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나에게만 다정한 나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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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나에게만 다정한 나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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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나에게만 다정한 나쁜 남자
2023.04.11.
―우리를 이 꼴로 만든 게 자네라고 들었어. 맞나?
“칭찬 감사합니다만, 저는 기우는 탑에 부채질만 했을 뿐입니다.”
―…….
“길게 통화할 사이 아니니, 조건을 말씀하시죠.”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확히는 몰라도, 지승희가 조대훈에게서 완전히 돌아선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둘 사이에 완전한 균열이 일기를 바라며 지켜보던 태서로서는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전 국민의 시선이 쏠려 있는 상황에서 적지 않은 주식을 팔아 치우기가 쉽지 않았을 터다.
거기다 현재 현양 건설의 주가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현금화하느니 태서에게 넘기고 챙길 수 있는 것을 챙기는 것이 훨씬 나았다.
―큰 거 바라지 않아. 내 어머니가 남겨 주신 돈, 그것만 들고 나갈 수 있게 해 줘. 나는 피해자야. 관련한 자료 다 넘기겠네.
누가 감히 피해자라는 건지, 우습게도 본인은 그렇게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도 안 찰 말을 늘어놓는 승희의 뻔뻔함에 태서가 미간을 찡그렸다.
―나는 지금 절실해. 다른 의도는 없으니 알아주게.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죠.”
―윤재인, 그 애가 내게 바라는 게 뭔지 알고 있네.
불쾌함에 급히 통화를 끝내려는 태서의 낌새를 알아챈 지승희가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부모 잘못 만나 그렇게 된 애한테 내가 못 할 짓 했던 건 인정하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애도 피해자라는 걸 알아. 죄라고는 세상에 태어난 것뿐인데, 내 부족하여 품지 못했어.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네.
“…….”
미안하다고 하는 말이 철저하게 제 위주다. 어쩌면 이렇게나 뻔뻔한지. 태서는 할 말을 잊은 채 맹렬하게 번지기 시작한 분노를 제 주먹 안에 가두었다.
부모를 잘못 만나다니, 재인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퍼부었던 윤세나를 모욕하는 말이었다. 거기다 세상에 태어난 게 죄라는 말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강태서에게는 무한한 축복이었다.
매일 아침, 태서는 그녀를 품에 안고 믿어 본 적 없던 온갖 신께 감사를 드렸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행복은 오직 윤재인으로 인한 것이었다.
제게 허락된 모든 행운을 다 끌어다 쓰는 기분이었다.
언젠가는 이 행운이 바닥나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손에 쥔 그녀를 끝도 없이 움켜 그 안에 저를 새겼다. 점점 자라나는 제 욕심이 그녀를 삼키지 않도록 매일 경계하고 스스로를 단속했다.
그렇게나 아끼는 사람을, 지승희는 끝까지 천덕꾸러기 취급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찾아가 더한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싶었다. 태서가 이를 악물었다.
―그 아이가 내게 바라는 게 어린 날에 따스하게 맞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일 테지. 하겠네. 한국 뜨기 전, 그 아이 만나겠네.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구는 꼴을 더는 봐줄 수 없었다. 태서가 말을 고르고 고른 끝에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고 연락드린다고 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바로 답을 드려야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어딜 감히 사과를 입에 올리십니까.”
―……뭐?
“누구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사과입니까, 그건.”
분노로 침잠한 목소리는 음산하기까지 했다.
“그딴 사과, 백번 천번 해 보십시오. 용서해 줄 생각은 없으니.”
행여나 착한 윤재인이 용서한다고 해도 제가 용서할 수 없다.
어린 재인에게 상처를 주고 그녀의 희망을 꺾은 인간들이 고작 몇 마디 말로 면죄 받는 것은 말이 안 됐다. 더군다나 진심도 아니었다. 그저 현실에 쫓겨 마지못해 머리 숙이는 것일 뿐.
“주식 양도, 사양합니다.”
―…….
“지옥까지 끌어안고 가시죠.”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낸 태서가 환멸 가득한 눈으로 돌아섰다. TV에는 현양 건설과 현양 재단의 비리에 관해 강도 높은 검찰 수사가 시작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당히 고개 들고 검찰청에 들어서는 조대훈을 노려보던 태서가 다시금 업무용 핸드폰을 들었다. 연락처를 내려 이번 일과 관련된 자료를 넘겼던 검사를 찾은 그가 주저 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우습지도 않은 꾀병 따위에 검찰이 속아 넘어간 게 아니었다. 조대훈을 잡아들이는 게 더 급했기에 지승희의 조사를 미뤄 둔 것일 뿐이다.
“강태섭니다.”
이제 때가 되었다. 재계에 사이좋은 부부라고 소문난 둘이니, 남편이 가는 곳에 아내가 빠질 수는 없다. 전 국민 앞에서 서로를 물고 뜯으며 함께 지옥에 떨어질 두 사람을 그리는 태서의 입매에 쓴웃음이 걸렸다.
* * *
“독단적인 결정, 미안합니다.”
“태서 씨.”
재인이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그 제안 받아들였다면 조금은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나 때문에 일이 어려워지게 된 거잖아요. 내가 미안해요.”
“재인 씨 때문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생각 하지 말아요.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그러면 태서 씨도 미안해하지 말아요. 나는 오히려 칭찬해 주고 싶으니까.”
가만히 재인을 내려다보던 태서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걸렸다.
재인의 목덜미에 스스럼없이 얼굴을 묻은 그가 큰 숨을 들이켰다. 폐부를 가득 채우는 재인의 체취에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사르륵 풀려 사라지고 있었다.
두려웠다. 인정이라고는 없는 제 성질머리대로 일을 진행하면 재인이 정나미 떨어진다고 하지는 않을는지. 사랑은커녕 미움만 받고 자라 비뚤어진 제 성정이 그대로 드러나면 무섭다고 싫어하지는 않을는지.
그래서 계속 재인에게 허락받아 가며 성질을 눌러 왔는데,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참아 주는 게 더는 힘들었다.
“재인.”
“네.”
“나는 그 사람들…….”
태서는 재인을 만나기 전에 그랬듯, 거슬리는 것들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싹 다 쓸어버리고 싶었다.
평생을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만 살아왔다. 친모에게, 친부에게, 그리고 조모에게 저를 새기려 발버둥 쳤다. 그러면서 사람으로서 알아야 할 온갖 감정을 모르고 살았다. 사람보다는 돈을 믿었다.
마냥 다정하지만은 않은 제 모습을 언제까지 숨겨야 할까. 맹목적으로 살아온 제 민낯을 보고도 재인이 곁에 있어 줄까. 고민하는 태서의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던 때였다.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
“태서 씨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눈치 보지 말고.”
가만히 그녀의 향기를 맡으며 지승희로 인한 분노를 삭이고 있던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재인이었다. 태서는 결국 그녀의 고운 살결에 대고 음습한 제 이면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내가 나쁜 놈처럼 굴어도……?”
가만히 태서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작은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가슴팍을 짚어 밀어내려는 재인의 손짓에 덜컥, 태서의 심장이 발치에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흡……!”
태서는 재인의 숨이 막힐 만큼 세게 끌어안았다. 당신에게만큼은 버림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그의 몸짓이 절박한 탓이었다.
“안 그럴게. 안 그럴 테니까.”
“아니, 아니. 태서 씨, 내 말은…….”
“밀어내지 말아요.”
재인을 있는 힘껏 껴안은 채 한참이나 눈을 감고 서 있었다. 태서는 문득 제 어깨를 매만지는 손길을 느꼈다. 달래듯 제 어깨를 감싸 쓸어내리는 손은 다정하고도 상냥했다.
불안함에 경직되어 있던 어깨와 등이 이완되고 두려움에 쿵쿵, 빠르게 뛰던 심장이 차츰 제 속도를 찾아갈 무렵, 너른 등으로 옮겨 간 작은 손이 그의 심장 박동에 맞춰 두드리듯 다독이기 시작했다.
“밀어내려고 한 게 아니에요. 태서 씨 얼굴 보려고 그랬어요.”
“…….”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아요. 나 때문에 참지 말아요. 일일이 내 허락받지 않아도 돼. 나쁜 놈이면 어때서.”
조곤조곤 속삭이는 재인의 말에 태서의 팔에서 조금씩 힘이 빠졌다. 한참 만에 다시 마주 본 재인은 그를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아…….”
태서는 그녀의 까만 눈동자 속에서 한없이 바보 같은 저를 발견했다. 부모에게 눈짓 한번 받기 위해 상을 받아 와 놓고도 눈치를 보던 어린 날의 제 모습이었다.
그리고 재인은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래에서부터 끓어 차오른 희열에 태서는 서서히 잠겼다. 황홀하고도 벅찬 숨 막힘이었다.
“다정한 남자보다 더 매력 있는 남자가 있어요.”
“……어떤 남잡니까.”
부모도 버린 그를 품어 준 그녀에게, 태서는 제 뭐라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좋다는 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될 생각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나에게만 다정한 나쁜 남자.”
나쁜 사람들에게까지 다정할 필요는 없다고, 성질머리대로 휘두르라고 재인이 그의 편을 들어 주었다. 마음껏 칼춤 추라는 허락 앞에 태서의 눈꼬리가 곱게 접혔다.
“사실, 태서 씨라면 다, 앗……!”
욕심껏 재인의 입술을 베어 문 그의 입가에 그린 듯 미소가 걸렸다. 어느 때보다도 진득한 미소였다.
* * *
광순은 머리를 싸매고 누워 앓는 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15억을 날려 먹은 아들 때문에 몸져누웠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게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그 아들놈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끄응…….”
어떻게 세운 빌딩인데, 아들 새끼가 어미 몰래 건물 2층을 싼값에 팔아넘겼다. 그러고 저는 제 치과가 있던 자리에 선배가 새로 차린 치과에서 월급이나 받아먹는 막내 부원장이 됐단다.
“못난 놈……. 배알도 없는 놈 같으니.”
한때는 우리 원장님, 귀한 아드님이었던 석동은 어느새 그냥 아들이 되었다가, 아들놈, 이제는 아들 새끼가 되었다. 그리고 그거로는 모자라서 못난 놈, 배알도 없는 놈이 되었다.
그 배알도 없는 놈은 오늘도 돌아누운 광순의 뒤에 대고 싹싹 빌다 출근했다. 쉬는 날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침 일찍 서둘러 나가는 모습이 어딘가 들떠 보였다.
거울 앞에 한참 붙어 콧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매만지다 나간 아들의 잔상에 이가 절로 갈렸다. 꼴 보기 싫어서 어딜 가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덜컥, 불안감이 엄습했다.
“가만, 또 어디 가서 이상한 짓이나 하는 거 아니야?”
연달아 두 번이나 아들에게 당한 광순의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건물 2층을 팔아넘긴 걸 알게 된 날, 그놈 새끼 머리털을 죄다 뽑아 놓을 걸 그랬다. 등이고 어깨고 맞으면서도 머리카락만은 안 된다고 어찌나 소중히 감싸고 주저앉던지.
분이 풀리지 않는다. 이럴 땐 며느리라도 잡아야 하는데 잡을 며느리가 없다. 통탄스러움에 애꿎은 머리 끈을 풀어 내던진 광순이 문 너머 석동의 방을 쏘아보았다.
지금이 들뜰 때인가. 아니었다. 석동이 건물 2층을 통째로 팔아치운 돈에 가지고 있던 현금을 더해 대출 원금과 이자는 모두 갚았다. 문제는 이제 손에 쥔 돈이 없다는 것이다.
“흐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파트 재건축에 들어가면서 보상금이 나올 텐데, 그 돈으로는 강남에 이만한 집은 못 구한다. 재건축 후 지어질 아파트에 들어가 살고 싶지만, 그러기엔 지금 가진 돈으로는 턱도 없다.
그 와중에 아파트 재건축 시공사로 선정된 건설사가 연일 뉴스에 나오는 중이었다.
이래서 보상금이나 제대로 받겠나. 강성 조합원들은 일찌감치 검찰청 앞과 건설사 대표 집 앞에 진을 치고 농성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가만, 내가 이럴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찾은 광순의 쪽 찢어진 눈에 이채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