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미루는 건 안 좋아요
(79/123)
79. 미루는 건 안 좋아요
(79/123)
#79. 미루는 건 안 좋아요
2023.03.31.
지하라고는 해도, 한쪽 벽을 따라 높이 자리한 창을 통해 한낮의 햇살이 들어왔다. 그 햇살 아래 선 태서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내려놓았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간다. 몇 번이나 봤지만, 이렇게 보니 또 입 안이 마른다. 발리에 살면서 몸 좋은 남자들의 헐벗은 모습에는 익숙했다. 그런데 왜 강태서는 저렇게나…….
“……야해.”
“응?”
“……응?”
저도 모르게 속의 말이 튀어나왔나 보다. 눈을 좁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태서를 향해 재인은 고개 저어 보였다. 그러자 피식 웃은 태서가 뒤돌았다.
“아…….”
재인은 새삼 제 취향을 깨달았다. 잘생긴 얼굴도, 빼곡하게 들어찬 복근과 흉근도 모두 보기 좋지만 강태서의 진짜 매력은 뒷모습이었다.
뽀얀 피부에 잡티라고는 없다. 매끈한 살결이 도자기처럼 빛나 보이는 것은 그 아래 빈틈없이 자리한 근육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 기구를 들고 밀고 잡아당기는 운동이 아니더라도, 매일같이 수영, 클라이밍, 러닝을 빼놓지 않고 하는 남자였다.
강인하고 너른 어깨부터 군살이라고는 없는 허리까지 조밀하게 들어찬 근육은 움직임을 따라 세세하게 갈라졌다.
지하실 구석의 창고를 향해 걸으며 이리저리 목을 꺾고 팔을 돌려 어깨 근육을 이완한 태서가 이내 들고나온 것은 청소 도구였다.
“청소 전문으로 하시는 분을 부를 줄 알았어요.”
“보통은 그렇지만, 가끔은 직접 합니다. 이렇게 몸을 움직이는 동안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고, 개운하기도 하고. 다 끝나면 뿌듯하기도 해서.”
수도에 호스를 연결한 뒤 물을 다 뺀 수영장 바닥에 세제를 뿌리고 거품 내어 문지르기 시작하는 태서의 손에는 기다란 전동 브러시가 들려 있었다.
재인은 수영장 근처의 의자에 앉아 태서가 수영장 청소하는 것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나도 할래요.”
“내려오지 말아요. 미끄러워요. 그냥 거기서 나 청소하는 거 구경해요.”
“같이해요. 재미있어 보인단 말이야.”
“음…….”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린 태서와 돕겠다고 고집부리는 재인의 눈싸움이 길어졌다. 결국 진 건 태서였다.
좀처럼 고집부리지 않는 재인이 눈을 빛내며 말하자 태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브러시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재인에게 다가와 팔을 뻗었다.
“조심해서.”
그의 어깨를 짚은 손에 무게를 싣자마자 몸이 들렸다. 너무나 가뿐하게 저를 안아 드는 남자 때문에 웃음을 터뜨리는 사이 발에 수영장 바닥이 닿았다. 미끌미끌한 세제 거품이 발바닥을 간질였다.
재인이 미소를 머금은 채 태서를 올려다보았다. 앞머리가 조금 젖은 태서가 윙크하듯 눈을 접어 웃으며 그녀의 잔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재인을 향하는 그의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재인은 문득, 살면서 이렇게나 마음 놓고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상대가 없었음을 깨달았다. 어느 정도 자란 이후로는 줄곧 엄마와 친구처럼 지냈기에 늘 엄마 앞에서 의연했던 그녀였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걸 느낀 재인이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먹먹해진 탓에 눈시울이 젖어 든 것이 창피했기 때문이다.
“음, 내가 저 구석부터 물 뿌릴게요.”
“옷 다 젖을 텐데.”
“괜찮, 아……!”
상관없다며 호기롭게 발을 내딛던 재인이 휘청이자 태서가 단단히 붙들어 품에 안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히듯 뺨을 가져다 댄 재인 역시 그의 팔과 허리를 꽉 잡은 채였다.
“괜찮아요?”
“어, 응……. 네.”
“어디 봐 봐.”
천천히 고개 드니 걱정 어린 시선이 따라온다. 순간 재인은 계속해서 강태서의 다정한 시선 안에 있기를 바랐다. 그가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저만 바라봐 주기만을 바랐다.
“눈에 비누라도 들어갔나. 눈이 조금 빨간데 괜찮습니까?”
“……안 괜찮아요.”
“흠.”
설핏 미간을 찌푸리고 재인의 빨개진 눈을 살피는 그를 향해 재인은 미소 지었다. 심장이 간질거려서 절로 나는 웃음이었다.
“일단 물로 좀 씻어 내고, 병원에…….”
“호, 해 줘요.”
“응……?”
“호, 해 주고. 뽀뽀도 해 주고.”
“…….”
“그러면 나을 것 같은데.”
그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말들이 그에게는 자연스럽다. 조금 더 그를 웃게 하고 싶고, 조금 더 그의 시선이 제게 머물기를 바란다.
잠시간 그녀를 내려다보던 태서 역시 재인을 따라 웃었다. 달콤한 눈 맞춤이 이어진 끝에 이내 과할 정도의 입맞춤이 쏟아졌다.
“그만, 그만!”
“아직 아픈 것 같은데.”
“아, 하하, 아니, 아니야!”
간지러운 손길과 가볍게 내려앉는 키스가 계속되는 사이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지하실 가득 거품처럼 톡톡 터졌다.
“나 너무 웃어서, 배 아파요, 아니, 잠깐만!”
“배 아프면 안 되지.”
허리를 숙인 채 그를 피하려는 재인을 번쩍 안아 든 태서가 수영장 가장자리에 그녀를 앉혔다. 한바탕 웃음이 지나고, 재인은 아래에서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매끈한 뺨과 젖은 머리칼을 매만졌다.
“태서 씨.”
“응.”
“모르던 세계를 경험하게 해 줘서 고마워요.”
“……나야말로.”
진득한 시선이 어느새 서로의 입술을 향했다. 서로의 숨결이 섞이고 닿을 듯 말 듯, 입술이 스친다.
“청소, 나중에 할까.”
유혹하듯, 남자의 나지막한 속삭임은 여자를 애타게 만들었다. 재인이 더운 숨을 뱉으며 천천히 그의 어깨를 매만졌다.
“……미루는 건 안 좋아요.”
“윤재인 안는 걸 미루지 않으려는 건데? 그것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아하……?”
키득키득, 장난스러운 키스가 이어지고, 이내 태서가 재인을 다시 안아 들었다. 짙어지는 입맞춤과 애틋해지는 손길에 어느새 옷이 젖는 건 상관없어진 둘이었다.
* * *
유리는 커튼 틈으로 집 앞에 모인 사람들을 쏘아보았다. 농성 중인 사람들과 취재하려는 기자들로 그녀의 집 앞은 대낮처럼 밝았다.
핸드폰은 며칠째 조용했다. 처음엔 무슨 일이냐며 유리를 걱정하는 메시지를 보내오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유리가 보낸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그녀가 기다리는 연락은 따로 있으니.
애정을 갖고 관리하던 SNS 계정은 포털 사이트에 그녀의 이름이 오르내리자마자 비공개로 돌렸다. 비난 가득한 공격과 조롱의 댓글이 쏟아진 탓이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친구들 대부분이 자신을 차단했다. 한때는 어떻든 저와 친해지려 비위를 맞추던 것들이었다. 저와 친분이 있음을 과시하려던 것들이었다.
“……다 밟아 줄 거야.”
엄마는 그제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서 갔고, 아빠는 저녁도 거르고 김 실장 아저씨와 독대 중인 듯했다.
결국, 검찰의 총구가 현양 건설을 겨눴다. 현양 재단 이사장인 지승희는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한 관계로 검찰 출석이 미뤄졌지만, 조대훈은 바로 내일 검찰 출석을 요청받은 상황이었다.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생각했는데 검찰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가뜩이나 윤재인 때문에 짜증 나는데 상황이 꼬여 돌아간다.
태어나 처음 맞이하는 위기지만, 유리는 집안의 몰락보다도 윤재인과 강태서가 함께할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더 끔찍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 자연스럽게 맞잡은 손, 윤재인의 어깨와 허리를 감싼 강태서, 강태서에게 안겨 저를 비웃는 윤재인. 서로에게 기울 듯 맞붙어 입 맞추는 두 사람.
“다 속고 있는 거야! 다 그X한테 속고 있는 거라구!”
또다시 피딱지가 앉은 손끝이 이를 향했다. 하도 잘근잘근 씹어 댄 탓에 손톱은 남아나지도 않았는데, 이젠 그 아래 생살이라도 뜯어 피를 봐야 속이 시원하다.
농성이 과격해질 것을 대비해 와 있는 경찰차의 빨갛고 파란 불빛을 노려볼 때였다. 티 테이블 위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알아챈 유리가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말해요.”
기다리던 사람의 연락에 유리의 목소리가 설렘으로 물들어 한 톤 높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왜 아직도 진척이 없다는 거야? 당신들, 돈 받아먹은 게 얼만데! 이딴 식으로밖에 일 못 해?”
허공을 쏘아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유리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홉뜨고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사람 조지는 게 당신들 전문이라며?”
―우리 고객님이 많이 급한 건 알겠는데, 틈이 없는 걸 어쩌라고. 그 여자,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는 데다 나오더라도 항상 다른 사람이랑 함께더라고.
윤재인이 누구랑 함께일지를 상상하는 유리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저는 집구석에 틀어박혀 나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제 남자 품에서 하하 호호 웃고 있을 윤재인을 생각하니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내가 이 일 해 온 게 몇 년인데. 딱 보면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은 각이 나와. 그 여자 감싸고 도는 남자는 건드리면 우리가 X되겠더라고. 아니야?
“…….”
―그런 위험에 대해서는 우리 고객님이 말씀이 없으셨지. 거기다 주변에 경호원이 2중, 3중으로 깔려 있어. 이런 경우에는 위험 수당 추가해 주셔야 되겠는데?
“처음에 받아 간 돈이 얼만데 그딴 소리를 해?”
―그러면 다른 데 알아보시든가. 우리 애들 그동안 밤낮으로 그 여자 지켜보고 쫓아다니느라 밥도 제때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관련 비용 제하고 돌려드릴 테니까.
건들거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돌려준다는 돈은 푼돈일 게 뻔했다. 까득까득, 손끝을 짓씹던 유리가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얼마를 원해요?”
―큰 거 한 장 정도는 주셔야 하지 않을까?
“…….”
―그래도 기다려 주시는 거 생각해서 많이는 안 부른 겁니다.
핸드폰을 귀에서 뗀 유리가 짜증 가득한 손으로 화면의 은행 앱을 터치했다. 어릴 때 외할머니가 만들어 준 계좌를 열어 1억을 송금하는 그녀의 손짓에 망설임은 없었다.
“이러고도 일 어렵겠다는 말 나오면, 그땐 어쩔 거예요?”
―아이, 그럴 리가 있나. 우리도 염치라는 게 있는데.
“한 번은, 적어도 한 번은 기회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 한 번, 안 놓칠 테니 좀 더 기다리쇼. 어이쿠, 돈 보내셨네. 빠르기도 하시지. 우리 고객님, 그러면 다음에 또 연락합시다?
윤재인 때문에 상종할 필요 없던 질 낮은 인간들까지 마주하게 된다. 통화를 끝낸 유리가 다시금 은행 계좌를 열어 잔금을 살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비상금으로 쓰라고 넣어 주신 돈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유리에게 희망은 하나뿐이었다. 남자가 일에 성공했다며 잔금을 요구해 오는 상황을 상상하는 그녀의 눈에 희열이 차올랐다.
지옥 불에 들어가더라도 윤재인이 강태서와 행복한 꼴은 못 본다. 저를 놓친 강태서가 피눈물 흘리는 걸 봐야겠다.
엄마도, 아빠도, 정재훈도 다 필요 없다. 진작 이렇게 나섰어야 했다. 허공을 응시하는 유리의 입꼬리가 사르륵,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