳에서 재운 게 우리 아버지야.”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이래? 이 배은망덕한 개자식아! 원래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하란 말이야!”

승희가 소리 지르며 손을 들어 김 실장의 어깨와 가슴팍을 치려 할 때였다.


“이, 이거 안 놔?”

턱, 하고 잡힌 손목이 뜻밖이었는지 부릅뜬 승희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은혜도 모르는 개 주제에, 맞기 싫으면 똑바로 굴든가!”

“……지승희 이사장님께서 제 원래 주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뭐?”

“저는 돌아가신 지태광 이사장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조대훈 회장님을 위해 일했을 뿐입니다만.”

승희는 생각지 못한 김 실장의 말에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제 손목을 감싸 쥔 건조한 손에 실린 힘을 깨닫고는 찡그린 시선을 들어 아프게 느껴지는 손목을 바라보았다.

늘 김 실장의 위에서 그를 부리기만 하던 그녀였다. 그랬기에 이런 식의 대응은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지그시 승희를 내려다보던 김 실장이 손에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떨쳐 내듯 놓았다. 그제야 승희는 방법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오빠.”

“…….”

“오빠, 나 살려 줘. 조대훈 그 사람이 우리 아빠가 남겨 주신 재산을 어떻게 말아먹었는지, 오빠 알잖아. 응?”

승희가 간절하게 김 실장을 올려다보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그를 향하는 승희의 목소리가 한결 나긋해졌다.

마치 이십 대의 나이에 그랬던 것처럼 한껏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는 그녀였지만, 그럴수록 입가에 팬 주름이 도드라져 보인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온갖 비리의 증거가 가득한 저 금고를 열어 안의 것을 가지고 가면 외면했던 강태서가 받아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강태서가 받아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언론이든 검찰이든 저 안에 든 것을 들고 가서 찌르기만 하면 조대훈 하나쯤은 물 먹일 수 있을 터였다.

지금 승희는 조대훈을 끌어내리고 어떻게든 저 한 몸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오빠를 얼마나 아꼈는지, 오빠도 기억…….”

“이사장님.”

승희의 말허리를 자른 김 실장이 평소와 다름없이 공손하게 그녀를 불렀다. 스스럼없이 오빠라 부르던 옛 기억을 되살려 김 실장을 제 편으로 만들려던 승희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다.


“저는 오늘 중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관련 서류를 챙기러 온 겁니다.”

“…….”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친근하게 오빠라고 부르는 그녀에게 선을 긋는 그의 태도가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김 실장은 승희의 요구 사항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럴 거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옅은 조소를 머금은 채 차갑게 돌아서는 김 실장의 뒷모습에서 승희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이 아이의 아빠이지 않냐고, 지금이라도 상황을 바로잡자던 남자를 비웃던 제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애달픈 눈으로 저만 바라보던 남자도 어느새 환갑이 지나 있었다. 이 남자가 절절하게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던 것도 삼십 년 전이었다.

강산이 세 번은 바뀌었을 시간 동안, 사람의 마음이라고 바뀌지 않았을 리 없다. 따뜻한 마음 한 자락 내어 준 적 없었으면서 무슨 자만이었을까. 입술을 짓씹던 승희가 다급하게 외쳤다.


“……유리는!”

승희의 외침에 서재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로 향하던 김 실장이 멈춰 섰다. 그러자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승희가 달리듯 발걸음을 떼서 그의 앞을 막아섰다.


“유리는 살려야 할 거 아냐. 오빠도 알잖아. 유리, 우리 유리는…….”

“유리 양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역시, 아이는 모르는 척할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승희의 표정이 밝아졌다. 유리를 핑계 삼아 잘만 구슬리면 이 구렁텅이에서 살아 나갈 방법이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그렇지? 그리니까 오빠, 우리 유리한테라도…….”

“회장님께서 좋은 혼처를 찾아보시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

“회장님께서 조금 무뚝뚝하시긴 해도, 유리 양의 아버지니까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인 김 실장이 멀거니 선 승희를 비켜섰다. 승희는 저뿐만 아니라 유리마저 외면하는 김 실장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채 점점 가빠지는 숨을 겨우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잠긴 서랍을 열기 위해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 차린 승희가 차게 웃으며 짓씹듯 속삭였다.


“그 인간이 모를 것 같아? 유리가 자기 딸 아닌 거, 알고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사람이야. 그렇게나 무서운 인간이 유리가 누구 씨인지, 모르고 있을 것 같아?”

“……아신다 한들, 괘씸하기는 하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지금 상황에서 저를 내치면 오랜 세월 수족처럼 부리던 사람이 없어서 불편한 건 회장님이실 텐데요.”

지난 세월, 어쩌면 아내인 그녀보다도 비서인 김 실장이 조대훈과 더 오랜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승희가 제 남편을 잘 아는 만큼, 남편의 비서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승희는 뒤늦은 깨달음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회장님 성정에 친부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으실 겁니다. 애초에 회장님께서는 아이 때문에 결혼한 게 아니라, 돈 때문에 결혼하셨으니까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분노와 모멸감에 과호흡 증상이 온 승희를 잠시 바라보던 김 실장이 성큼성큼, 서재를 가로지르며 속삭였다.


“아무래도 회장님께서는 아내보다는 일 잘하는 개를 곁에 두시려나 봅니다.”

비웃음 가득한 말끝에 달칵, 하고 서재 문이 열렸다.


“신 여사님.”

“예, 예!”

주방에 있던 과천댁이 그의 부름에 재빠르게 서재 앞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승희는 부르르 떨리는 손을 말아 쥔 채 쓰러지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었다.


“이사장님께서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

“어머나, 이를 어째.”

“방으로 모셔 주세요.”

“예, 예. 그럴게요. 이사장님, 저를 잡으세요.”

과천댁이 눈 감은 채 책상 모서리를 붙잡고 선 승희를 부축하듯 잡았다. 승희는 더는 김 실장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수치와 멸시를 견뎌 내기 위해 침실로 향하는 발걸음에 집중할 뿐이었다.


“삼십 년 넘게 개로 살았으면, 은혜는 충분히 갚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느라 닫히는 서재 문 너머에 선 김 실장이 쓴웃음을 머금은 채 내뱉는 낮은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 * *



“재인아, 살다 보면 힘든 날이 있어. 어쩌다 힘든 날 말고, 힘든 날이 계속 이어지는 때가 있거든. 그럴 땐 어떻게 할래?”


“엄마 보면서 힘내면 돼.”


“엄마가 없으면?”


“엄마가 왜 없어?”

 
재인은 엄마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기 전을 회상하며 책꽂이에서 앨범을 꺼내어 들었다.


“엄마는 뭐 천년만년 살아? 언젠가는 엄마도 늙고 할머니가 되고, 그러다가…….”


“안 돼. 나랑 같이 천년만년 살아.”


“우리 재인이가 결혼하면?”


“난 결혼 안 할 건데? 엄마랑 평생 같이 살 거야.”

 
사춘기에 접어들고도 마냥 엄마밖에 모르는 딸의 호언장담이었다.

그런 재인을 바라보며 푸스스 웃으면서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던 엄마의 손은 따뜻했다. 어룽져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낸 재인이 빠르게 앨범을 넘겼다.


“그래도 말이야. 혹시 엄마 없이 큰돈이 필요하거나 그러면…….”


“내가 사고 치는 딸이야? 큰돈이 왜 필요해?”

 
자꾸 엄마가 없을 어느 날을 가정해서 말하는 엄마에게 서운해서 재인이 팩, 하고 토라졌다.

재인의 세상엔 엄마뿐이었다. 그리고 엄마 세나의 세상에도 재인뿐이라는 걸 알았기에 어린 재인은 더 속상했다.


“그래, 우리 재인이는 엄마 속상하게 하는 일이라고는 없지. 그러면 음……. 엄마한테 화가 났을 때, 엄마한테 속상한 게 있을 때, 그럴 때는.”


“왜 자꾸 이상한 말을 해? 그럴 일 없다니까.”


“그냥. 그냥……. 그럴 때는 사진을 봐 줘.”


“사진?”


“응. 우리 재인이랑 엄마랑 얼마나 재미있게 지냈나. 우리 재인이랑 엄마랑 얼마나 많이 닮았나. 그런 거 보면 재미있잖아.”

 
그때 엄마는 어쩌면 자신의 병이 깊다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재인의 성장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앨범에서 가장 큰 사진을 찾아낸 재인이 조심스럽게 보호 필름을 들췄다.

발레리나 복을 입은 채 통통하게 배를 내밀고 있는 사진은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 중의 하나였다.


“아…….”

앨범의 접착 부분에 딱, 붙어 있던 모서리 부분을 들어 올리자 나온 것은 아직도 새것처럼 보이는 작은 쪽지였다. 그리운 엄마의 필체였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천사가 또 있을까? 내 딸 윤재인, 엄마가 많이 사랑해.>

문장 끝에 안을 꼭꼭 채워 그린 하트 위로 툭, 눈물이 떨어지고 말았다. 엄마는 재인에게 쓰는 편지나 쪽지마다 꼭 속을 채운 하트를 마지막 문장의 끝에 그리곤 했다.

재빠르게 눈물 자국을 닦아 낸 재인이 다른 사진을 들춰냈다. 또, 그리고 또. 어린 날의 추억 뒤엔 빠짐없이 사진과 관련된 엄마의 쪽지가 남아 있었다.

<우리 재인이, 미시간 호수가 바다인 줄 알아서 어떡하지? 나중엔 꼭 바다 같이 가자.>

<핫초콜릿에 큰 마시멜로는 하나만 얹어 먹기. 이건 어른이 되어서도 꼭 지키기야. 약속!>

<하루 적어도 두 끼는 꼭꼭 챙겨 먹기. 힘들 땐 뭐라도 먹고 푹 자. 꼭이야.>

<모두가 내 편 같지 않은 날도 있어. 그런데 재인아, 그래도 찾아보면 내 편은 있어.>

<이렇게 예쁜 너를 내가 낳았네. 엄마는 엄마가 재인이 엄마라서 행복해.>

계속해서 발견되는 쪽지가 너무 귀하고 소중해서 차마 꺼내 볼 수도 없었다. 앨범의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쪽지를 확인하며 울고 웃던 재인은 마지막 사진 뒤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유치원 졸업 액자 뒤를 열어 봐.>

쪽지에 적힌 액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재인은 바로 알 수 있었다.

화장대 위에 놓인 액자를 가만히 응시하던 재인이 일어섰다. 노트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액자에 담긴 것은 재인과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었다.

유치원 졸업식 날, 엄마는 솜씨를 발휘해서 재인의 머리를 그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로 크게 부풀려 주었고, 재인은 마치 미인 대회에 나간 것처럼 한껏 치장하고 유치원을 누볐다.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그리운 기억이었다.

똑같은 머리 스타일에 똑같은 화장을 하고 꼭 안고 웃으며 찍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인이 손을 뻗었다.

시카고에서나, 한국에서나, 발리에서나, 어디서든 늘 재인과 함께하던 액자 뒤쪽의 고정 장치를 해체하는 재인의 손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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