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양심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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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양심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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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양심이 없지
2023.04.14.
“돈도 제대로 못 받은 하청 업체 사람들만 불쌍하지, 뭐.”
“그 사람들도 결국엔 똑같은 거 아냐? 불량 자재 납품했다잖아.”
“야, 그래서 지금 15년 전에 지은 우리 아파트값도 떨어지고 난리야. 언제부터 그렇게 부실 공사를 해 댔는지 누가 알겠냐고. 매일 들어가 사는 집이지만, 불안해 죽겠어.”
식당의 뉴스 화면을 보며 해장국을 먹는 무리 중에서 유독 강하게 투덜거리는 사람은 현양 아파트에 사는 모양이었다.
“현양 건설 회장 뻔뻔한 거 봤냐? 아예 배 째라 수준이더라. 조사 들어가서도 혐의 다 부인하고 있다며. 이참에 검찰이 아주 제대로 털어 줬으면 좋겠어. 폭삭 망하게.”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너 왜 그렇게 순진하냐? 상대가 재벌인데 검찰 조사도 다 짜고 치는 거겠지. 어영부영 넘어갈걸?”
상화는 뒤에 앉은 무리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입은 꾹 다물었다. 아침으로 먹으려고 주문한 뼈해장국의 뼈에 붙은 고기는 젓가락으로 대충 긁어내는 중이었다.
“으음, 난 아니라고 봐. 이번 현양 사태는 검찰도 대충 넘기기는 어려울 거 같더라. 비자금 조성, 설계비 부풀리기, 감리 업체 및 구, 시 관계자에게 뇌물 제공, 횡령도 480억 넘게 해 먹었지. 그리고 또 뭐야. 혐의가 엄청 많던데.”
“향응 수수, 거기다 하청 업체 관리 감독 소홀로 인한 불량 자재 사용, 부실 공사까지……. 검찰도 바쁘겠어. 털 게 어디 한둘이어야지.”
“그건 그래.”
상화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빈 소주잔을 흘끗거렸다. 해장술로 딱 한 잔만 더 하고 싶은 마음에 슬금슬금 손을 뻗으려는데 냉정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서상화, 아주 술꾼이 다 되셨어. 매일 술 마시는 거로도 모자라 해장술을 시키겠다더니, 아예 한 병을 비우려고?”
“아니이? 병이 걸리적거려서 치우려고 그랬지!”
상화가 저를 노려보는 재인의 눈치를 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예전에는 거의 매일 보던 사이여서 그런지, 겨우 며칠 만에 만났는데도 상화는 재인을 본 게 꽤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튼 별일이다. 태서 씨가 널 집 밖으로 다 내보내 주고. 물론 우리 양옆 테이블에 경호원분들이 앉아 계시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매일 어찌나 끼고 사는지, 내가 우리 재인이 얼굴 한번 마음 놓고 볼 수가 없…….”
상화는 삐죽이던 입술을 조용히 말아 물었다. 지금은 투덜거릴 때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은 상화가 깍두기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말해 봐.”
“그러니까……. 하아…….”
잘게 씹은 깍두기를 겨우 삼킨 상화가 눈을 질끈 감았다. 급하게 물 한 잔을 다 비워 내고는 깊은 한숨과 함께 탄식을 흘렸다.
“처음 테드 봤을 때, 너무 귀여운 거야. 귀여워서 자꾸 괴롭히고 싶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고, 자꾸만 날 피하는 초록색 눈을 딱, 나한테 고정해 놓고 싶고.”
“음.”
“그래서 내가 좀 귀여워해 줬어.”
“……너 지금 그 말, 여고생 성희롱하는 변태 아저씨 같은 건 알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날부터 내가 테드랑 따로 연락했다는 말이야. 배 여사표 반찬도 좀 싸서 가져다주면서 혼자 사는 애 밥 굶지 않게 살피고, 한국의 맛도 알려 주고, 한국의 정이 뭔지도 알려 주고…….”
정이 뭔지까지만 알려 줬어야지. 더한 걸 가르쳐 준 상화를 보는 재인의 눈매는 좀처럼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애가 보면 볼수록 귀여운 거야. 그래서 내가 누나 같은 마음으로! 진짜야. 테드가 나, 누나라고 불러. 발음도 어설픈 애가 ‘누나아아.’ 하면 얼마나 귀엽고 흐뭇한지 몰라. 왜 그렇게 봐……?”
“상화야.”
“어, 응…….”
“알겠으니까, 그날 일에 대해서 말해.”
쿡, 찔린 조개처럼 다시금 입을 꾹 다문 상화가 목이 타는지 결국 소주잔을 채워 단번에 넘겨 삼켰다. 술도 마시다 보면 늘어나는지, 이제 한 병은 거뜬히 마실 수 있게 된 그녀였다.
“처음엔 질색하던 애가 어느 순간부터는 고분고분, 대답도 잘하고 누나, 누나 잘 부르더라고. 그게 좀 뿌듯하기도 했어. 영 어색해하던 애가 점점 마음 여는 게 보이니까 기특하고 예쁘잖아. 그래서 내가 더 챙겼지.”
재인이 묵묵히 상화의 빈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상화는 안주도 없이 또 한 잔을 쓰게 삼켰다.
“가족이랑은 연을 끊은 모양이더라. 자세히는 얘기 안 하는데, 부모가 아주 쓰레기였나 봐. 한국에 친한 사람도 없다던데, 사람이 어떻게 그러고 살아. 한창 친구가 좋을 나이잖아. 아직은 누군가가 챙겨 줄 나이잖아. 어떻게 타국 땅에서 홀로 팝콘으로 끼니 때워 가면서 사느냔 말이야. 온종일 컴퓨터만 바라보면서 사는 게 말이 되냔 말이야.”
정이 많은 그녀였다. 재인은 발리에서 제게 먼저 다가와 주었던 상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겉으로 볼 땐 좀 세 보여도, 상화는 재인이 아는 그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속 깊은 친구였다.
그런 상화의 눈에 친구도, 가족도 제대로 없는 테드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상화가 테드를 얼마나 살뜰히 챙겼을지, 재인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날도 같이 술 마시자고 그랬는데, 왜인지 안 나온다는 거야. 그전까지는 잘 나왔거든? 그래서 그래라, 하고 나랑 앰버랑 둘만 마셨지. 그날따라 술이 술술 넘어가더라구.”
“응.”
“사실 그날, 테드 만나면 주려고 내가 목도리도 챙겼단 말이야. 애가 한국 겨울 날씨를 우습게 봤는지, 목도리가 하나도 없다지 뭐야. 근데 못 만나서 그냥 다시 들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집 앞에 테드가 서 있더라.”
“기억은 다 나는 거야?”
“응……. 젠장 맞게도 기억은 아주 멀쩡해.”
재인이 보기에 상화는 그날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후우……. 그래서 너무 반가웠지. 근데 얘는 날 보고 깜짝 놀라더라구. 아니, 우리 집 앞에 와 있어 놓고 날 만날 생각은 못 했나? 왜 놀란 건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어. 아무튼, 테드 만나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술 한잔 더 하자고 그랬지.”
“응.”
“가볍게 맥주나 마실까 하고 집 근처 호프집으로 갔는데.”
“응.”
“……정신 차려 보니까 호텔 엘리베이터더라고.”
“……갑자기 왜 얘기가 그렇게 돼? 중간은 어디 가고?”
“몰라. 정신없었어. CCTV고 뭐고 서로 달려들기 바빠서. 나 그날 입술 다 터졌잖아.”
기가 막힌 재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보니 상화는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평소에 상화는 목 답답한 게 싫다며 목걸이도 하지 않았다. 터틀넥 스웨터 안쪽으로 슬쩍 드러난 붉은 자국을 확인한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게 뭔지는 재인도 잘 알고 있었다. 태서가 제 몸 곳곳에 흐려질 틈 없이 새겨 놓곤 하는 자국이었기 때문이다.
“……젊은 게 좋긴 하더라.”
“너, 지금 그 말도 변태 영감 같은 거 알지?”
“……나 변태 영감인가 봐.”
슬쩍 얼굴을 붉힌 상화가 이내 제가 떠올린 기억을 지워 내듯 거칠게 마른세수하고는 찬물을 들이켰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뭘 어떻게 해?”
“잤다며.”
“뭐, 내가 강제로 하길 했어, 테드가 억지로 하길 했어? 성인 둘이 합의하에 한 거니까 문제 될 건 없지. 그냥 끝. 없었던 일로 하려고.”
“세상에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경우가 어디 있어?”
“걔도 그런 생각이니까 새벽에 튄 거 아닐까? 잠에서 깼는데 혼자였어. 테드가 메모를 남겨 놓은 것도 아니어서 좀 당황스럽긴 했는데, 그것만 봐도 걔가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있지.”
“이대로 그냥 덮는다고?”
“응……. 지금은 그게 최선인 것 같아. 한동안은 좀 어색하겠지만 테드는 찐 외국인이잖아. 외국인 마인드로 쿨하게 지내야지, 뭐. 내가 걔랑 연애할 것도 아니고.”
이미 그렇게 마음을 정했는지, 상화는 덤덤했다. 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날, 상화의 안부를 묻던 테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전전긍긍하며 상화의 소식을 궁금해하던 테드는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다.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상화의 얘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걸 봤던 재인으로서는 없던 일로 하고 넘긴다는 상화의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처음엔 어린애한테 몹쓸 짓 했나, 죄책감이 들기도 했는데 걔도 뭐, 새벽에 혼자 가 버린 거 보면 굳이 얘기 꺼낼 필요 없는 것 같고. 야, 내가 일방적으로 그런 거 아니다? 걔가 더 적극적이었어. 심지어 나중에는 내가 죽겠다는데도 두 번만, 세 번만 더 하자고……. 걔도 참 양심이 없지. 한 번만 더 하자는 것도 아니고.”
“……상화야, 여기 해장국집이야.”
“아, 응……. 아무튼, 그날 외박했다고 우리 배 여사한테 얼마나 맞았는지 몰라. 남자랑 있었다고는 전혀 생각 안 하는 게 더 화가 나. 남자 만나느라 외박한 거면 차라리 안 혼낸대. 어디서 술 처마시고 찌그러져 있다가 이제야 들어오느냐면서 나를 때리는데……. 어우, 배 여사. 배드민턴 교실 다니더니 팔 힘이 더 세진 거 같아.”
아직도 얼얼함이 가시지 않는지, 맞은 부위를 문지르던 상화가 여전히 현양 건설과 현양 재단을 욕하고 있던 뒤쪽의 무리를 흘끔거리고는 재인을 향해 눈짓했다.
“넌, 잘되어 가고 있는 거지?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현양은 이제 완전 박살 난 것 같던데.”
“응……. 주식 지분 관련해서 조금 부침이 있는 것 같던데. 그거 말고는 문제없는 것 같아.”
“주식 지분?”
“응. 총수 일가가 가진 지분이 워낙 많아서, 그것보다 많이 확보하려는데 행방을 알 수 없는……. 아, 아……!”
“왜, 왜 그래?”
상화가 놀란 눈으로 벌떡 일어선 재인을 올려다보았다. 재인이 불시에 일어나자 양옆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경호원들 역시 일사불란하게 일어서서 주변을 살폈다.
재인은 잊고 있던 뭔가가 갑자기 생각난 사람처럼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상화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반짝, 눈에 총기를 되찾고는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집에, 집에 가 봐야겠어.”
“갑자기?”
“미안해, 상화야. 연락할게.”
다급하게 해장국집을 나서는 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상화가 포옥, 한숨을 내뱉었다. 입맛도 없던 차에 해장국이 넘어갈 리 없다. 국물만 성의 없이 몇 번 더 떠먹던 상화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해장국집을 나섰다.
오늘 이른 아침부터 계속해서 연락해 오는 테드의 전화는 또 무시한 채였다.
* * *
“김 실장, 김 실장은 알잖아요. 그 인간 금고 번호를 김 실장이 모를 리 없지.”
승희가 꼿꼿이 선 김 실장을 붙들고 소리쳤다. 하지만 김 실장은 승희를 바라보지 않았다.
“김 실장. 나, 우리 유리랑 살아야 해요. 내가 사는 길은 지금 이것밖에는 없어. 그러니까 제발 좀!”
“죄송합니다, 이사장님. 금고 번호는 회장님 외에는 그 누구도…….”
“야! 김형주, 이 개자식아!”
승희의 입에서 오랜만에 나온 제 이름에 로봇 같던 김 실장의 눈썹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