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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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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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2023.04.07.
“누가 있어요?”
“……아니. 목이 결려서.”
태서가 조용히 속삭이는 재인을 안심시키듯 눈을 접어 웃고는 재인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계를 늦춘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주변을 맴도는 외부 차량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받은 뒤였다. 이중으로 세워 둔 경호 인력을 통해 정륜동 그의 집과 재인을 살피는 시선이 있음은 진작 알고 있었다.
배후가 조대훈일지, 정재훈일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누구일지를 밝혀내어 확실히 처리하기 위해 그냥 두고 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질척하게 들러붙는 눈길이 불쾌해서 내가 네 존재를 알고 있음을 알려 경고할 필요는 있었다.
“경호를 이중으로 배치해 두고도 신경이 쓰여요?”
“음…….”
사실 경호 인력을 이중으로 배치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업체 두 곳과 계약했다. 각 업체 직원은 서로를 의식하며 경계했고, 그래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모든 보고는 태서에게 실시간으로 도착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마음이 놓이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윤재인을 지키는 일이다. 잠시도 풀어질 수는 없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절대로 나 혼자 외출하는 일은 없을 거니까.”
“아무나 문 열어 주지도 말고.”
“택배도 태서 씨가 들고 들어오잖아요. 배달 음식도 태서 씨가 받아 오는데요 뭘.”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서가 미안한 듯 시선을 내렸다.
“집에만 있기 답답하지 않습니까?”
“워낙 집순이라 그런지, 괜찮아요. 더군다나 이렇게 하루 두세 번씩 꼭 태서 씨랑 외출하잖아요.”
“그래도…….”
“난 좋아요. 그리고 태서 씨가 미안해할 일 아닌데 왜 표정이 그래요. 그리고 이 정도 불편함은 감수해야죠.”
똑 부러지게 말하는 재인을 보는 태서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더 큰 불편함을 감수하게 하지는 않을게요.”
그러기 위해서는 뭐든 할 것 같은 태서의 눈빛에 재인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서가 재인의 어깨를 잡아 제게 꼭 붙이듯 끌어안으며 다시 걸음을 뗐다. 앞을 보기 전, 저 멀리 보이는 시커먼 차를 한 번 더 쏘아본 뒤였다.
“그런데 지분 확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예요? 아까 얘기 들었어요.”
“음, 조대훈 쪽이 가진 주식 지분이 커요. 그래서 지금 당장 자리에서 끌어내리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사라진 주식 5.8퍼센트의 행방만 알면 좋을 텐데, 추적이 되지 않네요.”
“음…….”
태서가 계획한 복수의 방향에 대해 재인에게 얘기해 주었을 때, 재인은 대훈을 끌어내린 후 현양 건설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물었다.
“회사 하나를 공중 분해하기엔 현양 건설 소속 근로자는 죄가 없으니까. 적당한 인물을 골라 새로운 대표로 앉힐 겁니다.”
“태서 씨가 갖는 게 아니고요?”
“음…….”
“태서 씨가 얻는 건 뭐예요? 현양 건설이 추진하려던 공사를 강선 건설에서 가져가는 것 말고요. 아무리 나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한다고는 해도, 태서 씨가 들일 공이 얼만데. 그런 희생은 하지 말아요.”
사실 태서는 재인만 제 곁에 있어 준다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하지만 조대훈을 무너뜨리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태서가 가진 돈만으로는 부족해서, 최근에는 앰버의 부모님까지 끌어들였다.
물론 현양 건설에 대해 알아본 앰버가 먼저 나서서 부모님 돈을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투자는 분명 더 큰 이익으로 돌아갈 것이다. 즉, 이번 일은 태서로서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조심스럽게 재인에게 물었다.
“재인 씨는 어때요?”
“나도 원하지 않아요. 현양 건설과 관계된 건 단 하나도 손에 쥐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대화 끝에, 태서는 얼마간 새로운 대표를 앉힌 이후에 현양 건설을 강선 건설에 흡수하여 합병하는 쪽으로 가닥을 냈다.
그가 그렇게 결정한 배경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친부인 강신재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미국에서 잘만 살던 그가 조모의 강권을 못 이기는 척 다시 한국에 들어온 것도 사실은 그래서였다. 스스로 비웃을 만큼 우스운 일이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당해 놓고도 아직도 아비의 눈길을 바라는 자신이.
“혹시, 주식에 관해서 뭐 들은 거 없습니까? 엄마에게서라도.”
주식의 행방이 사라지고 2년쯤 지나 죽은 조성환 회장이 윤세나와 만났다. 조성환은 윤세나를 좋게 본 듯하니 자신의 손녀를 임신한 채 미국으로 가는 윤세나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을 수도 있다.
“아뇨. 전혀요. 그런 게 있었다면 엄마가 아팠을 때 팔아 치워서 병원비에 보탰을 거예요.”
할아버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재인이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혼수상태로 쓰러져 의식이 없던 엄마의 병원비를 조달하기 위해 그녀가 택했던 것은 한국행이었다. 그 결과, 재인은 고아가 되고 말았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집 앞에 배달된 음식 재료를 확인하고 들어 올린 태서가 주변을 살피며 문을 닫으려던 때였다. 장 실장에게서 온 전화에 태서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현관 앞에 내려놓았다.
“네.”
태서는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겠다고 눈짓하고 2층으로 올라가는 재인을 바라보며 전화 받았다.
―현양 재단 지승희 이사장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사람이 왜요.”
―그게, 이유는 알 수 없는데……. 자기가 가진 현양 건설 지분 7퍼센트를 모두 우리 쪽에 양도하겠답니다.
생각지 못한 말에 태서의 짙은 눈썹이 슬쩍 일그러졌다.
―듣고 계십니까?
“네, 그래서요?”
―연락 기다리겠다며 개인 연락처를 남겼습니다.
“이 전화 말고, 업무용 핸드폰으로 그 번호 전송해요. 생각해 보고 연락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태서가 손을 씻으며 생각에 잠겼다. 남편을 등지고 적에게 손을 내민 지승희의 속내가 무엇일지를 가늠하는 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워낙 속이 시커먼 인간들이니 함정일 수도 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재인을 괴롭혔던 인간과 손을 잡고 싶지는 않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다 상대를 봐 가며 해야 할 이야기였다.
“무슨 일 생겼어요? 급한 일이면 가 봐요. 나 혼자 점심 먹어도 괜찮아요.”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재인이 어느새 그의 뒤에 서 있었다. 태서가 빙긋 웃으며 그녀를 잡아끌어 제 품에 안았다.
“난 혼자 점심 못 먹습니다.”
“…….”
“어쩌지. 윤재인 없으면 이제 밥도 혼자 못 먹겠는데.”
태서의 너스레에 재인이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 같은 남자 매력 없는데.”
“아, 똑똑한 남자 좋아합니까?”
“네.”
미소를 머금은 재인의 뺨을 매만진 태서가 그녀를 보듬어 안았다. 그대로 한 발, 한 발, 걸음마 배우는 아기처럼 재인과 함께 걸음을 뗀 태서가 춤추듯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을 지났다.
“우리 지금 어디 가요?”
“서재.”
“갑자기 서재는 왜……?”
“졸업장 보여 주려고.”
“응……?”
“똑똑한 남자인 거 증명하려고.”
대놓고 야하게 웃는 남자의 뒤로 서재 문이 닫혔다. 너른 책상과 푹신한 안락의자가 놓인 서재를 슬쩍 돌아본 재인이 가만히 태서를 쏘아보다 이내 생긋 웃었다.
“……!”
순식간에 태서의 어깨를 짚은 채 펄쩍 뛰어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안긴 재인을, 태서가 재빠르게 받아 안았다.
“대담한 여자, 어떻게 생각해요?”
“윤재인이라면, 뭔들.”
서로를 향해 고개가 기울고 입술이 가까워진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참아 내는 재인의 뺨이, 태서의 코가 씰룩였다.
“그런데 그거, 서재에도 있어요?”
재인의 질문을 바로 알아들은 태서가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내렸다. 간지러울 만큼 가벼운 입맞춤이 잔뜩 쏟아지는 사이, 결국 재인의 웃음이 터졌다.
“도대체 그게 왜 서재에 있어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도중에 분위기를 깨는 일은 없어야 하기에 집 안 곳곳 놓아뒀다. 욕실과 차에도 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태서가 재인을 잠시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헐벗은 태서의 얼굴이 너무 뻔뻔해서일까. 환한 햇살 아래 재인 역시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은 채 손을 뻗었다.
탐스러울 만큼 매끈하게 드러난 그의 어깨와 가슴팍을 천천히 내리긋는 그녀의 손길에 잘 짜인 복근과 흉근이 움찔, 떨렸다. 재인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날을 기다렸구나.”
“이런 날을 만든 거지.”
“으음…….”
“계략을 꾸미는 남자, 어떻게 생각합니까.”
야릇한 속삭임이 계속되는 사이, 입맞춤은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복잡한 이야기는 늦은 점심을 먹으며 해도 될 거라고 생각하는 태서의 허리가 조금씩 숙여지고, 커다란 그의 손에 조금씩 힘이 실리고 있었다.
“섹시하다고, 생각해요.”
이 말을 끝으로, 재인의 입에서 더는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나오지 못했다. 똑똑한 남자인 걸 증명할 거라던 태서는 그로부터 꽤 오랫동안, 제 다른 매력만을 증명했다.
그의 다른 매력에 충분히 만족한 나머지 점심도 거른 채 잠들었던 재인이 눈을 뜬 것은 어둑어둑해진 후의 일이었다.
* * *
“난 괜찮아요.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재인 씨, 기분 나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지승희인데.”
“그 사람이 그런 결정을 내린 건 이유가 있을 거예요. 나는 그 사람이 지금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우리가 그 사람을 이용하는 거지.”
“음,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보도 아니고, 원하는 게 있으니까 그런 말을 했을 거예요. 일단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태서는 생각보다 훨씬 이성적인 재인의 답변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감정을 배제한 그녀의 답은 옳았다.
재인과 저녁을 먹은 뒤 얘기 나눈 끝에 태서는 지승희에게 전화 걸었다. 갑작스럽게 주식 양도를 제안한 이유를 묻자 지승희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그 인간의 철저한 파멸을 원해. 그리고 그건 자네와 윤재인, 그 아이도 바라는 일일 테지.
시꺼먼 독이 덕지덕지 붙은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에 태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악에 받친 지승희의 얼굴을 상상하자 조유리가 정재훈의 사무실에서 발악하던 것이 떠올랐다.
비호감인 것까지, 여러모로 꼭 닮은 모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