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완벽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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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완벽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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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완벽한 인생
2023.03.28.
“그래! 우리 유리!”
“이것 보라지. 정말 양심 없는 게 누군지.”
“뭐……?”
스윽, 고개 내민 대훈이 승희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당신 유리겠지. 우리 유리가 아니라.”
“그게 무슨!”
따져들 듯 덤벼들려던 승희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멈춰 섰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공포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 왔다. 크게 확장된 동공은 초점 없이 흔들렸고, 경악으로 물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아니다, 아니다, 하면 진짜 아닌 거 같나?”
“…….”
“맞다, 맞다, 하면 진짜 맞는 것 같고?”
조소를 머금은 대훈의 뒤쪽, 허공을 응시하는 승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씩 거칠어지는 숨을 내뱉는 승희는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당신, 내가 알아서 놀란 얼굴이 아닌데? 설마, 정말 잊고 산 건가?”
“…….”
“추악한 짓 저지른 건 덮어놓고, 뭐든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게 쉬운 모양이야. 당신은 세상 살기 편하겠어.”
그 말을 끝으로 승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훈이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도 승희는 얼어붙은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당신 엄마가 비상시에 쓰라고 주신 돈 있는 거 알아. 지금이야말로 비상 상황이야. 정리해 놔. 30년 동안 남의 애 키워 준 값은 받아야 하지 않겠어?”
“…….”
“아. 당신 딸 허튼짓 못 하도록 잘 감시해.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될 혼처를 알아볼 테니.”
서재를 나서기 전, 내뱉듯 속삭인 대훈의 말에도 승희는 돌아보지 않았다. 먼 세월을 거슬러 묻어 놓았던 기억을 더듬는 그녀의 두 눈이 희뿌옇게 흐려졌다.
“……그러니까, 내 애라는 거지?”
“무슨 질문이 그래요? 도대체 날 뭐로 보고!”
30여 년 전, 사촌 오빠의 소개로 대훈을 만나게 되었고, 한눈에 반했다.
하지만 더 좋은 집안과 사돈을 맺길 바랐던 부모님은 대훈과의 만남을 반대했고, 함께 집안의 반대를 무릅써야 할 남자는 미지근했다. 승희 혼자 절절한 관계였다.
알고 있었다. 대훈이 왜 자신을 만나 줬는지. 승희의 집안은 대대로 재력가였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사업 확장을 계획하던 대훈은 큰돈이 필요했다. 그가 욕심내는 것이 제가 아닌, 제 집안이라고 해도 좋았다.
제게 열렬하지는 않았지만, 저 아닌 다른 여자를 곁에 두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의 유일한 여자가 될 수만 있다면. 그가 제 것이 될 수 있다면.
승희는 제 바람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아이를 가져서라도 그와 결혼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대훈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고, 그리 어렵지 않게 뜻한 바를 이루었다.
하지만 대훈은 피임에 철저했다. 더욱이 그를 대하는 부모님의 냉대가 길어졌다. 대훈이 저를 보는 눈빛 역시 점점 더 차가워져 갔다. 불안감이 커진 승희는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았다.
“승희야.”
“오빠가 나를 무슨 눈으로 바라보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하지만 너 지금…….”
“왜 망설여? 오빠가 지금 원하는 거,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승희 부친의 일을 돕고 있던 김형주는 승희가 오래도록 알고 지내 온 오빠였다. 고아였지만 머리가 뛰어나게 좋아 부친의 후원을 받아 학업을 마쳤고, 몇 년간은 승희의 공부를 봐주기도 했다.
승희는 그가 저를 향해 품은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이용했다. 남자는 승희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알면서도 오래 좋아한 그녀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했다.
김형주와 몇 번의 밤을 보낸 후, 승희는 임신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조대훈에게 초음파 사진을 내밀었다.
“세상에 완벽한 피임법은 없는 거, 알잖아요. 아이가 생겼으니 우리 부모님께서도 더는 당신 섭섭하게 만들지 않을 거예요.”
“……그렇군.”
“내겐 당신밖에 없어요. 알죠? 이제 내가 가진 모든 건 당신이 갖게 될 거예요.”
잠깐 의심하는 듯하던 대훈은 의외로 순순히 승희의 임신을 받아들였다. 그 후로 결혼까지는 일사천리였다.
외동딸의 고집을 이길 수 없었던 승희 부모님은 대훈을 사위로 인정했고, 그의 사업에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일을 돕던 김형주가 조대훈의 비서로 일하게 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그 아이, 정말 조대훈 아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애잖아.”
“미쳤어?”
“승희야, 이러지 말자. 더 늦기 전에…….”
조금씩 불러오는 배를 가리기 위한 웨딩드레스를 입어 보던 승희는 대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제게 속삭이는 형주를 향해 눈을 치떴다.
“입 다물어. 헛소리라도 도는 날엔.”
“…….”
“오빠는 강간범이 되는 거야. 오빠 똑똑하잖아. 생각해 봐. 도대체가 말이 되니? 내가 뭐가 아쉬워서 고아 새끼랑 좋다고 배를 맞춰?”
“……지승희.”
“대훈 씨 아이야. 대훈 씨와 나를 연결해 준 소중한 아이란 말이야. 난 이 아이에게 티끌만큼이라도 더러운 게 묻는 건 용납 못 해.”
아이의 아빠임을 드러내려는 형주를 오물 취급한 승희의 시선이 부푼 배를 향했다. 그녀는 제 배를 어루만지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배 속의 아이는 대훈의 아이이다. 그건 그녀가 그렇게 하기로 한 이상, 그리고 대훈이 받아들인 이상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날 사랑한다며? 변치 않을 거라며?”
“…….”
“그 마음이 얼마나 큰지, 평생에 걸쳐 증명해 봐. 그러면 오빠 마음 인정할게. 내게 잘 보이고 싶어? 그러면 나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돼.”
“승희야, 너 정말 이렇게 해야겠니? 이게 정말 네가 원하는 거야?”
“어.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는 게 내가 원하는 거야. 난 그 꿈을 이뤄서 이제 그 남자의 아내가 될 거고.”
그렇게 말하는 승희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룬 행복이 진짜라고 믿는 것처럼.
“평생 곁에서 날 보고 싶다며.”
“그건…….”
“오빠도 좋겠어. 열심히만 하면 그 소원 이루겠더라. 대훈 씨가 오빠 마음에 든대. 회사 정리되는 대로 오빠를 비서실장으로 앉힐 생각이던데?”
“…….”
“그러니까, 김 비서. 앞으로도 우리 남편 잘 부탁드려요.”
넋이 나간 형주의 뒤에서 나타난 대훈을 향해 승희는 눈부시게 미소 지었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행복한 신부 그 자체였다.
그 후, 형주는 절대로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함부로 그녀를 바라보는 일도 없었다. 개처럼 일하며 대훈의 신용을 얻었고, 대훈이 가장 믿고 일을 맡기는 비서실장이 된 것이다.
유리가 태어났을 때, 승희는 남편의 뒤에서 침묵하던 형주를 흘끔거렸다. 하지만 주제를 깨달았는지, 그는 입을 굳게 닫은 채 눈을 내리뜨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며칠 뒤, 대훈은 친자 확인 검사 결과지를 확인했다. 결과는 당연했다.
“그것 봐요. 나한텐 당신뿐이라니까? 나 정말 서운해요.”
“확실히 하려는 것뿐이야.”
“이제 당신 딸이라는 거 알았으니까, 안아 봐요.”
“……너무 작아 안기 두렵군.”
“당신도 참, 이럴 때 보면 마음이 너무 약하다니까.”
의심 많은 남편의 행동을 예상한 승희가 미리 손써 둔 탓도 있었지만, 결과지를 받아 대훈에게 건넨 이가 형주였다.
형주는 승희가 준비한 것에서 빈틈을 찾아내고 완벽한 결과를 만들어 대훈에게 건넨 것이다. 승희가 믿는 그대로.
승희의 굳건한 믿음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이는 자랄수록 승희의 판박이였다. 신기하게도 형주를 닮은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처음 몇 년은 형주가 허튼소리를 하지는 않을까,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형주는 묵묵히 맡은 일만 했고, 그녀를 상사의 아내로 대했다.
그렇게 딸아이에게 세상 가장 좋은 것을 안겨 주는 재미에 푹 빠졌던 승희는 점차 제가 저지른 일을 잊어 갔다.
“왜 그렇게 유리를 보고 있어요? 혹시, 당신 닮은 곳 찾아요?”
“……음.”
“나만 닮아 서운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 유리 동생 가져요. 이번엔 당신 똑 닮은 아들일 거야.”
“아니, 아이는 하나로 됐어.”
“왜요?”
“……고생하는 모습, 더는 보고 싶지 않군.”
조대훈은 아이에게 살가운 아버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저를 두고 따로 만나는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워낙 성격이 차가운 사람이니 그러려니 한 것이다.
그렇게 행복에 취한 승희는 제가 저지른 죄를 깊숙이 덮었다. 남편의 말한 것처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오를 잊고 산 것이다.
김형주의 아이가 아니다. 조대훈의 아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스스로를 세뇌한 결과, 어느덧 유리의 출생에 관하여 세상에 부끄러운 것이 없어졌다.
게다가 비밀을 알고 있는 단 한 명의 공범이 사실을 발설할 리 없음을 확인한 뒤로 그녀는 점점 더 제가 만든 행복에 취해 갔다. 완벽한 인생을 살고 싶었던 그녀의 무의식이 제가 지은 죄를 지워 낸 것이다.
결혼 전, 남편과 윤세나와의 사이에 아이가 있음을 알게 된 밤, 배신감에 떨던 그녀의 세상이 무너졌다. 견고하게만 느껴지던 행복이 유리 거울처럼 깨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의식이 딸아이의 친부를 조대훈이 아닌 김형주로 바꾸는 것은 아니었다. 더러운 그와는 다르게 그때까지의 자신은 완전무결해야 했으므로. 그녀는 철저히 피해자여야 했으므로.
그래서 반발하듯 남편 대신 곁에 둘 남자로 최 비서를 택했다.
어쩌면 그때까지도 그녀를 사랑했을 김형주를 택하지 않은 건 당연했다. 김형주는 승희에게 남편의 비서실장일 뿐이었다. 저와 제 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인 것이다.
“네가, 네가 나를, 욕할 수, 있어? 너 따위가?”
의식적으로 잊고 살았던 진실을 마주한 승희가 벌벌 떨었다. 가쁜 숨 사이로 내뱉는 말이 짧게 끊어졌다. 이제 모든 것이 부질없다. 제 삶은 완벽하지 않다. 아니, 완벽하게 엉망이다.
“아니야!”
오랜 기억이 해일처럼 밀려와 그녀를 덮쳤다. 지끈지끈하게 죄어 오는 두통에 머리를 쥐어뜯던 승희의 눈이 책상에 놓인 남편의 사진을 향했다.
“너 따위가……. 너 따위가!”
그녀가 스스로를 속였던 건 다 그를 위해서였다. 조대훈을 사랑해서였다. 승희는 그저 사랑하는 이에게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주었을 뿐이다.
누릴 것 다 누려 놓고 이제 와서 해묵은 기억을 헤집어 꺼내는 남편은 저를 욕할 자격이 없다.
평생 제가 뭘 하든 관심도 없었으면서, 필요하니 그녀가 감추었던 죄악을 파헤쳐 들이미는 그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
아낌없이 주었던 사랑을 배신하고 윤세나의 망령만 껴안고 사는 주제에. 내 부모가 남겨 준 재산 덕에 겨우 회장님 소리 듣는 주제에. 단 한 번도 내게 진심이었던 적이 없는 주제에.
“아아악!”
절규하듯 소리치며 몸을 돌린 승희가 손을 뻗었다.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대훈이 나간 서재 문을 향해 내던졌다.
부서지고 깨지는 것은 술병과 화병뿐만이 아니었다. 승희의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