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나 일 저질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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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나 일 저질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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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나 일 저질렀어
2023.04.04.
{현재까지 우리가 모은 건 34.8퍼센트. 주주와 연락되지 않는 것을 포함해서 행방을 알 수 없는 지분이 5.8퍼센트입니다.}
{아직 결정 내리지 못한 사람들도 꽤 있어. 저 꼴을 보고도 망설이다니, 무슨 생각인 건지 모르겠어.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 쪽에 긍정적인 사인을 보내온 사람들이 많아.}
{우리 쪽으로 돌아설 기미가 보이는 주주들이 많다고는 해도 조대훈 일가가 가진 지분이 꽤 많다는 게 문제야. 테드, 어제까지 확인된 건 모두 다 합해서 얼마라고?}
조대훈이 요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검찰에 출석한 아침, 태서는 정륜동의 집 근처 주택에서 장 실장, 앰버, 테드와 함께 회의 중이었다. 그런데 매끄럽게 진행되어야 할 회의가 자꾸 끊기고 있었다.
{…….}
{테드.}
테드는 태서가 부르는데도 대답하지 않았다. 장 실장이 고개 들어 눈짓하자 테드 곁에 있던 앰버가 테드를 팔꿈치로 툭, 쳤다.
{어, 어? 네?}
{……정신 안 차려?}
{……미안. 못 들었어요.}
{조대훈 쪽 현양 건설 지분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어.}
{아. 42퍼센트.}
{확실해?}
{네. 정확히 42.3퍼센트예요. 조대훈이 32.3퍼센트, 지승희가 7퍼센트, 조유리가 2퍼센트를 가지고 있어요.}
{……1퍼센트가 비는데?}
{네? 그럴 리가……. 아, 조유리가 3퍼센트요. 2퍼센트가 아니라.}
숫자에 있어서 만큼은 좀처럼 실수하지 않는 테드였지만 오늘따라 실수가 잦다. 태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뻗어 현관문을 가리켰다.
{도대체 오늘 왜 그래? 나가서 찬 공기라도 쐬고 오든지.}
회의 내내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멍하게 생각에 잠기던 테드에게 기어코 태서가 한마디 했다.
{잠을 못 잔 게 아닐까요?}
조심스러운 장 실장의 말에 앰버가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Nope. 어제 테드 일찍 잤어. 나랑 상화가 나오라고 전화했는데 자다가 깼다고 그랬거든.}
{잔다고 핑계 댄 거겠지. 쟤 얼굴을 봐라. 반짝반짝한 걸 보니 푹 잔 얼굴인데.}
{……푹 잔 건 아니에요.}
유달리 매끈해 보이는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린 테드가 고개를 푹 숙였다.
{테드, 진짜 그런 거야? 우리랑 놀기 싫어서 일부러 안 나온 거야?}
{나 같아도 안 나가겠다. 요즘 매일 상화 씨랑 술 마셨다며? 테드도 불러내서.}
{그럼 어떡해! 네가 재인을 꼭 껴안고 안 내보내 주니까 그렇잖아! 재인에게 자유를 줘라!}
앰버와 태서의 대화를 듣던 재인이 가만히 입술을 감쳐물었다. 태서와 함께 아침을 먹고 산책 겸 같이 온 재인은 상화의 메시지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앰버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밤마다 곁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태서를 밀어낼 수 없었던 재인은 번번이 걸려 오는 상화의 전화를 제때 받지 못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았다고 한들 나갔을까. 아마도 거절했을 것이다.
즉, 태서가 재인을 안 내보낸 것도 맞지만, 태서의 곁에 있는 것이 좋은 재인이 안 나간 것이기도 했다. 어젯밤, 사랑 앞에 얄팍해지는 것이 우정이라며 재인을 놀리던 상화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도 재인아. 나 지금 징짜징짜 행복해. 너 행복한 거 보니까 나도 행복하다구. 그러니까아! 내가 우리 째이니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강태서 씨 업어 줘야겠어.”
“상화야, 너 혀 많이 꼬였어. 괜찮은 거 맞아?”
“아이, 집 앞이라니까아?”
“상화야, 너 집에 들어갈 때까지 나랑 통화해. 끊지 마, 알겠지?”
재인의 당부가 무색하게 상화는 통화 도중에 아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전화를 끊었다.
“허어? 이게 누구야! 너어 이새끼이! 이 귀여운 새끼이! 유 큐트보오이이이!”
반가움 가득 드러난 외침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은 상화는 그 후로 연락이 없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몇 번이나 전화해 봤지만 받지 않았다. 아침에 보낸 메시지는 아직 읽지도 않은 채였다.
{앰버, 넌 한국에 술 마시러 왔어? 적당히 좀 마셔. 테드 좀 그만 괴롭히고. 재인 씨가 상화 씨랑 연락 안 된다고 걱정하고 있잖아.}
{나랑 우리 자기가 상화 집 바로 앞까지 데려다줬어요! 재인, 걱정할 거 없어!}
앰버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재인이 여태까지 고개 푹 숙인 채 입을 꾹 닫고 있는 테드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테드, 더워요?}
{네, 네? 아뇨?}
재인의 질문에 테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귀가 빨개서……, 어, 얼굴도 빨간데요?}
{어, 제가요?}
{테드, 너 열나는 거 아니야? 몸 안 좋아?}
{몸 안 좋다는 애가 평소엔 안 하던 새벽 운동을 했다고?}
테드는 아침잠이 많아서 새벽 운동이나 아침 운동은 안 한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새벽, 재인은 평소처럼 태서와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뛰러 나가다가 동네 입구에서 테드를 만났다.
{어디 다녀와?}
{아, 운동. 운동 중이었어요. 이제 집에 가려고요.}
{그렇게 입고……?}
태서가 회색 후드 티에 밤색 오버사이즈 코트를 겹쳐 입은 테드를 아래위로 훑었다. 테드는 잠시 제 옷차림을 내려다보더니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냥, 그냥 산책만. 산책만 하느라……. 하하, 하…….}
{하긴. 운동하고 집에 돌아가는 사람치고는 땀 한 방울 안 났네.}
{…….}
어딘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테드를 두고 태서와 재인은 발걸음을 뗐다. 새벽에 산책하는 게 특별히 이상한 건 아니었으니까.
{괜찮아요. 열나는 건 아니고, 그냥 잠을 설쳐서 그래요. 미안해요. 집중할게요.}
테드가 모두에게 사과하는 그 순간, 재인은 제 앞에 놓인 핸드폰 화면이 밝아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손을 뻗었다.
“아, 상화다.”
{뭐래요?}
기다리던 연락을 받은 재인이 한국어로 말한 그 순간, 그 누구보다 빠르게 재인을 향해 고개 돌린 사람은 테드였다. 한국어를 못하는 그가 상화의 이름만 듣고 재빠르게 반응한 것이다.
핸드폰의 메시지를 확인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테드의 질문에 재인이 커다란 눈을 껌뻑였지만, 알아채지 못한 테드가 그녀를 재촉했다.
{뭐라고 그래요? 몸은 괜찮대요? 잠은 잘……, 잤대요?}
테드를 바라보는 재인의 고개가 조금씩 기울어지는 사이, 눈치 빠른 태서가 일어섰다.
장 실장과 앰버 역시 수상한 눈으로 테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테드는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깨닫지 못했는지, 재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아요? 술 많이 마셔서, 혹시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하지는 않아요?}
거기까지 말한 테드가 태서의 손에 붙들려 2층으로 끌려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재인의 시선이 다시 핸드폰 화면으로 향했다.
<나 일 저질렀어ㅜㅜ 테드랑 잤어ㅜㅜ>
몇 번이나 다시 봐도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짧은 문장을 곱씹던 재인이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앰버에게 물었다.
{테드가……. 테드가 몇 살이죠?}
앰버가 피식 웃으며 두 손을 들어 각각 손가락 두 개와 한 개를 펼쳐 보였다.
{Twenty one.}
{Oh my…….}
“한국 나이로는 올해 스물세 살일 겁니다. 상화 씨와는 여덟 살 차이죠.”
재빠르게 덧붙인 장 실장의 말에도 재인의 입술은 다물릴 줄 몰랐다.
* * *
재훈이 시뻘겋게 핏발 선 눈을 들어 제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봤다.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간 대낮의 사무실에는 먼지만이 부유하고 있었다.
“강태서, 이 새끼…….”
제가 저지른 짓은 생각하지 않고, 태서가 세상에 까발린 것들만 떠올리는 재훈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툭, 불거졌다.
어금니에 힘주어 꽉꽉 씹어 대고 있자니 사고 흉터가 남은 턱이 저릿하게 느껴졌다. 욱신거리는 턱을 슬슬 문지른 그가 제 앞에 던져 놓은 서류를 향해 눈을 내렸다.
소속 연예인과 관련해서 줄소송이 이어지고 있었다.
거기다 믿었던 아이돌 멤버가 팀 내 불화와 소속사의 차별 등을 폭로하는 바람에 세계 각 곳에서 항의가 쏟아지는 중이었다. 전화선은 뽑아 놓은 지 오래고, 홈페이지는 마비되었다.
전화 응대해 주고 홈페이지를 관리할 사람도 없었다. 물어 줘야 할 금액만 수백억, 낌새를 알아챈 직원들은 일찌감치 그만두었다.
의외로 최근에 뽑은 비서가 끝까지 남아 제자리를 지키는 중이었지만 주안 엔터테인먼트는 거의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표인 재훈이 큰 열의와 애정을 가지고 돌본 곳이 아니었다. 운이 좋아 끼와 재능을 갖춘 아티스트를 들였지만, 관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거기다 강태서가 어찌나 치밀하게 계획해서 일을 벌여 놨는지, 하나를 겨우 해결하면 둘, 셋이 터졌다.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위기가 닥치면 나서서 해결해야 할 직원마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답을 안 주셨습니다.”
―자네, 지금 내가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나?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초조한 마음에 어제저녁 조대훈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검찰 출석 요구에 응하기 전이어서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조대훈의 화만 돋운 꼴이 되었다.
사실 조부가 남겨 준 유산으로 어떻게든 급한 불부터 끄면 회사를 살릴 수는 있다.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열심히 해 온 아티스트들을 데리고 노력하면 다시 재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조대훈에게 베팅했다. 기울어 가는 게 빤히 보이는 배지만, 거기서 재인 하나 구해 낼 수 있다면. 그래서 제 곁에 둘 수만 있다면.
“재인아,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동원해서라도 널 구할게. 네 아버지한테서. 그리고 강태서, 그 새끼한테서도.”
제가 재인을 살릴 구세주라 믿는 재훈이 피로감 짙은 눈을 들어 비어 있는 소파를 응시했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핥듯이 살피는 그곳은 지난번 재인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 * *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그래도 걱정이 돼요.”
태서와 재인이 집을 향해 걷는 중이었다. 점심은 집에서 간단하게 해 먹을 생각으로 음식 재료 배달을 주문해 둔 채였다.
“테드 얘기 들어 보니까, 충동적이긴 했지만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둘은 저번에 처음 만났잖아요. 그때만 해도 테드는 상화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거기다 상화도 자책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상화를 오래 알고 봐 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하고요.”
“둘 다 성인이니 알아서 잘할 겁니다. 거기다 테드는…….”
말소리를 줄인 태서의 발걸음이 멈췄다. 재인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겨 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재인의 얼굴을 제 품에 묻어 숨긴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그곳을 응시하는 태서의 눈빛이 날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